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을 열며
1867년 대만 남부 해안에 난파선 한 척이 떠밀려왔다. 그 사건은 한 섬 안에 겹쳐 있던 민족과 권력, 그리고 ‘야만’이라는 이름의 경계를 드러냈다.
미국과 청나라뿐 아니라 대만 내부의 한족 이주민과 원주민 집단도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바라봤다. 누군가에게는 자국민이 희생된 외교 문제였고, 누군가에게는 통제하기 어려운 변방의 분쟁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들의 땅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충돌이었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시선이 이처럼 달랐던 것은 당시 대만이 하나의 사회나 하나의 정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강연이 서울 쌍문동 동네책방 생활용품에서 열렸다. 강연은 대만 공영방송 PTS의 주한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대만을 오가며 취재해온 양첸하오 기자가 진행했다. 지난 12일 열린 첫 강연에서 양 기자는 역사소설 『포르모사 1867』을 중심으로 로버호 사건과 대만 원주민의 근대, 그리고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한족 이주와 원주민 사회의 변화를 짚었다.
# 한족의 이주, 달라진 섬의 경계
양 기자는 『포르모사 1867』을 설명하기에 앞서 당시 대만을 구성했던 집단부터 소개했다. 그가 작품의 줄거리보다 배경 설명을 먼저 꺼낸 것은 1867년의 대만을 오늘날의 하나의 ‘대만인’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책은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읽으시기 엄청 어려워요. 대만 사람들이 읽어도 사실 엄청 힘들어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간략하게 배경을 설명하고, 나중에 이 책을 읽으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우리가 항상 대만 이야기를 하면 저처럼 생긴 한족만 있는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사실 대만은 한족뿐만 아니라 원주민도 있어요.”
당시 대만에는 평원에 살던 평포족과 산지의 고산족이 있었고, 복건성에서 건너온 복록인과 뒤이어 이주한 하까인이 정착하고 있었다. 한족 이주가 이어지면서 이들 사이의 관계도 달라졌다.
복록인은 비교적 먼저 서부 평원에 자리 잡으며 생활영역을 넓혔다. 뒤늦게 들어온 하까인은 좋은 평지가 상당 부분 선점된 뒤였기 때문에 산지와 평원의 접경에 정착했다. 이 과정에서 하까인과 고산족 사이에는 거래와 통혼도 이뤄졌다.
“평포족은 20년, 30년, 40년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한족화돼버렸어요. 원래 있던 의상을 포기하고 아예 한족처럼 살게 됐어요. 1700년 이후에는 거의 없어졌어요. 다 통혼하고 결혼했으니까요. 반대로 고산족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러나 고산족 역시 한족과 단절돼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서로 물건을 사고팔았고, 한족이 원주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도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원주민의 토지가 점차 한족에게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아쉬운 게 원주민은 의상도 다르고 종류도 많고 자신의 언어도 다 다른데, 자신의 문자가 없어요. 언어만 있어요. 많은 소수민족이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치사하게도 한족이 이 점을 이용했어요. 처음에는 평포족과 같이 살고, 고산족과도 고기를 사고 쌀을 파는 식으로 거래했어요. 또 한족이 농사를 지으려고 원주민에게 땅을 빌리기도 했어요.”
양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복록인이 고산족과 구두로 토지 대여를 약속한 뒤 그 땅을 사실상 점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서로 남은 계약이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족의 생활영역이 넓어질수록 원주민의 공간은 좁아졌다.
“고산족은 ‘너희 한족, 특히 복록인은 치사하다. 우리를 속이고 회유하면서 우리가 원래 살던 땅과 영토를 많이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땅과 생활방식을 지키고 싶은데 외부인이 마음대로 들어오면 안 된다, 우리 부족은 우리만의 규칙과 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또 서로 거래는 해요. 갈등이 있고 서로 이용하는 대목도 있어요. 도대체 어떻게 같이 살아야 할지,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바로 이 책의 주요 내용이에요.”
