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이었다. 여전히 퇴근길 4호선 안은 서로의 체온을 오롯이 나눠볼 정도로 밀접했고 알갱이도 실한 물결인듯 우리, 인파에 휩쓸려 혜화로 쏟기듯 토해지다. 그때 내 얼굴엔 표정이 말끔히 비어 있었다. 그저 뒷사람이 앞사람을 밀고 밀고 또 밀리어 개찰구로 토해지기 전까지 나는 아무런 의지도 생각도 없어, 그건 뒷물이 앞물을 그저 따르는듯이 하나의 물결처럼 이어져 흐르기에 거기 내 생각도 의지도 고로 감정마저 딱히 무용한 까닭이다. 하여 으레들 비유하듯 인파란 하나의 파고를 이루는 물결이라 나는 거기 물방울이라면, 가끔은 이렇듯 별다른 의지도 감상도 없이 휩쓸려 매달려 가는 것도 일정 평안함을 주는 때가 있다. 떠밀리듯 밀리어 밀리어 가는 것이 가끔은 좋은 듯하다.
그다지 흥이 나지 않는 요즘이다. 나는 마찬가지 삶에 떠밀리듯 앞으로, 속절 없이 가고 있나. 흥의 빈자리, 거기 딱히 별다른 이유가 없기에 딱히 별다른 생각도 들지 아니한다. 삶에 신명이 나려면 신명 날 일이 먼저 있어야 할 터, 허나 삶이 초콜릿 박스가 아닌 한 우리 일정 애써야 함이 자연하고, 있지 않은 흥을 부러 도모하는 것이란 오직 스스로 좋을 일이라지만 그걸 매일 같이 유지하는 것도 당치 않을 일이지 싶다. 그저 되는대로 두어야 할 때가 있지 싶다. 어쩌면 스스로 흥을 돋우어보는 일마저도 그때그때 되는 날과 되지 않는 날이 있어, 그것까지가 마음의 자연스러운 일인가 한다. 하지만 마로니에 공원을 지날 때쯤 입가에 선연히 미소가 베었다. 억지 찢어본들 한사코 움직이지 않으려던 양 입가는 땅속 깊이 뿌리 내린 완고함이라든지 힘센 소거죽처럼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5월 밤바람에 스치우자 슬그머니 거짓처럼 허풍처럼 풀려 나는 것이 정녕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오롯이 좋았다. 거기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르코 예술극장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소중히 아끼는 까닭은 그것이 마로니에 공원 안에 품기어 있는 까닭에 물론이나, 거기 오른 연극이 하나같이 좋았던 기억 탓이 더 크다. 몸소 관극한 것에 한하여서는 장충동 국립극장에도, 명동 국립극단에도, 혜화의 아르코에도 기억 속엔 하나같이 좋은 것들뿐, 말하자면 찬사를 위해 애쓸 하등 필요가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감탄. 역시 연극예술에 한 축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운영하느니만큼 모르긴 몰라도 각본이며 연출이며 우아했고 연기는 말할 것 없겠다. 그래 우아했다, 즉 깊이 아름다운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 요즈음 그런 것들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나는. 힘들이지 않고 슬며시 풀리던 입가의 미소처럼, 깊이 잠긴 외투를 벗기는 햇살처럼, 부러 힘주어 되지 않는 것들엔 더 큰 힘이 아니라 정확히 맞갖은 것들이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것, 연극이건 문학이건 사람이건 간에 그런 것을 고대한다. 그 앞에 내 미소가 그처럼 자연스럽고 아름다울 것이다.
*
리뷰를 시작하려 하니 요약부터 해야겠는데, 어째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연극 너울을 단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사랑 이야기’라 불러도 거기 틀린 것이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분함도 아니이다. 한 줄로 잘 요약될 수 있는 것은 대개 단적인 것들이고, 이 연극 안에 아름다움이 있었던 한편 그건 동성애라는 소재에 완전하게는 결부되어 있지 않다. 예컨대 배경 서사와 주요 갈등에 내재된 사건들은 주인공이 동성애자로서 겪은 것들이나, 이는 이성애자의 그것으로도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었다. 이 표현에 벌써 많은 반발이 예상되지만, 거기 전제될 법한 것들과 내 의도는 바히 다른 것이다.
여전히 그것이 퀴어한 것이 아니라 해서 다른 것으로, 그러니까 주류로 대체되어도 무방하지 않으냐 하는 쓸모 적은 말을 하려 함이 아니이다. 그런 식으로 따져 들자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캐릭터의 유형이란 몇 되지 않아 마땅하다. 연극이 먼저 ‘이것은 동성애 특수 서사이다’라고 힘주어 말하지 않는 고로 이건 그저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 안에 무수히 많은 군상이 있으며, 그 군상 안에 동성애가 분명한 하나의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극의 서사와 주제는 동성애의 영역에서만 도출할 수 있는 어떤 특수한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것이고, 그래서 이 극의 서사는 이성애자인 내게도 정확히 공감되는 것이다. 그래 그것은 군상의 하나이자 부분이고 필연적인 것이라면, 내가 동성애라는 소재를 다루는 어느 때마다 이리 신중히 구는 것마저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는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중함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것은 아름다웠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단 말이다, 그게 말하고픈 전부.
