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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찰 없이 도래한 미래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미래가 바둑계에 먼저 왔다.
장강명 작가가 알파고 파장 이후 바둑계의 변화에 대해 꼼꼼하게 정리하고 문학예술의 미래와 연결 지은 성찰을 담은 책 <먼저 온 미래>는 서늘한 그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알파고를 넘어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큰’ 통찰이 담긴 이 책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 했던 변화를 수긍하게 해주었다. 생각에 도움이 되는 책은 흔하지만, 생각을, 생각하는 방향을 바꾼 책은 처음인 것 같다. 인생책이라는 말을 믿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나의 관점을 바꿔줬다고 해도 무방한 책이다.
그는 우리의 기대-‘인공지능이 여기는 절대 침범할 수 없어’-를 잔인한 질문 세례로 하나하나 낙담시킨다. 그런 방식으로 닿게 되는 각 장의 결론과 내가 어렴풋하게 감각했던 시대의 어두운 일면들이 애초에 하나인 것처럼 엮여서 머릿속에서 급격하게 팽창할 때가 잦았기 때문에 나는 자주 읽는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이미 받아들여 이 책을 썼듯이 나도 천천히 그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 변화란 인간은 참 애매한 존재이며 애매함 속에 군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의 대국으로 우리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낼 때 귀엽다고 반응하는 어른들처럼, 절로 가서 더 자라고 와, 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단 걸 알게 되었다. 그 후 인공지능은 현실을 잡아먹고 일상이 되어 모든 사람이 얘기하는 주제로 등극했다(윤리보단 효율, 돈 얘기로 가는 게 역겨울 때가 꽤 있다). 하지만 너무, 너무 가 버렸다. 현실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없음이. 우린 이미 와버린 것들에 잠시 어리둥절해할 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받아들이고 시류에 따랐다. 그 미래가 어떤 이유로 왔고, ‘진짜 미래’를 어떻게 바꿨는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전망을 어둡게 보는 사람이 많긴 했지만, 음모론에 매혹되듯이 그 어둠 자체에 매료된 듯 보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어쩌면 아직 정면 타격을 받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서인 거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나의 경우 알파고 이후 바둑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조망한 글이나 뉴스를 본 적이 없기도 했다(인공지능이나 바둑계에 내 관심이 부족했던 것도 맞는 말이다). 마치 판이 끝났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거기서 떠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매정하게 말하자면 바둑계는 인공지능 이슈를 위해 희생양으로 동원되어, 그 이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곧바로 버려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세돌 기사의 은퇴 소식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그 뒤가 어떻게 전개될지 감을 주지 않아서 호기심에 뒷장을 넘기게 한다(바둑계의 이후를 조금이라도 살피지 않은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바둑계의 균열
머리말에 가까운 1장 <먼저 온 미래>는 바둑계가 인공지능한테 당했던 일을 잠시 이야기하며 이와 비슷한 일이 문학예술에 일어난다면 어떨까, 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책의 방향성을 알려준다.
2장 <오만과 편견, 그리고 창의성>은 인공지능이 바둑계에 가한 정밀 타격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세돌의 대국이 있었던 나날을 회고하는 바둑기사들의 대화를 보고 있으면 정말 ‘망했다’라는 느낌이 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만과 편견을 깨닫고 인공지능의 바둑이 창의적이라는 의견까지 내놓기도 했다(그러면서 창의성이 도대체 뭐냐는 질문도 등장한다).
3장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는 바둑계의 인공지능 도입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진다. 인간이 두는 바둑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럼에도 존재하던 인간적인 바둑의 낭만성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이유로 알파고 이후 바둑계를 떠난 사람도, 그런 이유로 이 바둑계에서 버티기로 결심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인공지능은 그 누구도 측정하지 못한 ‘이길 확률’을 제시했고, 그러면서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새로운 권위로 자리 잡았다. 이제 바둑기사들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전문가 VS 다른 인공지능을 다른 방법으로 활용하는 다른 많은 전문가 VS 인공지능을 활용하지 않는 구세대 전문가(p.105)’로 나뉘어 인공지능의 바둑을 이해하는 데에 혹은 인간만의 바둑을 모색하는 데에 온 신경을 기울인다. 그래야만-승부나 정신적인 차원에서-이길 수가 있으니까.
