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은중과 상연>을 시청했다. 15회쯤의 요즘은 잘 볼 수 없는 긴 시리즈였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소모를 요구하는 드라마였다.
예고편부터 심상치 않았다. 안락사를 하러 함께 스위스에 가자고 하는 절교한 친구. 미치지 않고서야, 하는 반응이 먼저였고 그 다음은 어떤 우정이길래, 하는 마음이었다.
천상학, 그들의 첫
나는 등장인물 천상학을 그들의 처음으로 정의하고 싶다. 은중의 첫 사랑, 그리고 상연의 첫 미움. 은중과 상연의 첫 틀어짐은 상학의 존재와 상학의 죽음으로 발생한다. 은중은 이성적인 마음으로 상학을 사랑했다. 상연은 자신이 상학을 웃기지 못하고, 상학에게 거슬리거나 부정적인 존재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학은 그 둘의 감정들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과연 상학이 은중의 마음을 몰랐을까? 아마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알려준 어려운 말을 뜻은 필요없다는 듯이 마구 남발하고, 자신을 볼 때의 생기 있는 표정을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상학은 자신의 비싸고 아끼는 카메라를 은중에게 마지막으로 준 것일까. 상학은 카메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 카메라 안에는 자신의 엄마가, 상연이, 그리고 미처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M'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카메라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흥미를 가지던 은중이 그것을 소중하게 다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해맑고 좋아하는 게 그렇게 많은 은중이 그 카메라를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편, 또 다른 가설을 세워본다. 그 카메라 안에는 미처 현상하지 못한 필름이 들어있었고, 그 필름은 상학의 유서와 같았다. 그리고 그 유서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모든 것(자신의 가족)이 담겨 있었다. 아마 상학은 자신이 생에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은중이라는 통로를 통해 상연에게 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모든 일에는 의도의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상연은 자신이 은중에게 상학의 일기를 보여줘서, 상학의 일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열어 버려서 상학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상학과 상연의 엄마는 아들의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혹은 자신이 알아버린 진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그 진실이 그녀에게 너무 참혹해서). 그리고 은중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선물인 클로버를 편지에 붙여서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떨치지 못한다.
우정의 금은 의외로 쉽게, 또 의외로 버겁게 시작된다. 상연은 은중보다 자신이 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시작된 열등감을 견뎌야 했고, 은중은 그 후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린 상연과 60분의 1초 속에 영원히 갇혀 버린 첫사랑을 묻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김상학, 다시
처음 든 의문. 왜 이 인물의 이름은 김상학이어야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꽤 자주 의문을 가졌지만, 아주 명확한 답을 깨닫진 못했다. 은중과 상연을 이어주는 매개체 혹은 다리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가, 둘 사이의 '두 번째' 균열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김상학이라는 인물 때문에(즉, 별 것 아닌 사랑 때문에) 둘의 우정에 균열이 갔다는 의견에는 강한 부정을 한다.
은중이 상학을 사랑한 것도, 상연이 오래 전 상학에게 위로를 받고 그를 사랑한 것도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오롯이 그것만이 둘의 균열을 또다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쨌든 둘이 가진 우정의 균열은 은중의 부러움과 상연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 감정들은 김상학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가진 각자의 성향과 오래된 앙금(천상학과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된)에서 시작된다. 김상학은 은중과 상연이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부러움과 열등감을 비춰보게 하는 얇은 돋보기나 창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이 글의 소제목에 '다시'라는 말을 꺼냈지만, 김상학으로 인해 둘의 감정이 불붙었으나 결국 그 끝(혹은 시작)에는 천상학이 존재한다. 은중에게는 천상학과 이름이 같은 김상학, 천상학처럼 카메라를 사랑하는 김상학, 내가 준 부적 때문에 천상학이 떠났다는 말에 아니라고 말해주는 김상학. 그리고 상연에게는 천상학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김상학, 은중의 옆에 또다시 천상학처럼 나타난 김상학이 있다. 이 얽혀있는 관계 속에서 은중과 상연의 두 깊은 감정의 골은 더욱 더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왜 김상학에 대한 에피소드를 10년 이상 보여줬을까? 심지어 30대의 은중과 상연의 사이에도 김상학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의문이었지만, 계속해서 든 생각은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였다. 둘의 균열과 파국을 보여주기에 김상학만큼 적절한 인물이 또 있을까. 단지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질투 섞인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그들의 앙금과 아픔은 김상학 때문에 다시 전개되고 망가진다.
