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PRESS] 감람색이 저기 반 보 물러나, 그쪽을 오래 읽다 보면 -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 티모시 리다우트 & 프랑크 뒤프레 듀오 리사이틀 (8.18) [공연]

새카만 밤을 품은 오래된 나무 한 그루

by 장유진 에디터
2026.08.19 14:29

IMG_9704.jpg

 

 

짙은 고동색의 나무 기둥인데, 그 안은 텅―비어 새카만 밤이 들어 있다. 알맹이 없이 공허하다는 말이 아니라, 소리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그에게 있다. 아, 나는 저 나무 쪽으로 몸을 기울여 한쪽 귀를 가까이 대는 상상을 했다.

 

 

 

에네스쿠, 콘서트 피스



IMG_9817.jpg

비올리스트 티모시 리다우트

 

 

비올라가 크니까―내가 기억하는 몸집보다―한 발짝 먼저 다가온 상태에서 시작할 줄 알았는데, 되레 연주자가 딱 서 있는 자리에서 반 보 정도 뒤로 아주 작게 물러났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던 움직임이 기억난다. 거의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살짝.


나는 비올라가 말을 시작하면 그 소리가 흐르는 길을 흥미롭게 따라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보다 한 발짝 더 가까운 곳에서, 활이 한 번에 그어내는 획(劃)을 먼저 느꼈다. 

 

한 번에 그어나가는 저 선이 내가 왜 이 소리를 듣고 있는지 정확한 이유를 가져다 놓을 수는 없지만, ‘내가 이 소리를 부정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있게 만드는 오묘한 기운을 지닌 사운드가 앤티크한 결로 펼쳐졌다.


그래, 이 곡의 제목이 ‘콘서트 피스’이고 탄생 배경에도 ‘경연’이 있으니, 비올리스트가 굉장히 솔리스트다운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화려함과 흥미진진함이 주요한 단어가 되어, 저 비올라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이 여정을 함께하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상상했던 것보다 그들이 서 있는 무대의 입체감에 집중하게 되더라.


깨끗이 단장한 채 놓인 피아노 한 대, 길쭉하게 올라온 보면대, 편안히 노래하다 가시라는 듯 넓고 둥근 빛을 내는 조명, 그리고 옅은 올리브색 정장과 브라운색 구두를 신고 비올라를 든 한 사람. 나는 그와 까만 피아노의 몸 바깥선을 가만히 눈으로 따랐다. 포스터 속에서, 그리고 연주 영상 속에서 그저 어떤 이름을 가진 ‘캐릭터’로만 만났던 그들이 내 앞에 선명히 자리한다.


아, 그가 너무도 잘 보이니 첫 곡부터 ‘내가 축제에 와버렸구나’ 하는 사실을 제대로 체감했다. 흥이 살짝 올랐다.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120 제2번


  

IMG_9783.jpg

왼쪽부터 비올리스트 티모시 리다우트, 피아니스트 프랑크 뒤프레

 

 

비올라가 피아노와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는 바이올린보다 확실히 낮구나. 브람스가 노래하기 전, 그 조율 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확실히 ‘비올라’를 보러 온 게 맞다는 걸 알았다. 이 곡의 시작에서도 콘서트 피스 때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무언가를 끼얹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제 쪽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 선을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조용히 가져다 놓았다. 예쁜 금이 보드랍게 그어졌다.


왼팔을 길게 뻗은 채 현 위에 머무는 이는 정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보다 비올라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둔다. 자신이 내는 소리와 자칫 크게 번질 수 있는 감정 사이에서 정말 절제된 중재자가 되어 있다. 

 

듣는 이에게 그저 ‘음악’으로 닿도록, 나무 악기 가운데에서도 오직 비올라 곁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리를 온전히 담아갈 수 있도록, 그는 표정 변화도 거의 없이 몸의 힘을 덜어낸 채 필요한 만큼만 완급을 조절한다. 그러니 나는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


그의 사운드를 묘사하자면 뭐랄까. 짙은 고동색의 나무 기둥인데, 그 안은 텅―비어 새카만 밤이 들어 있다. 알맹이 없이 공허하다는 말이 아니라, 소리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그에게 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들고 있는 저 현악기 역시 f홀 너머로 속이 비어 있지 않은가.


