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수 많은 종의 생명체가 존재하지만 그 중 가장 오만한 존재는 바로 인간일 것이다. 인간들은 세상의 이치를 그들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도덕이나 의무라는 것조차 자신들의 이익이나 평온함을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자기중심적인 종은 세계 또한 스스로의 시선으로 해석한다. 내가 찾으면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떠나면 끝나는 것이고, 내가 혼자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고, 내가 슬프면 세계도 함께 슬퍼야 한다. 참으로 오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오만함이 항상 인간을 의기양양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생각은 삶을 무겁게 만들고는 한다. 시선이 닿는 모든 순간에 한 없이 무거운 ‘의미’라는 추가 달린다.
그러나 아래에 소개하는 한시들은 이 기대를 배반한다. 그것들은 인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연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없는 곳에서도 자연은 계속된다. 봄은 내가 찾지 않아도 찾아오고 비는 나와 상관없이 내렸다 그친다. 인간은 그 속에서 무력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무력함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지 만은 않는다. 한시는 자연의 무심함으로 인간을 비웃고 절망 시키는 대신,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무거운 추를 잠시나마 풀어준다.
총 여섯 편의 한시를 소개한다. 읽을 때마다 자유로움을 넘어 나 스스로 봄의 새 지저귐이, 여름의 때 아닌 폭우가, 고요한 숲이, 그리고 장엄한 산이 되고 싶게 만드는 시들이다.
1. 작자 미상(비구니의 작품으로 전함), 「悟道詩(오도시)」
盡日尋春不見春 (진일심춘불견춘)
芒鞋踏遍隴頭雲 (망혜답편롱두운)
歸來笑拈梅花嗅 (귀래소념매화후)
春在枝頭已十分 (춘재지두이십분)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지만 봄을 보지 못했고,
짚신을 신고 구름 낀 산등성이를 두루 밟고 다녔다.
돌아와 웃으며 매화꽃을 집어 향기를 맡아 보니,
봄은 이미 가지 끝에 한껏 무르익어 있었다.
여러 설이 있지만 무진장 비구니의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한시이다. 나대경의 <학림옥로>에서 인용된 시로, 해당 시 앞의 맥락은 이렇다고 한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도는 가까이에 있는데 사람들이 먼 곳에서 찾는다’. 진리는 내가 알지 못하는 먼 곳에 있으리라 믿는 이들은 평생을 헤매고 다니지만 실은 집 안의 매화꽃이라는 시시한 것에도 깃들어 있다. 깨달음은 스스로의 안에 있다는 불교적 비유와 더불어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시선에 매몰되어 있는지 깨닫게 만드는 시이다.
2. 蘇軾(소식) ,「定風波·莫聽穿林打葉聲(정풍파·막청천림타엽성)」
三月七日,沙湖道中遇雨,雨具先去,同行皆狼狽,余獨不覺。已而遂晴,故作此
(삼월칠일, 사호도중우우, 우구선거, 동행개낭패, 여독불각. 이이수청, 고작차)
莫聽穿林打葉聲,何妨吟嘯且徐行
(막청천림타엽성, 하방음소차서행)
竹杖芒鞋輕勝馬,誰怕?一蓑煙雨任平生
(죽장망혜경승마, 수파? 일사연우임평생)
料峭春風吹酒醒,微冷,山頭斜照卻相迎
(료초춘풍취주성, 미랭, 산두사조각상영)
回首向來蕭瑟處,歸去,也無風雨也無晴
(회수향래소슬처, 귀거, 야무풍우야무청)
3월 7일, 사호로 가는 길에 비를 만났다. 비옷을 든 사람은 먼저 가 버렸고 일행은 모두 낭패를 보았지만, 나만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얼마 지나 비가 그쳐 이 글을 지었다.
숲을 뚫고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게나. 휘파람을 불며 천천히 걸어가면 그만 아닌가.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은 말을 타는 것보다 가볍다. 무엇이 두려운가? 도롱이를 걸치고 비와 안개 속에서 평생을 살아도 좋다.
싸늘한 봄바람이 술기운을 깨우니 조금 춥지만, 산 위의 기울어진 햇빛이 오히려 나를 맞아 준다.조금 전 비바람이 몰아치던 곳을 돌아보며 돌아가니, 이제는 비도 없고 맑음도 없다.
