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고동색의 나무 기둥인데, 그 안은 텅―비어 새카만 밤이 들어 있다. 알맹이 없이 공허하다는 말이 아니라, 소리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그에게 있다. 아, 나는 저 나무 쪽으로 몸을 기울여 한쪽 귀를 가까이 대는 상상을 했다.
에네스쿠, 콘서트 피스
비올리스트 티모시 리다우트
비올라가 크니까―내가 기억하는 몸집보다―한 발짝 먼저 다가온 상태에서 시작할 줄 알았는데, 되레 연주자가 딱 서 있는 자리에서 반 보 정도 뒤로 아주 작게 물러났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던 움직임이 기억난다. 거의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살짝.
나는 비올라가 말을 시작하면 그 소리가 흐르는 길을 흥미롭게 따라가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보다 한 발짝 더 가까운 곳에서, 활이 한 번에 그어내는 획(劃)을 먼저 느꼈다.
한 번에 그어나가는 저 선이 내가 왜 이 소리를 듣고 있는지 정확한 이유를 가져다 놓을 수는 없지만, ‘내가 이 소리를 부정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있게 만드는 오묘한 기운을 지닌 사운드가 앤티크한 결로 펼쳐졌다.
그래, 이 곡의 제목이 ‘콘서트 피스’이고 탄생 배경에도 ‘경연’이 있으니, 비올리스트가 굉장히 솔리스트다운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화려함과 흥미진진함이 주요한 단어가 되어, 저 비올라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이 여정을 함께하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상상했던 것보다 그들이 서 있는 무대의 입체감에 집중하게 되더라.
깨끗이 단장한 채 놓인 피아노 한 대, 길쭉하게 올라온 보면대, 편안히 노래하다 가시라는 듯 넓고 둥근 빛을 내는 조명, 그리고 옅은 올리브색 정장과 브라운색 구두를 신고 비올라를 든 한 사람. 나는 그와 까만 피아노의 몸 바깥선을 가만히 눈으로 따랐다. 포스터 속에서, 그리고 연주 영상 속에서 그저 어떤 이름을 가진 ‘캐릭터’로만 만났던 그들이 내 앞에 선명히 자리한다.
아, 그가 너무도 잘 보이니 첫 곡부터 ‘내가 축제에 와버렸구나’ 하는 사실을 제대로 체감했다. 흥이 살짝 올랐다.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120 제2번
왼쪽부터 비올리스트 티모시 리다우트, 피아니스트 프랑크 뒤프레
비올라가 피아노와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는 바이올린보다 확실히 낮구나. 브람스가 노래하기 전, 그 조율 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확실히 ‘비올라’를 보러 온 게 맞다는 걸 알았다. 이 곡의 시작에서도 콘서트 피스 때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무언가를 끼얹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제 쪽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 선을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조용히 가져다 놓았다. 예쁜 금이 보드랍게 그어졌다.
왼팔을 길게 뻗은 채 현 위에 머무는 이는 정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보다 비올라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둔다. 자신이 내는 소리와 자칫 크게 번질 수 있는 감정 사이에서 정말 절제된 중재자가 되어 있다.
듣는 이에게 그저 ‘음악’으로 닿도록, 나무 악기 가운데에서도 오직 비올라 곁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리를 온전히 담아갈 수 있도록, 그는 표정 변화도 거의 없이 몸의 힘을 덜어낸 채 필요한 만큼만 완급을 조절한다. 그러니 나는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졌다.
그의 사운드를 묘사하자면 뭐랄까. 짙은 고동색의 나무 기둥인데, 그 안은 텅―비어 새카만 밤이 들어 있다. 알맹이 없이 공허하다는 말이 아니라, 소리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그에게 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들고 있는 저 현악기 역시 f홀 너머로 속이 비어 있지 않은가.
아, 나는 저 나무 쪽으로 몸을 기울여 한쪽 귀를 가까이 대는 상상을 했다. 머릿속에서는 손을 귀에 가져다 댄 채 소리를 모으기까지 했다. 그가 활을 살짝 높이 들어 관객석 쪽으로 가져올 때면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선선한 바람이 내 앞자리까지 ‘웅―’ 하고 찾아든다.
어디서 찾아왔는지 모를 은은한 스킨 향기가 슥― 자리를 잡기도 한다. 잠시 그 시원함은, 높고 불투명한 획을 올곧게 그려놓는 비올라와 고매하지만 다이내믹한 피아노가 함께 만들어내는, 습도 하나 없이 만끽할 수 있는 안개비가 되었다.
나흐레 솔, 쉐도우 워커스
그러니까 빛과 그림자의 균형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곡이 오늘의 비올리스트를 위해 작곡되었다더라. 그렇다면 이 곡에서는 그가 누구인지 조금 더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그런 기대를 했다.
애초부터 온화하게 태어나 모난 소리는 못하는 비올라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수 있도록, 저 나무가 원하는 만큼 바르게 걸을 수 있도록, 그 걸음의 말씨에 강한 빛을 데려다 놓는 피아노도 차갑게 한들한들―파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 관객석 가까이에 선 그는 기둥이고, 그 뒤의 피아노는 가지 위에 무수히 자라난 나뭇잎이구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가? 피아니스트의 살짝 뒤에 자리한 페이지터너의 손끝에서부터였겠다. 나그닥 나그닥. 나는 그가 손가락으로 금(琴)을 타기도 하고 맹렬하게 노래하면서도, 그 모든 기세를 손 안에 가지런히 통제하는 감람색의 소리와 인사했다.
블로흐,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풍경이 상상 안에서 자라나 다시 누군가의 손을 거쳐 이곳까지 이어진 노래가 찾아들 때에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이국적이고 민속적인 바이브가 여기에도 있구나 싶었다.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악장이 지나갈 때마다 내가 구체적인 장소를 상상하게 되려나 싶었지만, 윤기가 쏟아지는 피아노 위로 올라오는 저 비올라의 직접음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데 가장 큰 방점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언제 또 내가 저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꽤 집중해서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별이 가까워질수록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남은 시간과 여유가 허락하는 만큼, 그가 가는 길을 충분히 구경해둬야 했다. 특정 영역 안으로 소리를 밀고 들어갈 때 드러나는 솔직한 면모와, 그 소리를 다시 가볍게 노래할 줄 아는 재주를 더 오래 보고 싶었다. 소리든 몸짓이든 모두 어깨 위에서만 말하는 듯했고, 그의 시선과 목소리가 출발하는 자리는 매우 정적이라 좋았다.
어느 곳 하나 과잉된 자리가 없다. 아프게 말하지 않아 좋다. 어떻게 해도 연약하지 않아 편안하다.
내 주변에는 높이 날아갈 수 있는 바이올린보다 첼로처럼 확실한 안정감을 주고, 내게는 몸집이 크게 느껴지는 악기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이 곡의 절반쯤을 건너왔을 때에는 그들에게 비올라는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마 당신이 현악기에서 조금 불편하게 여겨온 요소들이 한 겹씩 덜어진 채 자라난 악기가 ‘비올라’가 아닐까. 그렇게 전해볼 것 같다.
마지막 악장에 다다랐음을 그들이 ‘신명’ 나게 일러주었을 때는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어지기에 이르렀다. 누울 자리를 제대로 보고 누웠다.
비올라가 이렇게 따뜻하고 고귀하게 노래할 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소박하게 시작해 초록빛 추억으로 온갖 곳을 물들여 놓는 악기가 바로 ‘비올라’인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