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사랑할 권리를 달라
사랑은 자유로운 마음이고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자유가 항상 당연한 것은 아니다.
여기 한 커플이 있다. 바닷가 마을에 사는 50대 레즈비언 커플이다. 플로는 질병 후유증을 앓는 벨을 열심히 돌본다. 둘은 아름다운 한 쌍이다. 그들의 삶은 아주 자연스러운 파트너십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함께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퀴어의 삶은 그렇다. 파트너를 만나 함께하는 전 과정에서 일반 헤테로 커플이 가지는 어려움과는 다른 양상의 어려움을 가진다. 정체화, 커밍아웃, 커뮤니티를 찾는 것 등. 그 과정에서, 퀴어는 때로는 원가족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거나 자신이 사랑하는 커뮤니티에서 쫓겨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퀴어 커뮤니티를 찾으면 좀 나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작중 ‘플로’와 ‘아나이스’가 이야기하듯, 때로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퀴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까워지고 묶이기도 한다. 하나도 맞지 않는 두 사람이 하나로 묶일 수 있다. 그러므로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의 관계는 다른 커뮤니티의 그것보다 특수해진다.
파트너를 찾으면 좀 나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파트너를 찾고 난 이후에도 순탄치 않다. 퀴어 커플의 문법은 헤테로 커플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정상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최대한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는 개인이 있을 수 있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지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제도적 보장도, 사회적 통념도 없는 황무지 위에서 이들이 서로를 붙잡고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은 무엇일까. 결국 퀴어 커플의, 퀴어 커뮤니티의 삶을 증명하는 것은 사랑이다. 온갖 부딪힘과 다름 속에서도 끝내 서로를 놓지 않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외로운 통과의례를 견디게 한다.
법과 제도가 허락하지 않은 관계를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존재를 건 투쟁이다.
기꺼이 책임지고 싶은 것
언젠가 SNS에서 돌봄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진정한 돌봄은 외주를 줄 수 없다’라는 골자의 이야기였다.
자본으로 요양보호사를 고용하고 시스템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영혼을 위로하고 삶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돌봄은 결국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일 것이다. 원래 사랑과 돌봄이란 게 그렇다. 그것은 대상의 존재 자체를 온전히 책임지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의 돌봄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사랑한다면 마땅히 돌보아야 한다는 당위는, 때로 그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나의 시간과 체력, 심지어는 나 자신의 삶마저 지워가며 타인을 돌보아야 할 때, 밀려오는 피로감과 고립감은 사랑이라는 숭고한 단어 뒤에 숨은 잔인한 무게다. ‘플로’가 벨을 돌보며 마주했을 지난한 일상들 역시 매 순간이 헌신인 동시에 소리 없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끌어안게 한다. 폭력적일 만큼 무겁고 나를 갉아먹는 순간이 오더라도, 내가 선택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그 짐을 강요된 의무가 아닌 기꺼운 선택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상대를 받아내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 그 거친 너울을 함께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무겁고도 아름다운 권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