오늘날 공연예술 시장에서 ‘뮤지컬’은 독보적인 위상을 지닌다. 국내에서만 해도, 2025년 뮤지컬 장르는 전체 공연 티켓 판매액의 약 29%를 차지하며 공연시장 전체를 견인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뮤지컬은 국립 극장이나 예술의 전당이 아닌, 삶의 활기가 넘쳐흐르던 시끌벅적한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의 오페라가 왕실의 후원 아래 고급예술로 정착하던 것과 달리, 미국에서 등장한 초기의 뮤지컬은 티켓 수익이 없으면 내일의 무대를 기약할 수 없었던 생존형 오락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철저히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로 출발한 뮤지컬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이어져 공연시장의 주류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150여 년간 지속된 뮤지컬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고희경의 저서 『뮤지컬의 탄생』은 이 질문들에 대해 명민한 음악사회학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역사를 성공작들의 연대기가 아닌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응답의 역사로 독해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낙관주의를 담은 <오클라호마!>부터 베트남전 이후의 냉소를 형상화한 손드하임의 콘셉트 뮤지컬, 록과 힙합이라는 주변부의 언어를 무대 위로 끌어올린 <렌트>와 <해밀턴>까지, 뮤지컬은 시대의 결핍을 마주할 때마다 기존의 형식을 스스로 파괴하고 재구성하며 생명력을 연장해왔다는 것이다. 개별 작품에서 나타나는 음악의 형식적 변화를 동시대의 정치사회적 사건들과 나란히 읽어내는 이러한 접근은 뮤지컬을 단순한 오락이나 상업적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동시대성을 획득한 사회적 예술로 격상시킨다.
뮤지컬의 150년을 유연한 수용과 변화의 역사로 정의한 『뮤지컬의 탄생』은, 이 장르의 생명력을 자본의 논리 위주로 설명하던 담론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의를 지닌다.
혼종성의 장
그러나 저자의 논지가 더욱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작품을 넘어 이를 소비하는 관객이 시대의 결핍을 감지하고, 그것을 채워주는 새로운 형식의 뮤지컬에 반응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창작의 영역에서 이 전제는 유효하다. 브로드웨이의 창작 생태계는 저자의 설명대로 시대정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새로운 작품을 생산해왔다. 그러나 관객의 소비 행위는 종종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시대의 결핍을 의식하며 극장을 찾지는 않는다. 일상의 피로를 내려놓기 위해,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감동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수십 년 된 작품을 선택하는 관객도 분명히 존재한다. 실제로 오늘날 국내 뮤지컬 시장의 매출 대부분은 소규모 창작 뮤지컬이 아닌 <오페라의 유령>, <시카고> 같은 라이선스 대작들이 차지하며, 그 중에는 오늘날의 가치관이나 감수성으로 보면 다소 구시대적이거나 문제적인 작품들도 적지 않다. 즉, 저자의 논의는 뮤지컬의 생산 메커니즘은 적절히 해명해내지만, 그 창작물이 실제로 소비되는 방식의 복잡성은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뮤지컬의 생명력을 보다 온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논지를 이어받되, 그것이 설명하지 못하던 영역으로까지 시야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뮤지컬 생태계는 단일한 시대정신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또한 특정한 지점을 향해 선형적으로 발전하며 과거를 대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혁신적인 창작물과 수십 년 된 고전, 실험적인 소극장 작품과 블록버스터 라이선스 공연이 동일한 시공간 안에서 공존하며 각자의 관객을 만난다. 저자의 설명이 유효한 생산의 층위와,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수용의 층위가 함께 작동하는 이 현장은, 일종의 ‘혼종성의 장’으로 독해할 때에야 비로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때 ‘혼종성’은 단순한 양식의 혼재라기보다는, 클래식한 대작들이 이룩한 안정적인 시장 기반 위에서 실험적인 창작물이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구조적 특성에 가깝다. 이러한 점에서 ‘혼종성’은 뮤지컬 생태계가 스스로를 유지하고 갱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의 브로드웨이 공연 장면
한국의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브로드웨이에서 거둔 성공은 현대 뮤지컬 생태계의 혼종적 특성이 극대화된 상징적인 사례이다.
근미래 한국을 배경으로 두 로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사랑을 다루는 이 작품은 ‘로봇’과 ‘근미래 한국’이라는 지극히 낯선 요소를 브로드웨이의 거대한 주류 시스템 안으로 들여오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는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섬세한 주제를 담았다. 작품 속 낡은 재즈 레코드와 종이컵 전화기와 같은 아날로그적 장치들은 화려한 디지털 스펙터클에 지친 동시대 관객들에게 희소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고, 브로드에이 버전에만 포함된 재즈풍 음악은 한국적 정서와 미국적 음악 문법을 결합시키며 문화적 마찰을 완화하고 이야기가 가진 감동을 이끌어낸다.
이 작품은 생산의 층위에서는 디지털 과잉 시대의 아날로그 감수성과 인간적인 온기라는 시대의 결핍에 응답하는 한편, 수용의 층위에서는 신선한 소재에서 오는 새로운 자극과 익숙한 감동을 동시에 제공한다. 결국 대학로 소극장에서 출발한 소규모 뮤지컬이 ‘토니 어워즈’의 주요 부문에서 6관왕을 석권한 기적 같은 일은 두 층위에서 극대화된 혼종성으로부터 비롯된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뮤지컬의 탄생』은 뮤지컬 150년의 역사를 사회적 변화와 장르 자체의 대화로 읽어내며, 뮤지컬을 진지한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성취를 지닌다. 그러나 시대정신에 대한 응답이라는 생산적 층위로의 접근만으로는 이 장르가 가진 오랜 진화의 역사를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 뮤지컬의 생산과 수용이 서로 다른 원리로 작동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두 층위가 혼종의 생태계 안에서 공존하며 상호작용한다는 사실까지 함께 고려될 때 비로소 우리는 뮤지컬의 진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유령과 헬퍼봇이 같은 시대의 무대를 나눠 쓰는 이 혼종의 생태계 안에서, 뮤지컬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