권위를 무너뜨리는 기술의 발전
4장 <평평함과 공평함>은 인공지능의 권위가 대두되며 과거 인간 권위자들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준다. 이 현상이 마냥 부정적으로 비치지 않는 건 노력형 프로 바둑기사들이 천재들에게 느꼈던 심리적 위축을 덜고 바둑을 공부하고 또 둘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익명의 속에서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진 것처럼. 물론 부작용도 많다. 그리고 딴 얘기지만 신진서 9단처럼 인공지능 바둑을 열심히 연구하는 노력형 천재도 있다). 나는 이게 맞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권위는 지속될수록 세습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부조리를 낳기 마련이다. 그렇게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다. 변화 없는 세계는 썩는다. 이런 변화는 인공지능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일어난다 한들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났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과거 시대의 낭만은 그들이 낭만의 주된 특징이라 말하는 인간애와 동시에 각종 부조리를 담보하고 있지만 대다수 전자만을 택해서 기억한다.
인공지능의 권위 무너뜨리기는 인간종(種)만의 권력인 ‘언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5장 <언어라는 도구 너머에서>는 기풍, 기세 등 추상에 의존하는 바둑 언어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정말이지 애매하게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게 인공지능을 통해 드러난다. 이 대목은 언어의 애매함이 인간 권력의 설명 불가능한 아우라와 위계를 세웠다는 걸 보여준다. 문학에서도 추상적인 단어가 자주 쓰이는데 대부분 불완전한 표현인데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받아들였다는 반성을 많이 했다(그래서 모든 표현을 의심해 보는 습관이 생겼고, 더 정확한 표현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환경의 균열
어쨌거나 인공지능(기술)은 인간(문화)의 권위에 차분하게 도전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라움과 배덕감을 느끼면서 인공지능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6장 <불변의 법칙>은 바둑이 예술인가 스포츠인가 하는 논쟁을 통해 스포츠로 자리 잡은 역사(그러나 정책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책에서는 바둑을 예술로 보는 사람도, 스포츠로 보는 사람도, 그 둘 다 아닌 다른 거라 보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이 또한 바둑이 애매하고 예술이 애매하고 스포츠가 애매해서 낳은 혼란이다)를 되짚으며 이제 사람들은 인센티브(주로 수익성 강화)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한다. 문학 또한 인공지능이 생기면 상업성과 대중성으로, 말하자면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화가들이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것처럼, ‘예술가로서의 인정’이 인센티브라고 생각한다면 더 아방가르드해지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고 했다. 구체가 추상을 따라잡으면 추상은 더 먼 길을, 어려운 길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작가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이런 결과로 현대예술이 어려워졌다고 생각하고(문학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키치와 아방가르드-이 될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 또한 들었다. 물론 예술의 심화 현상은 신기술에 대한 반작용인 것만은 아니다. 예술은 기반이 단단해지면 언젠가 썩기 때문이다.
7장 <새로운 일자리, 혹은 ‘죽음의 집’>은 바둑 해설계와 교육계에 일어난 변화들을 분석하며 기술-환경의 변화가 가져오는 ‘인식’의 변화를 말한다. AI가 사진에 찍힌 다른 사람들을 지워주는 건 환영하면서, AI가 그림을 출품하면 모욕이라고 거부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는 일반 분야에 인공지능이 접목됐을 때보다 예술 분야에 인공지능이 접목됐을 때 기존 믿음이 훼손당했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고 한다. 그만큼 예술은 ‘가치’의 측면이 강해서일 테다(그런데 그 가치가 무엇인지는 우리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이 저격하는 건 바로 그러한 추상적인 개념들을 정의하지 않는 태도다. 추상을 정의하는 게 정확함으로 추상들의 모호함 뒤집는 인공지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어려운 길이다).
