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을 뒤흔드는 거대한 파도는 종종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을 하고 불시착한다. 누군가에게는 전 재산이 담긴 자동차를 빼앗아 간 2만 1,634달러의 가혹한 견인 청구서로, 또 누군가에게는 단골 바에서 우연히 입술을 적신 달콤한 럼주 한 잔으로.
재난과 행운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시작한 이 예고 없는 사건들은 철저히 혼자였거나 세상의 변두리에 머물던 두 여성이 어떻게 세상 한복판에 걸어 들어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나를 지키는 방법은 나에게서 시작된다 : <토우>의 어맨다
억울하게 차를 빼앗긴 시애틀의 노숙인 여성 어맨다는 부당함을 억누르고 쉽고 빠른 타협의 길을 택하는 대신, 견인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갓 얻은 직장을 유지할 동아줄이자 그녀의 온전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법정에 선 그녀는 동정을 구하는 미사여구 대신, 날것의 감정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꼿꼿하게 호소한다.
차가 경매에 넘어가고 잠잘 곳을 잃어버리는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인 '핑크색 옷과 금발'을 끝까지 지켜냈다. 세상이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할수록 더 크게 소리치며 존재를 각인시키면서.
우리는 자라면서 눈치를 살피는 일이 어느샌가 익숙해졌다. 그 익숙함은 나를 챙기는 일에서 미숙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의 슬픔보다, 나의 울음소리가 세상의 소음이 될까 두려워 목소리를 낮추고, 양보와 배려라는 좋은 단어들을 앞세워 세상은 매끄럽게 유지했지만 그속에서 나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일은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벼랑 끝에 몰려서도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어둠을 홀로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잠시 '성숙하다'는 수식어를 붙여주곤 무심하게 떠나버린다.
그러나 공동체는, 나를 포함한 다수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 속에서 개개인의 가치를 잃어간다면 공동체의 가치는 점차 껍데기처럼 느껴진다. 부당하게 나의 것을 빼앗길 때, 우리는 기꺼이 이기적으로 변해야 한다. 어맨다의 투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치열한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온기도 있다. 엄격한 규칙 속 틈을 그녀의 진심만큼 내어준 법원과 보호소의 직원, 그리고 그녀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준 변호사도. 그녀의 꼿꼿한 걸음 속에도 누군가의 조용한 배려와 애정이 있었기에 그녀의 걸음이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항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가망 없다고 만류할 때도 "내가 놓지 않았다면 결코 놓칠 수도 없다"는 꼿꼿하고 굳은 그녀의 발걸음은, 텅 빈 손끝이 아린 채 침묵을 택했던 우리에게 주먹을 맞대 주는 힘으로 닿는다.
우연을 필연으로 빚어내는 꼿꼿함 : <바람의 마지무>의 마지무
어맨다의 사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맹렬한 저항'이었다면, 오키나와 나하에 사는 마지무의 걸음은 '우연히 발견한 꿈을 향해 뻗어가는 무모한 열망'이다.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위치에서 허드렛일을 도맡고 은근한 따돌림을 견디던 그녀는, 파쇄기를 돌리다 우연히 발견한 사내 벤처 공모전 전단지와, 입안을 맴돌던 럼주의 강렬한 향기에 이끌려 '오키나와산 럼주 만들기'라는 프로젝트에 뛰어든다.
마지무는 움직였다. 맛있는 럼을 맛본 직후에도, 사탕수수가 자라는 미나미다이토섬으로 단숨에 휴가를 떠날 때도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의 아이디어를 믿어준 상사, 다양한 럼을 소개해 준 바텐더, 섬에서 만난 동창, 그리고 거센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또렷하게 자신을 응시하며 믿음을 전하는 할머니와 엄마까지.
그 모든 만남이 단순한 행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인연은 오직 움직이는 자의 동선 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닌 발생하는 것이니까. 그녀가 기꺼이, 그리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기에 스칠 수 있었던 그녀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우연이었다.
그녀보다 훨씬 유능한 경쟁자 앞에서도, 이윤을 최우선으로 삼는 회사의 논리 앞에서도, 섬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어르신들의 냉소 틈에서도 마지무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은 거기서 끝나버리기 때문에. 기회를 쥐는 방법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를 사랑스럽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계속 걷는다면, 풍경은 반드시 변한다도난이라는 최악의 사고를 시작으로 대기업을 상대로 승소해 낸 어맨다와, 한 잔의 럼을 시작으로 럼주 회사의 사장으로 거듭난 마지무. 전혀 다른 궤도를 달린 듯 보이는 두 여성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 끝까지 꼿꼿하게 걸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 엎어졌다 다시 일어났고, 파도가 밀어내면 밀려났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주변의 무수한 소음과 훼방 속에서도 자신만의 핑크빛 고집을, 입안에 감돌던 달콤한 럼의 감각을 결코 놓지 않고 매일을 꼿꼿하게 나아갔다.
그렇게 간절한 무언가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에 마법처럼 나타나는 일은 드물다. 어쩌면 평생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맨다를 벼랑으로 몬 사고가 역설적으로 그녀를 세상 속으로 섞여 들게 하고 타인과 연대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듯, 마지무의 무료한 일상에 들이닥친 럼의 달콤함이 잠들어 있던 열망을 깨워냈듯, 사고처럼 눈앞에 불시착하는 우연이 있다면 기꺼이 온몸으로 부딪혀보기를, 그 우연을 자신의 필연으로 움켜쥐고 싶다면, 두려움 없이 손을 뻗어 나아가기를 바란다.
목표를 향해 가는 길 위에는 필연적으로 무수한 소음과 방해물이 존재한다. 그러나 목표를 향한 길이 아니더라도 소음과 방해물은 여전히 필연적이다. 그러니 기꺼운 마음으로 그 틈을 뚫고 걷다 보면, 또 다른 우연과 인연을 만나거나 미처 몰랐던 매력적인 샛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떤 길이든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를 계속할 것. 걷다 지쳐 어느샌가 뒷걸음질을 치게 되더라도 그것 또한 그저 한 걸음으로 남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계속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이는 한 눈앞의 풍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새로운 이야기와 인연이 그 속으로 침투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더 특별해진다.
인생은 거대한 성공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다양한 풍경을 보고 겪었는지, 그 무수한 우연의 조각들을 수집해 나라는 주인공의 서사를 직조해 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장르도, 결말도 결국 마지막 막이 내려질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오직 당신만의 드라마를 위해.
이미지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