여기 세 명의 매력적인 여인이 등장한다. 결혼을 준비하는 벨과 애니 커플 앞에 플로가 나타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됐다. 멋진 숏컷과 구릿빛 피부, 시원시원한 치열에 걸맞은 함박웃음, 능청스러움과 도무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자존감, 플로는 해변을 그슬리는 태양처럼 집요하게도 매력적이다. 오직 서핑을 위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간, 오랜 친구 애니의 결혼 소식을 따라 막 도착한 참이다. 커다란 더플백을 들쳐 맨 그녀는 집시를 연상케 하고, 어느 여성 전용 서핑 브랜드의 이름을 빌려 그녀를 ‘솔트 집시’라고 부르고 싶어지다. 언제든지 오고, 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 그럼에도 끝내 매력적인 사람. 성애나 취향에 무관히 그녀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끝내 호기심에 빠뜨린다. 무대를 수월히 뛰어넘는 그녀의 마성, 그녀는 정말이지 멋졌다.
반면 벨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흰색 티셔츠에 핏한 청바지를 입은 그녀, 긴 머리카락에 구불거리는 웨이브가 나풀거리는 그녀, 꼭 그 머리카락처럼 흐늘거리고 나풀거리는 그녀의 몸짓이 눈에 띈다. 더 좋은 비유가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변변찮아, 첫눈에 떠오른 인상 그대로 말하는 수밖에, 그녀는 토끼 같았다. 그 비유가 전형적인 만큼 그녀의 사랑스러움도 그러했다. 뒷짐을 지고 몸을 배배 꼬는 그녀에게서 상냥하면서도, 한켠 파멸적인 사랑의 전조를 읽는다. 어디까지나 내 기억 속, 지극히 개인적인 캐릭터 작법 전형에 의하면, 그녀는 의도치 않게 커다란 사랑과 소유욕을 끌어내 어느샌가 파국의 한 가운데에 놓이곤 하기 때문이다.
벨의 피앙세이자, 플로의 오랜 친구인 앤의 머리카락은 보이쉬한 중단발이다. 보고 있을 땐 다 몰랐지만, 헤어 스타일이 캐릭터 성격을 상징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생각한다. 숏컷과 중단발과 긴 머리를 한 세 여인. 친구와 연인을 넘나드는, 사랑과 우정이 같은 선상에서 너울처럼 파동처럼 진동하는 관계. 연극의 시작과 끝 장면, 과거의 세 사람과 현재의 세 사람이 서로를 마주해 좌우로 흔들거리며 교차해, 일렁이는 파도를 그려내던 것은 애처로운 긴밀함과 위태로운 가변성이 공존하는 이 관계 사이에 자리해 있던 긴장감을 그려낸다.
앤과 벨의 결혼을 앞두고, 큰 바다 너울처럼 물씬 다가온 플로. 그녀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과 마성, 그리고 자기애에 충천하는 사람 특유의 굽힐 줄을 모르는 기세와 뻔뻔함마저 모조리 안고 그들에게 당도했다. 그녀는 편안한 종류의 인간, 그늘과 진자리 같은 종류로는 아득히 멀어, 마치 여름볕이 흥분과 고양감에 더불어 고통을 더부는듯이 그렇게 강렬하였다. 그리고 그 볕이 사람과 사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내리 쏘이듯, 또 파도가 스스로 죽어질 모래사장, 그 치마폭에 엎지르는 때까진 멈출 줄을 모른 채 줄곧 밀려오는 듯이, 그리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듯이 그녀가 왔다. 우리는 뻔뻔함 자체로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뻔뻔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사람은 해와 바다처럼 우릴 흠뻑 적셔, 해를 얼마나 거듭하든 언제까지고 생각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 너울로 해일로 왔고 나는 떠나간 자리에 놓인 기다림이 버거워 그녀를 끊어 내버렸다만, 이따금은 기쁜 옛적을 생각하듯이 뭉근하게 그녀를 추억하였다. 아마 앤도 그러했을 것이다. 소리도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가 마치 어제 헤어진 것처럼 다시 돌아오고, 그런 그녀가 미우면서도 실은 그리웠을 것이다. 하지만 너울처럼 쉬이 왔다가, 썰물처럼 쉬이 가는 것마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앤은 벨에게 청혼할 적에, ‘널 보면 가슴이 울렁거려’라고 말할 것을 ‘너울거려’하고 잘못 말했더랬다. 그리고 우리가 그 전후 풍경을 다 보지 못했을지언정 청혼이 으레 그렇듯 결과쯤은 다 정해진 판국이었겠으나, 그 어수룩한 실수가 벨은 그렇게 좋았더랬다. 이렇듯 벨은 앤의 가슴에 너울졌고, 그러나 마찬가지 플로가 앤의 마음속으로 꼭 그처럼 다가서 버렸더랬다. 그렇게 앤은 파혼을 결심한다. 파도의 거친 등줄을 타고 서핑하듯 미끄러져 들어오는 감정, 가슴으로 밀듯 차오르는 너울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 번 막은들 다음날 다시 일고, 한 번을 돌려보낸들 되돌아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애초 끝이 없는 파도이기 때문. 그때 마음에 파란이 인다는 것이란.