해설진이 인공지능의 승률과 방대한 데이터에 의존하고, 바둑 학원도 인공지능의 수를 학생들과 같이 분석하는 식으로 교육하게 된 변화는 인간의 의사결정이 인공지능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권력(그 속의 부조리)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는 좋은 변화일 수도 있지만, 권력을 가진 자가 ‘책임’도 같이 지는 원칙(물론 권력자들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해서 문제긴 하다)이 인공지능에게는 해당되지 않아 인간의 책임만 는다는 점(인공지능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부여해야 할지에 대한 법적 근거나 윤리적 논의가 크게 진전된 상황은 아니다)을 생각하면 정당한 변화일까, 의아해진다.
바둑계에서 벗어나 의료, 경영, 법률 분야에서도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다고 하며, 그런 조직에서 개인의 의견은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을지, 정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작가는 질문한다. 결국 인간은 직업에서 주도가 아니라 보조원이 될 것이며(이를 ‘불쉿 직업’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임금이 그대로여도 무가치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혼란스러워질 거라고 한다. 결국 인간은 ‘가치 있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아닌 인간도 있겠지만).
인간만의 바둑이 가리키는 네 방향
8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인공지능이 두는 바둑은 저쪽에 그대로 두고 인간만의 바둑을 ‘어떻게’ 둘지에 대해 네 방향의 논의를 보여준다.
(1) 모두가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 농구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재미 가치 의미는 각자 나름이니 그걸 추구하자는 측(좋긴 한데 재미는 뭐고 의미는 뭐며 가치는 또 뭔지라는 ‘정의’ 난관에 봉착한다),
(2) 인간 대 인간이 두는 바둑의 특징은 ‘감정’이다, 그러니 인간끼리의 경쟁(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에 중점을 두고 보자는 측(인공지능과 인간이 바둑을 두는 건 이세돌 알파고 대국 이후 알파고 측이 바둑계를 은퇴하면서 없어진 추세이기에, 인간끼리 두고 있는 건 지금 현 상황에 대한 부연이다. 그러면서 초반 수를 인공지능과 연습해 암기하는 게 중요해졌다고 앞에서 작가는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전제를 둘 거라면 두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바둑에서 예술적 성취, 즉 탁월함과, 신기술이 인간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낫게 만들 거라는 기대 말이다. 인간이 인공지능의 탁월한 바둑을 암기하고 모방하는 게 이 승부의 관건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신의 경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바둑을 두는 존재가 나타났음에도 인간끼리의 승부가 줄기는커녕 부담과 강도만이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두 번째 포기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 기술이 보편적으로 보급되면서 어느 분야에서건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었지만 여가 생활에 보내는 시간을 늘게 해준 건 아니며 외려 더 자잘한 노동과 교육이 많아졌다고 평소에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인간 서사에 초점을 두어 드라마틱함을 강조하자는 측(두 번째 의견처럼 감정에 초점을 두고 인간의 탁월함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인데, 그러다 보니 아마추어 스포츠에 사람들이 더 주목하는 현상이 생겼다는 걸 예로 들고 있다. 프로의 측면에서 보면 섭섭할 일이다. 뛰어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그 분야의 발전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결국 뛰어남과 서사 각 방향, 혹은 그것의 적절한 융합을 추구해야 하지 않나 싶다. 예술의 키치와 아방가르드라는 갈림길과 비슷한 봉착이다),
(4) 스타성을 택해 팬덤비즈니스를 택하자는 측이다(중국의 프로 바둑기사 커제가 그 경우라고 한다. 좀 놀랐다. 이 파트에서는 팬들이 스타의 스토리를 좋아하지만 그 팬덤 스스로가 굉장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지녀 스타가 뛰어나지 못해도 지지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팬덤비즈니스는 사생활-전문 분야에서 발휘되어야 하는 탁월함과 관계없는-마저 사용되기에 이제는 개인화를 판매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부분도 충격적이면서 납득이 갔다)
기술과 가치
