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를 아시는가? 내 질문은 클래식에 ‘클’도 모르는 사람이나, 작곡가라고는 베토벤 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 향한다. 내가 당신에게 쇼스타코비치를 소개할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특이한 사람. 요상한 매력이 있는 사람. 무성영화 화면을 상상하게 만드는 사람. 검정과 회색만 같은 사람. 노래가 이상한 사람. 그런데 그 이상함에 자꾸 끌리게 만드는 사람.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잘 그려내는 사람. 기우뚱! 좌충우돌. 요리조리. 빠르게, 그리고 외롭게. 자포자기한 ‘척’할 줄 아는 사람. 진실과 거짓이 한데 뒤엉켜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
설명이 왜 그러냐고?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그러게나 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던가. 아니, 이 경우에는 한 번 들어보는 편이 빠르겠다. 그의 곡을 들어보면 내 말의 반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곡을 듣고 있으면 이 사람이 인생을 쉽게 살다 간 사람은 아니겠다는 직감이 든다. 기우뚱하고 불친절한 세계를 그려낸 음악 안에는 창작하지 않고서는 버텨낼 수 없었을 것 같은 절박함도 남아 있다. 살아보려고 갖은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
[PRESS] 검정과 회색만 같은 사람, 기쁨보다 슬픔을 닮은 사람 –
2026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 : 이승원 & 아나스타샤 코베키나 with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공연]
뭐야, 이 사람들은 ‘그’를 되살리려고 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필시 밝은 쪽의 이야기였다. 그래, 살려내야지! 아, 1부에서 그렇게 하강하더니 2부에서는 이렇게 치켜올려 놓는 것을 보면 쇼스타코비치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검정과 흰색, 공백과 메워짐, 낙하와 상승까지.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제1번 E♭장조 Op.107
첼리스트 아나스타샤 코베키나
정말 맨발이구나. 첼로 친구를 손에 쥔 채 황토색 무대 위를 챱챱. 23일의 첼리스트는 너무 짙지 않은 군청색에 연두빛이 얹힌 옷을 입고, 팔을 훤히 드러낸 채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첼로 포디움에 놓인 까맣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털썩—내 기억상으로는—자리했다.
맨발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혈색이 돌아 빨갛게 덧그려진 발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얼핏얼핏 보였다. 거기서부터 뭔가를 눈치챘어야 했는데, 나는 자유를 되찾은 발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 그가 거의 지체하지 않고 1악장을 시작하는 것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 발 아래에는 곧바로 바닥이 있었다. 맨살과 무대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1층에서 그의 정면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곳이 혜화에 있는 ‘마룻바닥’인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첼리스트의 첫 소리와 함께 마른 낙엽 하나가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큰 뒷받침을 받기 딱 0.5초 전의 날것이 그대로 직진한다.
그렇게 듣고 있으니 여기가 콘서트홀이 아니라 소극장이었던가 싶었다.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대 사방으로 넓게 펼쳐져 있던 내 시선이 어느새 첼로와 그가 있는 한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내가 시야를 줄인 게 아니라, 저 첼리스트가 세상을 좁혀 버리고 있었다.
그를 빠짐없이 바라보다가 근래에는 느끼지 못했던 당혹감이 들었다. 빨려 들어간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달랐다. 텅 빈 공터 어딘가로, 내가 모르는 사이 조금씩 끌려 들어가고 있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 정체불명의 감각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아마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으로, 시선으로. 첼리스트가 활을 든 1악장에서는 ‘당신’이 누군지 하나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라고, 쇼스타코비치 1악장의 ‘장난기’에 웃음 짓기를 잊지 않는 쾌활하고 유쾌한 ‘광기’를 물들여 놓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연주하는 내내 시시각각 고개를 돌리고 들어 올렸다. 관객석 어딘가를 오래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는 눈동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저렇게 위태로운 춤을, 온갖 바닥을 다 쓸어 놓는 춤을 추면서도 까만 눈동자만은 비어 있다. 고정되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이 자꾸 시야를 가렸다.