# 1867년 로버호 사건, 충돌이 수면 위로
1867년 3월, 미국 상선 로버호가 폭풍우를 만나 대만 남부 헝춘반도 해안에서 좌초했다. 육지에 오른 선원들은 현지 원주민의 공격을 받았고, 선장을 포함한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청나라에 책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대만을 자신의 영토로 여기면서도 사건이 벌어진 원주민 지역까지 실질적으로 통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른바 ‘로버호 사건’은 『포르모사 1867』의 출발점이다. 양 기자는 로버호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과 청나라의 시선이 처음부터 달랐다고 설명했다.
“미국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청나라가 너무 무능한 거예요. 그러면 차라리 우리가 직접 나서 원주민이랑 대화를 하고 협상하면 어떨까. 그런데 원주민은 우리를 모르고 우리도 원주민을 모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접촉하면 좋을지, 바로 이 소설의 내용이에요.
청나라의 시각으로 생각하면 대만은 우리의 땅이지만 원주민은 관리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우리는 원주민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냥 야만인들이니까 차라리 방임해서 알아서 살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거죠. 외교적인 문제만 되도록 일으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사람이 여기서 살해당했는데 왜 청나라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방임하는가’라는 거죠. 청나라는 대만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중요시하지도 않고, 통치와 대응 방식도 너무 비효율적이니까 차라리 우리가 직접 나서면 너희보다 훨씬 더 잘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국에게 사건은 자국민이 살해된 외교 문제였다. 청나라에게는 자신들이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변방에서 벌어진 국제 분쟁이었다.
고산족의 시선은 또 달랐다. 이미 자신의 땅으로 들어온 외부인과 반복해서 충돌해온 이들에게 문제는 단순히 ‘낯선 외국인이 왔다’는 데 있지 않았다. 누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는지, 자신들의 규칙과 질서를 누가 결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 『포르모사 1867』 그 이후: 식민지배와 독재가 중첩된 대만
1867년의 충돌 이후 대만의 사회 구성은 20세기를 거치며 또 한 번 급격하게 요동쳤다. 일제강점기(1895~1945년)를 지나, 1949년 국공내전 이후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복록인과 하까인, 여러 부족의 원주민에 더해 외성인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집단이 얹히면서 대만 사회의 복잡성은 더욱 심화되었다.
“글이 똑같은데 발음이 전혀 달라요. 다 달라요. 그래서 대만은 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단순한 한족 중심의 사회도 아니에요. 한족도 두 가지, 세 가지가 있어요. 복록인과 하까인뿐만 아니라 1949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들도 또 왔잖아요.
원주민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인구수는 2%밖에 안 돼요. 복록인이 약 70%, 하까인이 12%, 1949년 이후 중국에서 온 외성인이 또 12% 정도예요. 그다음이 원주민이에요. 원주민은 여러 부족이 있지만 전체 인구에서는 2%밖에 안 돼요. 그래서 대만은 완전히 다양한 구성이에요.”
문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만 고유의 정체성을 쌓아가던 섬에 1949년 외성인 중심의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가 들어섰다는 점이다. 약 12%에 불과한 외성인 권력이 전체를 통치하면서,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복록인을 비롯한 본성인과 원주민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지배당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1867년에 존재했던 외부 권력과 현지 민족 간의 균열이 현대사 속에서 독재라는 형태로 재현된 셈이다.