소식이 이 시를 쓸 때 그는 황주로 유배된 상태였다고 한다. 비바람에도 개의치 않고 걷는 태도를 통해 현실의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정신적 자유와 올곧은 태도를 지키려는 것을 표현한 듯 하다. 일행들은 모두 비를 방해물로 여겼지만 소식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비도 맑음도 없다는 마지막 구절은 단순히 비가 그쳤다는 표현이 아닌, 세상의 흐름이 본디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인 이의 심정이다. 비는 인간의 사정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비가 아닌 그럼에도 걷는 태도이다.
3. 王維(왕천), 「辛夷塢(신이오)」
木末芙蓉花 (목말부용화)
山中發紅萼 (산중발홍악)
澗戶寂無人 (간호적무인)
紛紛開且落 (분분개차락)
나뭇가지 끝의 부용 꽃이
산속에서 붉은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골짜기의 집은 고요하고 아무도 없는데,
꽃들은 어지럽게 피고 또 진다.
단순하게 읽자면 봄의 정경을 묘사한 서정적인 분위기의 시로 해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두 줄의 고요함과 개화의 대조가 핵심적이다. 이미 사람의 흔적이 없는 적막한 골짜기에도 꽃이 피고 진다. 이 시에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감탄하는 ‘나’가 없다. 꽃은 인간의 감정을 위해 피지 않는다. 관객이 없어도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고, 또 존재한다. 인간 없이도 자연은 스스로 생성되고 소멸하는 고요한 경지를 지니고 있다.
4. 李白(이백), 「獨坐敬亭山(독좌경정산)」
眾鳥高飛盡 (중조고비진)
孤雲獨去閒 (고운독거한)
相看兩不厭 (상간양불염)
只有敬亭山 (자유경정산)
모든 새들은 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하나만 홀로 한가롭게 떠나간다.
서로 바라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것은,
오직 나와 경정산뿐이다.
세상 모든 것이 싫증나도 지겨워지지 않는 것은 작가와 경정산 뿐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백이 경정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서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왕천의 신이오에서 자연은 인간과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한다. 그것이 인간과 자연은 단절되어 있다는 뜻일까. 독좌경정산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단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연을 소유하고, 통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저 같은 곳에 함께 존재하는 관계는 가능하다.
5. 杜甫(두보), 「春望(춘망)」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련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갱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는 무너졌지만 산과 강은 그대로 있고,
도성에 봄이 왔지만 풀과 나무만 무성하다.
시대를 슬퍼하니 꽃을 보아도 눈물이 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소리에도 마음이 놀란다.
전쟁의 봉화는 석 달째 이어지고,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만큼 귀하다.
흰 머리를 긁을수록 더 빠지고 짧아져,
이제는 비녀조차 꽂기 어려울 지경이다.
봄은 생명의 상징이다. 새로이 태어나고 돋아나는 봄의 존재들은 늘 찬미의 대상이다. 그러나 나라가 무너져도,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봄은 온다. 본디 봄은 즐거움을 주는 존재였는데, 지금의 봄은 오히려 눈물을 흐르게 만든다. 인간의 사정과 관계 없이 흐르는 자연의 순환은 평소와 다르게 이 비극을 더 뚜렷하게 만든다. 자연의 무심함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시처럼 잔인하기도 하다.
6. 王維(왕유), 「鹿柴(녹채)」
空山不見人 (공산불견인)
但聞人語響 (단문인어향)
返景入深林 (반경입심림)
復照青苔上 (부조청태상)
텅 빈 산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다만 사람의 말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들린다.
저무는 햇빛이 깊은 숲 속으로 들어와,
다시 푸른 이끼 위를 비춘다.
이 시는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람은 없는데, 말소리는 들린다. 깊은 숲 속인데, 햇빛이 비춘다. 이런 반대되는 풍경을 통해 자연의 고요함과 적막함이 더욱 드러난다. 그러나 과연 이 풍경이 정말 적막한 것일까? 텅 비었다고 여긴 산은 정말 텅 비어 있을까? 우리들은 이 산과 숲이 적막하다 여겼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푸른 이끼가 존재한다. 인간이 떠난 뒤에도 공간은 비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