9장 <가치가 이끄는 기술>, 10장 <인공지능이 아직 하지 못하는 일>은 바둑계 이야기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기술과 가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특히 9장은 기술 CEO와 기술 낙관론자들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어쩌면 8장까지는 작가의 세심한 조사의 결과였고, 여기서부터 작가의 의견이 진정으로 시작된다 할 수도 있겠다(난 이 성실한 빌드업과 방향 전환이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비판은 8장의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가 갑자기 내놓은 질문, ‘인공지능이 이렇게 멋대로 세상을 바꿔도 되나?’에서 출발한다. 사실 이 질문은 작가가 굉장히 아껴놓은 질문이기도 하다. 5장에서도 이미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들도 별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뛰어나니 좋잖아? 하는 태도를 보이며 그 지능에 대해 정의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9장에서 구글이 알파고로 인공지능의 실력을 확인한 뒤로 바둑계에서 떠나(어떤 지원도, 후학 양성도 없이) 신약 연구 분야로 진출해 거액의 상금을 얻었다는 걸 지적하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신약 연구 분야로 진출한 건 인공지능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들, CEO들의 선택이다. 작가는 그들이 ‘기술이 가치를 선도한다’고 믿으며,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믿을 뿐이지 그 옳음을 연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신약 개발보다 더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선 투자가 없기 때문. 일론 머스크가 화성을 개발하려는 시도도 애먼 일이 옳다고 주장하려 한다는 시도라고 작가는 보고 있다). 그들이 기술자임에도 사상가처럼 군다고. 문제인 건 그들을 견제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국가도 그들을 견제하기엔 약하다고, 오히려 그들의 홍보에 이용될 수도 있고 그들이 나라를 버릴 수도 있다고 하는 예시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을 쓴 커즈와일이 낙관론적인 의견 ‘기술이 우리가 우리 운명을 지배하게 해줄 거다’에 대해 오이디푸스를 예로 들며 반론하는 부분이 가장 좋았다. 미래를 지배한다면 그 미래는 의미가 있는가?(난 완벽한 무의 상태, 진공의 상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지배에 실패한다면 인공지능(트랜스휴먼)은 스스로를 벌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만일 그 죄책감을 도려낸다면 정말 그로테스크한 시나리오가 될 거라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이처럼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시나리오라면서 후자를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나는 그걸 해법이라 여기는 기술자들이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악은 그처럼 진부한 것이니까. 법적으로 막을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무용하진 않지만 무력한 분야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작가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처럼 인간에겐 죄책감 고통이 따르며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술이 부정하게 해준다 해서 그 문제가 아예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통신 기술의 발전사로 보여주면서. 작가는 결국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사상이며, 정치 제도가 권력을 발휘할 때보다 과학기술에서 권력을 발휘하는 게 사람들의 견제 저항이 적다는 점이 문제라고 말한다. 이 문제가 기술이 가치를 이끄는 사회, 기술이 가치를 훼손하는 사회를 만든 것이다. 이 문제는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기술개발이 이윤 창출, 군사력 강화 지원 쪽으로 쏠리는데 그걸 더 나은 삶이라고 그들이 포장하기 때문에, 인문학이 계몽주의 사상에 갇혀 있기 때문에, 문명의 세속화로 인해 좋은 삶이 개개인에게 맡겨졌고 자본주의가 재화 서비스로 그걸 찾아 나서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 당사자끼리의 의사결정이 최선이라는 인식이 타인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쪽으로 쏠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진짜 하고 싶은 말
10장에서 작가는 조지 오웰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라는 르포르타주에서 이미 이런 문제를 지적했으며 자기가 이제 하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하면서 운을 뗀다. 그는 조지 오웰의 대표작 <1984> 같은 미래가 오진 않았지만, 현재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사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개발되는 기술들-CCTV기술, 증강현실 기술, 데이터 예측 분석 기술-이 초래할 문제들을 문학적으로 대응하려는 시도인 ‘STS(과학기술과 사회) SF소설’과, 아세모글루와 존슨 등의 학자가 내놓는-과학기술을 통제하는-정책 방안을 소개한다.