“대만의 문제는 국민당이 온 뒤에 일당독재가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록인들도 약자가 돼버렸어요. 외성인이 지배하고 있었으니까요. 복록인도 자기가 지배당한 피해자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1987년 대만이 민주화된 뒤에 복록인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우리는 복록 문화를 복원해야 한다’고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원주민은 이때까지 이미 극소수가 돼버려서 정체감도 없어지고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원주민의 행동은 복록인과 비교하면 훨씬 더 힘들어요. 복록인은 자체 인구가 70%니까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 민주화 이후, 대만 사회에 남겨진 진짜 과제
국민당 독재 정권이 남긴 대표적인 상흔은 '역사 교과서' 문제였다. 독재 시절 대만의 역사교육은 대만 자체의 역사를 주변부에 두고 철저히 중국 대륙 중심의 정통성만을 가르쳤다.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대만사가 독립된 과목으로 다뤄지기 시작했고, 복록인과 하까인의 문화 역시 다시 조명을 받았다.
“교과서 문제도 민주화 뒤에 계속 있었어요. 민주화는 1987년인데 교과서의 첫 번째 개정은 2000년대예요. 2000년이 돼서야 개정됐어요. 그전에는 1학년, 2학년에서 중국 역사를 배우고 3학년에서 세계 역사를 배우는 식이었어요.”
그러나 독재에서 벗어나 대만사를 복원하는 과정은 오늘날 또 다른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복록인 중심의 역사 복원이 이뤄지는 사이, 도시 이주와 통혼으로 언어·문화 전승이 어려운 원주민(2%)이나 소수 하까인의 목소리가 다시 묻힐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외부 권력에 맞서 토지와 생활방식을 지키는 것이 문제였다면, 오늘날 민주화된 대만에서는 섬 안의 다양한 집단이 각자의 언어와 문화, 역사를 어떻게 같은 무게로 보존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가 됐다. 양 기자가 『포르모사 1867』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가치 역시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시면 대만은 진짜 생각보다 복잡해요. 한족만이 아니라 원주민 사람들의 목소리와 의견도 더 들어야 하고, 한족마저도 하까인과 복록인의 시각은 또 달라요. 그래서 이 책의 제일 큰 의미는 대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 타인의 언어에서 스스로의 이름으로: 1867년 대만이 현대 한국에 던지는 질문
시간이 흘러 역사소설 『포르모사 1867』(원제 『쿠이레이화』)는 대만 공영방송 PTS를 통해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방송사는 원작 제목 속 '쿠이레이'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작품의 타이틀을 『스카루』로 새롭게 변경했다. 한족 이주민의 시선에서 원주민을 비하하던 차별적 명칭을 내려놓고, 당시 원주민들이 스스로 부족 연맹을 이루며 불렀던 주체적인 이름을 채택한 것이다.
1867년 로버호 사건 당시 외부 권력은 원주민을 '통제 불가능한 야만'으로 치부했다. 이후 대만은 일제강점기와 국민당 일당독재라는 긴 억압의 시간을 거치며, 타인의 언어로 규정되던 역사를 넘어 당사자 고유의 이름과 목소리를 찾아 나갔다.
이러한 대만의 궤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단일민족이라는 오래된 신화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주민과 다문화 구성원, 소수자들을 '외부인'이나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곤 한다. 우리 기준에서 일방적으로 부르는 명칭과 효율 중심의 정책 속에서, 그들이 직접 건네는 고유의 목소리와 정체성은 종종 주변부로 밀려난다.
타인이 일방적으로 부여한 굴레를 벗어던지고 당사자의 언어로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 1867년 대만 남부 해안에서 시작된 질문은 다문화·다집단 사회로 빠르게 이행하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가 과연 어떠한 시선으로 타자를 바라보고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지 깊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한편, 이번 강연이 진행된 '생활용품'은 쌍문동 백운시장 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마을 책방으로, 주민이 기증한 책을 이웃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자생적 모델로 외부 자본 없이 자리를 잡았다. 개점 이후 북토크, 문학 독서모임, 인문학 강연, 지역 청년 굿즈 제작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빠르게 성과를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재단법인 평산책방,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등의 지원을 받으며 사업을 키워 왔다. 특히 모든 프로그램들은 시장 상인들과 지역 청년들 직접 참여한 문화기획 워크숍에서 자생적으로 도출되어 더욱 뜻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