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렵다'였다.
책을 덮은 뒤 왜 그렇게 느꼈을까 곱씹어 보았다. 아마도 현실에서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 같은 인물을 쉽게 마주할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소설 속 인물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고, 때로는 납득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작품을 읽을수록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정유정은 인물을 단순한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오히려 독자가 인물의 시선을 따라 사건을 바라보고, 그 감정을 함께 겪으며, 왜 그런 선택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정유정 소설의 가장 큰 특징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독자가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모든 사건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게 되고, 악인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종의 기원
이야기는 주인공 유진이 피투성이가 된 채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기억을 잃은 채 지난밤을 되짚어 가는 과정 속에서 독자는 사건의 진실뿐 아니라, 유진이라는 인물의 내면까지 함께 따라가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유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유진은 단순한 '악인'으로 치부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한 인간으로 다가온다. 독자는 그의 내면과 생각을 따라가며 유진의 행동보다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생의 1/3을 몽상하는 데 쓰고, 꿈을 꿀 때에는 깨어 있을 때 감춰두었던 전혀 다른 삶을 살며, 마음의 극장에서는 헛되고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온갖 소망이 실현된다.”
나는 누구와도, 무엇과도 맞서 싸우지 않는 부류였다. 뒷담에서 홀로 칼을 벼르는 놈이었다.
p.273
이 문장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드러내지 않은 욕망과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의 기원』은 악을 특별한 존재의 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본성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분신 유진이 미미하나마 어떤 역할을 해주리라 믿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유진의 행동보다 그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작가는 그 과정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독자가 '악' 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7년의 밤
『7년의 밤』은 한순간의 실수로 시작된 비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현재의 서원이 7년 전 사건을 담은 글을 읽어 내려가며 그날 밤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독자는 사건의 전말과 인물들의 선택을 함께 따라가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쉽게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현수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고, 오영제 역시 아내와 딸에게 폭력을 일삼던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가해자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피해자이지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 경계는 점점 흐려진다.
작가는 어느 한 사람만을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각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선택 끝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제 안에 있는 걸 누가 만들었는데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밟은 사람이 누군데요. 아버지예요. 자신을 죽이고, 누군가를 죽이고, 스스로 괴물이 된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고요.”
“그래서였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쓸고 갔다.
아저씨가 말했다.
“그래서…… 넌 아니기를 바란 거야.”
p.513
이 문장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것은 악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현수의 선택은 서원의 삶까지 뒤흔들었고, 서원은 그 삶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감당해야 했다. 『7년의 밤』은 죄보다도 그 죄가 남긴 흔적을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 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 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이기도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작가의 말을 읽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그러나'라는 단어였다. 그 한마디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처럼 느껴졌다. 결국 『7년의 밤』은 한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완전한 행복
『완전한 행복』은 행복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한 여자를 통해,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시작되는 악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행복을 완벽하게 지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통제하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해 나간다. 특별한 악인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공감할 법한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차 타인을 파괴하는 욕망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 낸다.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 넘어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 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p.113
이 문장은 『완전한 행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을 더해 가는 과정이라고 믿지만, 주인공은 행복을 위해 불행의 가능성을 하나씩 지워 나간다. 문제는 그 '불행'이 결국 사람까지 포함된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행복이 타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순간, 행복은 더 이상 행복으로 남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다만 늘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와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함께 있다는 것을.
"행복에도 책임이 있다" 『완전한 행복』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살아가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에게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는 악을 특별한 존재에게서 찾지 않는다. 가장 평범한 욕망이 어떻게 일상의 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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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작품 속 악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종의 기원』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악을, 『7년의 밤』은 한 사람의 선택이 남긴 악의 흔적을, 『완전한 행복』은 행복이라는 욕망 속에서 태어나는 악을 다룬다.
이 글에서 말하는 ‘악’은 특정 인물을 규정하는 단어가 아니다. 악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어두운 본성, 한 사람의 선택이 남긴 흔적, 그리고 욕망이 변질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악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