작가는 과학기술 낙관주의와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자연주의도 위험하다는 입장하에 기술 발전 속도가 시스템과 맞물려서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밝히고, 기후 위기 대응처럼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경제성장을 방해한다는 반론이 나올 거라는 점에서도 유사하다)가 되었기에 초국가적인 공적 관리 체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더 나아가서 가치가 기술을 이끌 수 있도록 가치의 근원을 설명할 인문학판 맨해튼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피력한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이를 위한 도덕적 원근법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좋은 상상이라는 두 방향을 제시하며 책을 마친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하는 질문
읽는 동안 내가 전부터 여기저기서 모아온 생각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들을 살펴볼 수 있어서, 그리고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것들을 수긍하게 해줘서 작가가 무척 고마웠다. 내가 작년에 인공지능 수업을 들으며 내린 결론,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공지능이 뭐냐 보다도 인간다움이 뭔지 묻게 한다는 결론에도 맞닿아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도 있었다. 정말 모든 게 연결되는구나, 이 책을 보면서 많이 느끼기도 했다. 특히 구체와 추상, 기술과 문화에 대해서. 작가의 말대로 지금은 기술 쪽에 너무 치우쳐진 것 같이 느껴진다. 문화적 성숙이 필요한 때다.
인간의 본질은 애매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태까지는 그 애매함을 모르고 즐기고 과장했다. 하지만 비인간 존재가 그 애매함을 흉내 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애매함이란 게 도대체 뭐냐는 질문이 인간한테 아주 가혹하게 주어져 버렸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인공신경망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 때 왜 그 결론이 나오게 되었는지 사고 근거, 과정을 알 수가 없다. 이를 ‘블랙박스’라고 칭하는데, 이것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지다 보니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정확성은 떨어지더라도 설명을 할 수 있는 ‘설명가능 인공지능(XAI)’을 연구하고 있다. 그래프나 노드, 설명 태그를 붙이는 등의 시각화 작업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블랙박스가 있다. 물론 인공지능보다는 더 설명력이 뛰어나겠지만, 시각화 능력이 개개의 능력치에 달려 있고, 설명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나는 그런 설명 불가의 순간이 겹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간과 사회가 좋은 쪽으로 성장해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설명 불가의 순간이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모순을 빚어내 인간 사회를 곤혹에 빠뜨린 적도 꽤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 같은 질문이다. 우리가 더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더욱 골몰해야만 한다.
문학계가 보는 인공지능
작년에 갔던 여러 북토크에서도 인공지능 이야기는 빠짐없이 나왔다. 인간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여겨지는 것)인 예술은 그 독자성, 스스로 있다는 특성 때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야 해서 공격에 취약하다. 그래서 예술은 위기가 찾아오면 반항 저항 등의 거부로 자신을 지켜내곤 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대화도 안 되고(대화가 되긴 하는데 실제 감정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니) 예술의 거부에 당황하거나 물러서지도 않는다.
작년 11월 열린 김영하 작가 데뷔 30주년 기념 영화제에서 나는 영화 <마스터>를 보고 그의 GV를 들었다. 김영하 작가는 오래전엔 이 영화를 부모와 자식 간의 은유로 보았는데 이번에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로 활동하는 ‘랭커스터(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배우)’ 아래 있지만 길길이 날뛰며 반항하는 ‘프레디(호아킨 피닉스 배우)’가 마치 인공지능에 대항하는 인간의 상징 같이 느껴졌다고 했다. 프레디의 과격한 행동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지속적인 거부와 반항으로 예상치 못한 변화를 맞이하고 랭커스터와 멀어짐으로써 성장하는 듯한 부분은 마치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에서 끝까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바틀비와 그런 바틀비를 두고 화자가 하는 마지막 말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라서 인상적이긴 했다. 결국 인간은 거부할 줄 아는 존재라는 걸까.