아, 누군가 그를 조종하고 있다.
그러니 2악장에서, 등에 꽂혀 있던 열쇠가 빠진 채 앉아 있던 그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 빼곡히 까매져 허공을 높게 응시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액자보다 작은 창문 하나를 오래 바라보고 있는 사람. 사람? 저 인형에서 공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f홀 위와 활 아래에서 바람이 서서히 빠져나가는데도, 활은 멈출 새 없이 가로로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그럴수록 그는 계속 바닥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았다.
살갗은 찬 바닥에 그대로 붙어 있는데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장면인가? 그가 메마른 채 뒤로 물러나는데도 나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지금 그가 제 몸 안에 무엇을 들여놓은 건지, 그 정체부터 찾아야 했다.
첼리스트의 활이 긴 숨을 호명할 때, 그는 슬픈 눈 모양을 짓지도 않았고 미간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감정을 후천적으로 학습한 기계처럼 온갖 곳을 휩쓸고 다니면서도, 정작 제가 아픈 줄은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도 ‘노래하기’를 도저히 멈추질 않는다.
몸이 아파 엉엉 우는 사람보다 아예 우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을 바라볼 때처럼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속이 답답해 오히려 내가 대신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밤중에도 고장 난 채 양팔을 움직여대며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그 대신 솟구쳤다가 내려오는 까만 감정을 받아내야만 했다.
너무도 새카맣다. 어찌할 바를 몰라 감정 한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슬픔이 가득 찼다는 게 아니라, 입이 꿰매져 버린 저 첼로 대신 내가 무엇인가를 흘려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이용되었다.
연주자는 첼로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말’했다. 대화를 거는 게 아니라 거의 주문처럼 누군가의 ‘말’을 전했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실낱같은 이명을 닮은 네 소리 안에는 누가 있는가?
내가 그를 찾는 데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그 안에 있는 이는 이 곡을 가장 잘 아는 사람. 내가 생각한 바로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
나는 그날의 첼로가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협연자로 연주가를 초청한 줄 알았더니, 연극배우를 우리 앞에 데려다 놓았다. 쇼스타코비치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피눈물 흘릴 줄도 모르는 인형 하나를 데려다 놓고, 그가 눈을 감았을 때 무엇이 보였을지 보여준다. 불안을 껴안고 살아가는 인생 안으로 어떤 획의 소용돌이가 훑고 지나가는지도 읊어낸다.
나는 마지막 악장에 도달하기 전부터 아주 새카만 글자를 쓰게 되겠구나,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악장에서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몸에 남아 있는 공기는 하나도 없는데, 되돌아온 한낮 안에서는 다시 ‘일’을 해야 한다.
기교가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첼로의 딕션이 선명해지면 선명해질수록 나는 저 걸음이 시작되기 전의 밤을 더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래서 끝에 다다르고 1악장에서 들었던 익숙한 선율이 다시 돌아와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빨갛게 전원이 꺼져가는 게 다 보였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제 생명까지 다 빨아먹히는 결말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남자 단원들이 까만 정장 차림, 흰 와이셔츠, 그리고 까만 넥타이를 하고 등장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 d단조 Op.47
지휘자 이승원
그러니 나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듣기 전부터—물방울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이미 반쯤은 시니컬해져 있었다. 어딘가에 불만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무상하다’는 느낌과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에도 여전히 왜 클로징 콘서트에 ‘쇼스타코비치’를 배치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삐딱하게 남겨놓고 있었다.
1악장을 듣자마자 모르는 이들의 소리라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 '로마의 소나무'를 들으며 내가 솔로 연주자의 소리뿐 아니라 교향악단 전체의 ‘사운드’도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오늘 내 눈앞에 나타난 저 사람들은 확실히 나랑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그들은 왜 내 앞에 나타났지? 그런 생각을 하며 뭔가 살짝 물러났던 기억이 난다.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내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이었다.
투정을 살짝 부리고 난 뒤에는 그들이 아까의 첼로 한 대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눈치챘다. 바닥에 버려져 널브러진 인형이 있던 자리에, 그들은 은근한 햇살을 비추고 있었다.