윤현숙, 덮어쓰기
윤현숙, 상연의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다. 소제목을 쓰는 것도 꽤나 어려웠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지만, 뒤로 갈 수록 내가 이 인물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말 해 그녀는 아주 공평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딸인 상연보다는 딸의 친구인 은중에게 더욱 친절했던 사람. 상연의 입장에서는 상학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사람. 상황만 놓고 봤을 때 현숙은 누구보다 차별적인 사람이지만, 은중과 상연 사이에 현숙을 함께 두면 누구보다 공평한 인물이 맞다.
현숙이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을 살펴본다. 아마 천상학의 죽음 이후일 것이다. 아들인 상학의 비밀을 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로 마음이 조금씩 또 빠르게 썩어갔을 것이다. 썩어가는 자신을 놓아버림과 동시에 상연에게 큰 사랑을 주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서서히 죽여가고 있었는데 어떻게 자신과 가장 가까운 상연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상연이 현숙에게 큰 버팀목이 되지 못했던 것, 상연이 보기에 자신이 현숙에게 믿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현숙에게 그만큼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상연이 상학의 죽음 뒤에 있는 이야기를 알아채고 나서야 현숙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게 덮어쓰여진다. 하지만 덮어쓴다고 해서 상연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현숙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글씨가 잔뜩 쓰인 종이 위에 새로운 종이를 얹는다 해도 뒤에 글씨가 조금은 비치는 것처럼 말이다. 상연은 현숙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옅어졌을까? 이해하게 되었을까? 그건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지만, 어느 시점에서 상연은 아마 현숙을 떠올렸을 것이다.
은중과 상연, 계속될 여정을 위해
은중 그리고 상연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가해자는 누구고 피해자는 누구일까. 또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일까. 이 두 질문에 정확한 답은 없다. 명확하게 누가 더 나쁘고 더 이상한지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장면에서 보면 은중이 불쌍했고, 어느 장면에서 보면 상연이 불쌍했다. 상연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에 한없이 넘어졌고, 은중은 넘어설 수 없는 상연의 벽 앞에서 여러 번 뒤돌아야 했을 것이다. 어쨌든 여러 인물이 뒤섞이고 부딪히는 과정 속에서 결국 두 사람이 상연의 삶 끝까지 함께 존재했다는 것을 보면 하나의 관계 속에서 그 누구도 우위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 아닐까.
"네가 날 받아주는 구나."라는 상연의 대사가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상연이 다시 한 번 은중에게 동행을 요청한 것, 은중이 그 요청에 끝까지 응한 것을 보며 두 사람은 언제든(상연의 죽음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있지 않더라도) 이어졌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다시 찾게 된 것, 몇 번이나 무너지고 부딪혔던 것은 사실 관계가 망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야 생각했다.
아마 은중이 쓰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나면, 상연이 말했던 것처럼 그 이야기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은중의 상상 속에서 계속해서 상연과 함께하는 날이 쌓여가지 않을까. 우정은 그 어떠한 관계보다 복잡하지만 알기 쉬운 것 같다. 그냥 하나의 관계에서 잊히는 것이 많은 것뿐인 듯하다. 둘의 우정을 너머에서 바라보던 나도 그 여정의 끝에서 둘의 관계와 비슷한 이야기를 마주하지 않을까. 은중과 상연이 삶의 끝에서 서로를 끝내 찾아낸 것처럼, 나의 여정에도 색채가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