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따듯한 시선으로 시작(詩作)하기 [도서/문학]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2018)
글 입력 2023.08.15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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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미래파의 등장 이후 난해한 시가 대세가 된 문단의 경향 속에서 일상의 언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데, 다름 아닌 박준이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깊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삶의 주변에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면모를 포착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길어낸다. 쉽게 시가 쓰여진다기 보다는 쉬운 시를 쓴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의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속 시편들은 대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따듯한 시선이 두드러진다.


표제 문장이 삽입된 「장마」는 탄광촌 태백에서 보내는 답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는 탄부들에게 늘상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풍경을 담은 편지를 구겨버리고는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쓴다. 그렇다고 시인이 마을의 척박한 현실을 외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두세번째 문장에서부터 마을과 광부를 향한 애정의 시선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의 따듯한 시선은 비단 사람을 향해있지만은 않다. 「단비」는 새끼들이 모두 팔려간 단비라는 개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사랑을 노래한 「선잠」은 서정의 근본형식이 회상이라는 에밀 슈타이거의 이론에 충실하다. 시인은 ‘그해’로 말문을 연다. 그의 시에는 그해라는 단어가 빈번히 사용되는데, 이는 회상을 통해 박준의 시세계가 형성되었음을 증거한다. 사랑을 서로의 섣부름, 선잠 등에 비유하는 시인은 과거를 돌아보며 주체와 객체의 거리를 없애고 대상과 융화한다.


이러한 회상은 「숲」에서 단순히 돌아보는 행위를 넘어 과거의 ‘말’들이 현재에 도착하는 상황으로 거듭난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역시 ‘그해’로 시작하는 「그해 봄은」에서 시인은 이별을 겪은 친구와 마주앉아 ‘뜻대로 되지 않음’을 논한다. 소생의 계절인 봄에 무언가가 퇴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슬픈 일이다. 봄 다음의 계절을 배경으로 한 「여름의 일」은 결핍과 질곡 속에서도 지속되였던 ’그해 여름’의 사랑을 말한다.

 

기승전결 없이 삽화를 툭 던져놓는 몇몇 시의 구조는 백석의 짧은 시편들과 닮아있다. 「목욕탕 가는 길」은 절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노승들의 모습을 제시하며 천진한 동자승의 이미지를 중첩시킨다. 이를 통해 그는 유년과 노년의 유사성, 만물의 순환이라는 불교적 진리를 간략하게 표현한다.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 트럭을 몰았던 아버지와의 기억은 그의 시의 주된 재료가 되었다. 「처서」와 「생활과 예보」는 아버지와 한철을 보내는 아들의 시선에서 쓰여진 시다.

 

김소월, 한용운 등의 내력이 존재하는 경어체의 사용은 시를 한층 아련하게 만든다. 우물쭈물하며 수줍게 몇마디를 내뱉고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떠나가는 소심한 사람. 박준의 시에는 그런 이가 겹쳐보인다. 많은 시인들이 소심한데, 소심해야 섬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 여름은 폭염과 함께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장마철을 흘려 보낸 늦여름에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속 시 편들을 읽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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