아, 나는 저 나무 쪽으로 몸을 기울여 한쪽 귀를 가까이 대는 상상을 했다. 머릿속에서는 손을 귀에 가져다 댄 채 소리를 모으기까지 했다. 그가 활을 살짝 높이 들어 관객석 쪽으로 가져올 때면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선선한 바람이 내 앞자리까지 ‘웅―’ 하고 찾아든다.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은은한 스킨 향기가 슥― 자리를 잡기도 한다. 잠시 그 시원함은, 높고 불투명한 획을 올곧게 그려놓는 비올라와 고매하지만 다이내믹한 피아노가 함께 만들어내는, 습도 하나 없이 만끽할 수 있는 안개비가 되었다.

 

 

 

나흐레 솔, 쉐도우 워커스


  

IMG_9949(1).jpg

 

 

그러니까 빛과 그림자의 균형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곡이 오늘의 비올리스트를 위해 작곡되었다더라. 그렇다면 이 곡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조금 더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그런 기대를 했다.


애초부터 온화하게 태어나 모난 소리는 못하는 비올라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수 있도록, 저 나무가 원하는 만큼 바르게 걸을 수 있도록, 그 걸음의 말씨에 강한 빛을 데려다 놓는 피아노도 차갑게 한들한들―파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 관객석 가까이에 선 그는 기둥이고, 그 뒤의 피아노는 가지 위에 무수히 자라난 나뭇잎이구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가? 피아니스트의 살짝 뒤에 자리한 페이지터너의 손끝에서부터였겠다. 나그닥 나그닥. 나는 그가 손가락으로 금(琴)을 타기도 하고 맹렬하게 노래하면서도, 그 모든 기세를 손 안에 가지런히 통제하는 감람색의 소리와 인사했다.

 

 

 

블로흐,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IMG_9926.jpg

 

 

풍경이 상상 안에서 자라나 다시 누군가의 손을 거쳐 이곳까지 이어진 노래가 찾아들 때에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이국적이고 민속적인 바이브가 여기에도 있구나 싶었다.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악장이 지나갈 때마다 내가 구체적인 장소를 상상하게 되려나 싶었지만, 윤기가 쏟아지는 피아노 위로 올라오는 저 비올라의 직접음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데 가장 큰 방점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언제 또 내가 저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꽤 집중해서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별이 가까워질수록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남은 시간과 여유가 허락하는 만큼, 그가 가는 길을 충분히 구경해둬야 했다. 특정 영역 안으로 소리를 밀고 들어갈 때 드러나는 솔직한 면모와, 그 소리를 다시 가볍게 노래할 줄 아는 재주를 더 오래 보고 싶었다. 소리든 몸짓이든 모두 어깨 위에서만 말하는 듯했고, 그의 시선과 목소리가 출발하는 자리는 매우 정적이라 좋았다.


어느 곳 하나 과잉된 자리가 없다. 아프게 말하지 않아 좋다. 어떻게 해도 연약하지 않아 편안하다.


내 주변에는 높이 날아갈 수 있는 바이올린보다 첼로처럼 확실한 안정감을 주고, 내게는 몸집이 크게 느껴지는 악기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이 곡의 절반쯤을 건너왔을 때에는 그들에게 비올라는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마 당신이 현악기에서 조금 불편하게 여겨온 요소들이 한 겹씩 덜어진 채 자라난 악기가 ‘비올라’가 아닐까. 그렇게 전해볼 것 같다.


마지막 악장에 다다랐음을 그들이 ‘신명’ 나게 일러주었을 때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어지기에 이르렀다. 누울 자리를 제대로 보고 누웠다.

 

 

IMG_9694.jpg

 

 

비올라가 이렇게 따뜻하고 고귀하게 노래할 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소박하게 시작해 초록빛 추억으로 온갖 곳을 물들여 놓는 악기가 바로 ‘비올라’인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 몰랐다.

 

 

장유진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클래식이랑 서서히 친해지는 중

장유진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Review] 이까짓 것에 목이 메는 바람에 - 연극 '삼매경' [공연]
  2. 02 [PRESS] 음악원 334호 선생님, 피아노가 뭐예요? - 금호아트홀 아름다운 목요일 : 윤홍천 Piano [공연]
  3. 03 [Review] 너를, 가장 사랑함, 아야! - 메가필드뮤직페스티벌 2025 [공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