출판사 마음산책 연말 특별강연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절망, 희망, 문학’ 세 키워드로 강연을 진행했다. 첫 파트 절망에서 바로 AI가 등장했다. 그는 AI의 글쓰기는 유려하지만 뭐랄까 미끌미끌해서 A+는 아니고 A0 같다고 했다. 문제는 이제 학생들이 내는 과제물에 B, C도 없다는 것이었다(내가 누누이 느낀 기술에 의한 인간 능력의 상향평준화다. 이는 이 책의 4장 <평평함과 공평함>에서도 다뤄지고 그 구조적인 문제점은 8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심화된다). 그는 제대로 절망하지 않아서 진짜 절망스러운 게 지금의 형국이라고 했다. 거짓 희망을 버리고 진짜 절망을 고수하는 작가나 근거 있는 희망을 제시하는 작가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는 문학의 미래를 말하는 과정(여기서 신형철 평론가는 내가 나중에 읽을 <먼저 온 미래>를 언급했다)에서 AI와 다르게 인간은 명확한 한계가 있으며 그게 매력이라고 말했다(왠지 프레디가 연상된다). 그리고 어떤 상태를 직접 경험해서 아는 상태를 일컫는 ‘현상적 지식’이란 말이 있는데(<먼저 온 미래>에서는 과학철학자 마이클 폴라니가 제시한 ‘암묵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둘이 같은 뜻으로 보인다) 육체에서 기인하는 ‘고통’이 현상적 지식 중에 제일 중요하며, 문학은 내 고통과 타인의 고통 사이의 경계를 건드릴 줄 안다고 말했다(한강 작가가 소설로 그런 성찰을 해왔다는 걸 예로 들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가 AI에게 몸을 주어 현상적 지식으로 가는 걸 말릴 순 없다고, 그래서 AI로 인한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무엇으로 인간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무얼 잃어버릴까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더 과거로 거슬러 작년 9월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핸드폰으로만 글을 쓴다면’이라는 주제로 성해나 작가, 우다영 작가, 후즈키 유미 작가가 대화를 나누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그 주제를 보자마자 참여 작가가 누군지 보지 않고도 우다영 작가가 참여 명단에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어느 계간지에서 우다영 작가가 핸드폰으로 소설을 쓴다고 적은 걸 보았기 때문이다. 행사는 세 작가의 집필 방식과 글쓰기 도구의 변화, 미래의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진행되었는데 세 작가의 의견이 전부 달라서 듣는 재미가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정보가 들어오면서 정보와 거리 두는 게 쉽지 않아졌고 이게 사고에 개입이 된다는 후즈키 유미 작가의 의견에도, 문학이 가진 느림의 미학을 중요시하며 지금의 이 흐름을 역행하고 싶다고 밝힌 성해나 작가의 마음에도, 늘 글을 꺼내 보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며, 노트북과 폰을 오가는 글쓰기 또한 좋아한다는 우다영 작가의 말에도 나는 공감이 갔다(난 소설 한 편을 폰으로 쓴 적이 있다. 그리고 평소 독서 감상을 폰으로 쓰는데 이번 글은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인공지능에 대한 토론은 아니었지만,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변화에 대해 낙관하지 않지만 또한 크게 낙담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다고나 할까.
좋은 애매함 갖추기
나는 무언갈 새로 알게 된 상태에서 견지하는 이런 ‘태도’가 인문학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학 과학이 아닌 인문학에 ‘학’이 들어가는 것은 배우면서 그러한 태도를 기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의미한 결론에 곧장 가닿는 건 아니지만-선의가 그렇듯이-이런 태도를 고수할 때 주변부에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의미들이 있고, 그 의미들이 숙성되어 추후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중요시하고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이 생각도 나 혼자만 하는 생각이 아닐 것이다.
가치는 거창한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소하더라도 좋은 걸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의 풍요가 초래할 미래의 빈곤을 줄이기 위해 지금 무언갈 멈추는 것, 멈추고 생각하는 것. 현재로서 인공지능 기술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추구이다. 물론 인공지능 시대에 새로 생겨나는 좋은 것도 있다. 그것들과 같이 미래를 위하려는 태도를 갖추면 더욱 좋을 것이다. 여전히 애매하더라도 좋은 애매함을 갖춘 존재가 되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