벨은 가슴으로 밀려 들어와, 다시 그로부터 잔향처럼 되돌아 퍼지는 플로에게 저항 없이 온 마음을 던졌다. 흔한 비유론 사고처럼 날아든 그 사랑에 양심이고, 망설임이고 다 던져버렸다는 말이다. 그녀는 가슴에 미리 들어와 살던 앤을 바깥으로 힘껏 밀친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과 달리, 대개 우리 사랑엔 자리가 하나뿐이라 새로이 들어온 것이 미리 살던 것을 밀치게 되는 것은 비참할지언정, 사랑을 선별할 수 없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부디 그런 사고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않나. 내 마음 호수이되 너는 노저을 배 아니라, 새 사랑은 너울처럼 오지 않기를.
하지만 더 성숙하게 이별했더라면 벨에게도 좋았을 터. 어려움일지언정 점잖게, 갑작스런 이별의 충격을 네게 주노라 참담히, 그러나 암초처럼 완고하게 버티어 서 내 마음 되돌릴 수도, 무를 수도 없노라 말할 수 있었더라면. 허나 그와는 정반대로 ‘실은 네 가족도, 우리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주변 시선도 모두 버거워 실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노라고, 숨도 쉴 수 없었다’고 그녀 잔뜩 표독으로 말하고, 저 흰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하객들의 시선이 두렵다며 줄곧 스몰웨딩을 주장해온 너라지만, 그게 어제까지 사랑하던 나를 오늘 갑자기 끔찍한 것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결혼 날짜가 정해진 선고일처럼 다가오고 있었으니 파혼의 부담감은 더욱 컸겠고, 바로 그 부담이 온몸에 잔뜩 힘을 주게 만드는 것일 테지만 여태껏 단 한 번도, 날 보는 그 예쁜 얼굴을 이처럼 찡그린 적 없었잖아. 이제와 그것을 토로케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잖아. 앤은 혼란 속에 그녀를 붙잡으려 다가오고, 벨은 거부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을 마주한 양 비명을 지르다, 발작을 일으켜 과호흡에 빠진 뒤 기절한다. 그녀는 비겁하고 나약하다, 혹은 나약해서 비겁하다, 그리고, 아니, 그런데도 사랑스럽다. 거기 이유가 있을 리가.
*
여기까지가 전개 및 위기부이고, 이제 절정으로 힘껏 나아가고 싶었으나 오늘 리뷰는 스포 방지이므로 여기까지만 한다. 극장을 나서며 스태프들로부터 작은 쪽지를 받았다. 그 안에는 ‘스포 금지’라는 취지가 상냥한 부탁의 말로 쓰여있었다. 분명 이것을 써내면 이 글도 더 짜임새 있을 테고 내 마음 홀가분할 테지만, 그래서야 이 극이 애써 마련한 절정과 반전이 힘을 잃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이 글을 읽고 공연장에 들어선 이들의 카타르시스마저 파도에 이미 깎여나가 있을 터이다. 그러니 이쯤 하고 마무리하되, 적어도 이 정도 암시쯤은 괜찮을 것 같다.
“나이가 든 이후에는 관계와 돌봄의 윤리를 중심으로
사랑이 어떻게 삶의 책임과 지속의 문제로 확장되는지 보여준다.”
극장을 나서자마자 잔뜩 고양된 가슴 한 켠에 떠오른 이 극의 시놉시스, 이상의 문장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밀쳐냈다. 하하하하, 그럴 리가! 이 사람들 스포 방지에 열심이구만, 하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윤리라는 딱딱한 말로는 조금도 설명할 수 없고, 책임이라는 무게감으로는 온당히 가리킬 수 없음에 확신한다. 두 눈이 담아낸 것은 이성이나 품성 따위 딱딱한 그 무엇이기는커녕 그 정반대의 것, 사랑의 증명과 완성을 나는 보았고 그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