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내가 《이혼숙려캠프》(이하 이숙캠)의 열렬한 애청자라는 사실을 밝히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목요일 저녁마다 TV를 보면서 이번에는 얼마나 기상천외한 부부들이 나올지, 그들은 어떤 사연을 가졌을지, 이혼하길 원하는지 그렇게 정말 이혼으로 결론을 내릴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숙캠의 인기에 힘입어, 커플들의 문제를 다루는 《연애전쟁》과 같은 프로그램과 호랑이처럼 강렬한 카리스마로 상담을 진행하는 《이호선 상담소》 역시 인기를 끌고 있다. 《연애전쟁》같은 경우, 결혼을 앞둔 커플들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를 공개하면서 패널들의 의견을 공유하고 서로 다시 만날지 아닐지를 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이호선 상담소》와 같은 경우 단순히 부부의 문제뿐 아니라 여러 가족의 문제를 이호선 상담가에게 말하고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솔루션을 말한다. 이호선 상담가가 있기 전에는, 오은영 선생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오은영 리포트-결혼지옥》 역시 부부의 영상을 시청하고 오은영 선생이 솔루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모든 방송이 이숙캠 때문에 탄생했다고, 우열 혹은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아니다. 무엇이 먼저 나왔든 상관없다. ‘전문가’에게 부부 상담을 받으려는 방송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이때 그 당시 인기를 누리는, 가족 문제와 부부 문제에 적절히 그리고 정확해 보이는 조언을 할 전문가의 권위를 빌린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나는 전문가들의 권위나 그 전문가들을 지적하고자 하려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출연자 패널, 출연한 부부들을 지적하고자 하는 글 역시 (당연히) 아니다. 또한 프로그램을 만든 제작진을 탓하려는 것도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그저 본인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 아닌가. 하지만 ‘프로그램’으로 즉 방송으로 만들어져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노출되고 있음은 문제다.
자, 그러니까. 내가 말하려는 모든 것들은 사람을 향해있지 않다. 그들이 몰두하는 추상적인 무언가, 혹은 그들이 딛고 있는 사회를 이루는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나의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정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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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부들의 문제를 다루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유해한 것을 넘어, 일종의 ‘위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콘텐츠는 위험하다.
우선 모두가 생각하는 유해함에 관해서 말해보자. 자극적인 욕설이나 폭력이 방송되고 있다는 점은 아마 모두가 이미 느끼고 있을 유해함이다. 이때의 유해함은 방송의 수위 측면에서 지적받는 것 같다. 그렇다면 19금 딱지를 붙이면 이 유해함이 해결되는가? 아니, 그래서 그게 유해함에 관한 핵심인가? 이게 전부인가?
내가 생각하는 부부 상담 프로그램의 유해함은 부부의 문제를 심리의 문제로 한정함으로써 그 밑에 깔린 본질적인 맥락을 삭제하는 것이다.
많은 프로그램이 부부의 문제를 각각의 심리에서 찾는다. 가령 어린 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 부모와의 관계에서의 문제 등이 꼽힐 수 있다. 그렇게 자기를 좀 더 이해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더 나은’ 남편, ‘더 나은’ 아내가 됨으로써 해결로 향한다. 그래, 이런 해결법은 더 나은 부부로 거듭날지 모른다. (나는 얼마간 그렇게 되리라 믿고 싶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인 해결법은 ‘부부’의 문제를 정말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심리 상담에 초점을 맞춘 방법으로 부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에는 ‘젠더’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의 문제는 젠더 문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부부는 일정한 성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는 관계성이다. 이때 각자에서 주어진 성역할이란, 성차별적이다. 가사 부담과 출산, 육아를 넘어서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언과 폭력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희진 선생이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지적해 준 대로, 성역할의 불이행은 ‘맞을 짓’이 되며 성역할을 어겼을 때 발생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러하다. 이를 포함해 부부 사이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젠더 문제가 존재한다.
물론 방송국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정말 모를 수도 있지만) 방송에서 젠더고, 뭐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아마 해당 방송의 시청자 게시판이 정말 난리가 날 것이다. 중요한 건 이런 정치적 곤란함 속에서 젠더의 맥락은 삭제되고, 삭제되면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부 사이의 문제를 젠더적으로 이야기해 볼 기회와 장소조차 사라진다. 아니, 그런 생각을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많은 문제의 근본 원인이 젠더이지만, 젠더에 관해서는 절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젠더는 얼마간 사회적인 차원의 이야기다. 내 앞의 바로 이 남편과 아내를 말하면서 그 뒤에 서 있는 수많은 남편과 아내, 과거에 남편과 아내였던 모든 이들을 불러 세우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부부의 문제는 ‘사회적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 상담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해결 방법은 이를 자꾸 심리로 한정하면서,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하게 한다. 그저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로, 그저 남자와 아내의 다툼만으로.
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 논리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 《페미니즘 도전》 P.132
당연하지만, 부부를 보는 관점이 이러하면 실제 가정폭력 사건을 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러한 해결 방법이 가정폭력과 같은 문제를 축소할 우려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된다면 부부 상담 프로그램은 그저 시청자들의 도파민을 위한 일종의 스펙터클로 남아버릴까, 진심으로 두렵다. 이는 얼마간 경험담이다. TV를 보면서 ‘어머 저 남편 너무 하다, 어서 이혼해라’라고 종결 내며 소비하는 것이 무섭다.
부부 상담 프로그램의 형식은 보통 남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순서는 상관없다)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는 여러 잘못을 했고,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은 여러 잘못을 했다. 가령, 남편의 가스라이팅은 아내의 외도 사실에 대응하며, 남편의 폭언은 아내가 가사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대응한다. 남편의 잘못과 아내의 잘못은 동등한 차원에서 비교된다. 그러나 이랬을 경우, 아내의 가사 일은 당연한가? 이런 질문은 없어진다. 젠더가 만들어낸, 문제적인 상황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은 생략된다. 나아가 폭력은 이해될 맥락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닌가? 둘은 정말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이런 고민을 하기 전에, 우리는 아내와 남편의 잘잘못을 따지게 된다.
더불어 여성을 향한 시선도 문제가 된다. 이혼하지 못하고, 그런 문제를 껴안으면서까지 남편과 같이 살고 있는 아내는 정말 답답해 보인다. ‘지 팔자 지가 꼬았네’ 이렇게 중얼거리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부란 일정한 생활 공동체이자 경제 공동체이다. 이혼이란 ‘해방’과 가까운 단어이지만, 남편과 이혼함으로써 가진 인연들을 전부 정리하고 직업과 경제적인 소득을 전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가? 문제는 부부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선을 ‘평가하는 사람’의 위치로 끌어온다는 것이다. 그저 이혼만을 외치며 부부 문제에 관해서 깊은 고민을 껴안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가정폭력을 입 밖으로 내기까지, 그것을 제도의 테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이 소리쳤고 얼마나 많은 여성이 죽었는가. 그러나 나는 이 모든 현상이 여기까지 온 노력과 고통을 무산시키는 감각으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너무나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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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마다 다른 사연이 있고 사정이 있겠지, 어떤 문제는 아내가 잘못했고 어떤 문제는 남편이 잘못했을 것이다. 모든 부부의 사연을 종합하고 정리한 통계치로써 분석한 결과가 아니니, 어떤 부부는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분석은 모든 부부에게 해당할 수 없으리라는 걸 인지하면서 썼다. 하지만 동시에 일일이 맞지 않은 부부가 있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사례가 있다고 해서, 틀리거나 의미가 사라지는 분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다들 많이 무서워했으면 좋겠다. 그 공포가 우리를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하니까. 그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