뭐야, 이 사람들은 그를 되살리려고 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필시 밝은 쪽의 이야기였다. 그래, 살려내야지!
나는 지휘자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보다가도 그의 손은 무슨 모양을 하고 있으려나 싶어 시선을 옮겼다. 이승원 지휘자의 노래는 손등으로 권유되고, 손마디 바깥쪽을 따라 흐름이 이어진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몸을 다시 머리끝이 있던 자리까지 세워 올리려면 해야 할 일도, 갈 길도 산더미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굉장히 차근차근 길을 펼쳐 나가며 균형을 찾아갔다. 역행하여 바로 세우려 하나 보다.
아, 1부에서 그렇게 하강하더니 2부에서는 이렇게 치켜올려 놓는구나. 쇼스타코비치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검정과 흰색, 공백과 메워짐, 낙하와 상승까지.
왜 쇼스타코비치가 클로징 콘서트인가? 나는 그들이 ‘죽어 들어가는’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종결’을 두고 이토록 양가적인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들의 선택지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들에게서 집중을 놓칠 수 없는 이유는 저쪽에서 먼저 계속 사인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쉽게 가지 않을 것이다. 놓치지 않을 것이다.
활의 움직임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무수히 쏟아내리는 바이올린의 활. 바이올린 활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첼로의 활도 같은 방향을 향하면서 훨씬 낮게 누워 있었다. 비올라는 아예 이쪽에 등을 돌린 채 노래하기를 포기할 줄 모른다.
꼬박꼬박, 쇼스타코비치의 박음질이 멈추질 않는다. 어떤 한 지점에 집중하고 있다가 다시 무대 전체를 바라보았는데, 엥, 언제부터 현악 파트 전체가 하프 연주를 하고 있었지.
어? 언제 활을 놓은 거지? 싶었는데, 또 눈치채지 못한 사이 어느새 먼저 활을 들어 그어 나가는 군단도 생겨 있었다.
이 치열한 집중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축제라고 가볍게 여기기에는 지나칠 만큼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 있었다. 이번 국제음악제를 위해 꾸려진 오케스트라일 텐데,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한 것일까?
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떨림으로 아주 얕은 먼지 자락을 그려내던 현악이 기억난다. 지난주 목요일에 보았던 익숙한 바람도 생각났다. 분명 내가 모르는 바람이었는데, 흐르면 흐를수록 그새 더 강하게 뭉쳐졌다.
누가 그리도 이들을 하나 되게 만든 것인가? 쇼스타코비치의 사잇길마다 인간의 생기가 파동치며 돋아난다. 내려앉는 때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그릴 때에도 끝내 가려지지 않는 당신의 ‘빛’이 소리 전면에 은은히 드리워져 있다.
거의 다 살아났구나.
살아 있구나.
그리 생각했다.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그러니 4악장의 맹렬한 용사들이 강림하는 순간에도 나는 놀라서는 안 되는데, 그만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그들이 완성된 ‘사람’의 형상을 거인처럼 무대 위에 세워 놓는데, 그 씩씩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야, 오늘 뭐지? 콩쿠르였나? 싶을 정도로 그들에게 기합이 바짝 들어갔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고? 그들의 단합심과 추진력과 의지력에 나도 모르게 인간적인 귀여움을 느껴버릴 만큼, 푸릇푸릇하게 채워 올리더라.
그래, 인간이라면 이만큼 살아날 줄도 알아야지. 끝도 없이 까매지고 진지해질 법한 내 머릿속을 한순간에 환기시켜 놓는 그들의 도전적인 용기에, 나는 그만 웃음을 지었다.
이런,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 연주하는 본인이 들어도 만족스럽다고 여길 법한 소리를 낸 음악가들. 오늘의 까만 발걸음 위에 이별과 눌러앉음보다도 나아감과 맺어짐의 약속을 남길 줄 아는 사람들.
아, 그들은 이제 내게 아는 바람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귀엽고도 귀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