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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가능한 사랑. ( )이/가 가능한 사랑일 수도 있고, 가능한 ( )하게 사랑하다..일 수도 있고 덩그러니 남겨진 가능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잘 안 붙어서. 왜냐하면 나에게 사랑이란 원래 뭐든 다 가능해야 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계산 없고 순수하게 그냥 사랑. 그런데 왜 이창동 감독은 가능과 사랑을 붙여놨을까. 그게 너무너무 궁금했다.
영화 첫 장면에는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문구가 띄워진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중 마지막 계명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에서 따 온 것. 탐하는 자 라는 해석에 대해서는 이미 이동진 선생님의 해석 등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듯해서 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나는 정말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결국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 사랑을 하려는 사람, 예지
예지는 '사랑을 하려는' 인물이다. 상우가 예지에게 '메소드 연기'를 한다고 이야기하자 예지는 즉각 기분이 나빠 보이는 표정으로 "나는 그들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을 의지대로 할 수 있나. 예지의 말을 듣자마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사랑은 선택해서 줄 수 있는 영역인가.
그렇다고 예지가 한 모든 것이 위선이고 거짓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일에 최대한 몰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을 사랑한다는 행위를 선택했다면 적어도 사랑을 모방하는 데까지는 도달했을 것이다. 그게 동정이든 연민이든 호기심이든 어떤 형태로든.
카타르까지 가서야 비로소 노동자 인권을 고민하게 된 그녀의 사랑을 얕다고 꼬집고 싶진 않다. 다만 티셔츠가 비싸다는 지적을 받은 뒤부터 수수한 티셔츠를 기꺼이 입고 다니면서도 다니는 가방과 시계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허술함, 세탁소 집 딸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압구정 출신과 미국 유학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 것처럼 구는 안이함까지 끌어안아 보기는 힘들다.
사람의 감정을 극한까지 치닫게 해놓고도 카메라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예지의 시선이 무참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결국 예지는 카메라 밖으로 달려나가 호석의 등을 쓸어준다.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것을 알면서도 잘 도착했느냐 문자를 보내거나 눈물을 흘릴 줄도 안다. 큰 프로젝트의 '망함'을 직감해서 한 행동이라면 할 말 없지만 완전히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예지는 사랑을 학습해서라도 최대한 닮고 싶었던 사람이다. 사랑을 '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목표였기 때문에 어설프리만치 맹목적이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마음은 사랑이 될 수 없는 걸까. 사랑하는 행위를 모방하고자 하는 걸 완전히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2.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 호석
사랑을 줄 줄 알고 받을 줄 알았던 사람. 어릴 적엔 사과가 광이 나도록 박박 닦고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미옥의 손이 다친 걸 보고 그대로 택시를 잡아 같이 도망할 줄 알고. 후배라고 부르는 것보다 '동생'이라고 부르기를 선택하는 사람. 웅덩이에 흙을 9번이나 부어다가 땅을 메워 동생들과 같이 먹을 술자리를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이 없을까.
공권력의 폭력과 억울함이 남긴 신체적·정신적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가 동지들의 외면에서 왔다는 것은 호석의 입으로 직접 나오기 전부터 심리치료 장면에서 짐작할 수 있다. 언젠 귀족노조라더니 이젠 빨갱이라고 하더라. 심리치료를 받던 한 동지의 말, 그냥 그때가 좋았다고 고백하는 한 동지의 말. 하나하나가 다 호석의 외침 같았다.
내 매를 대신 맞아준 사람을 피하는 마음을 두고 우리는 누가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함께 연대했던 경험과 같이 쌓아온 시간의 붕괴를 사람은 어떻게 견뎌야 할까. 카메라 앞에서 눈물에 빠져 죽듯 포효하는 호석의 모습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호석은 해고를 피한 일명 '산 자'가 고깃집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정말로 병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진심으로 걱정했다. 엄연히 말하면 호석은 다시 취업도 했고 번듯한 집도 있다. 해고됐다고 당장 생계가 무너지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삶을 무너뜨리는 건 꼭 그런 것들만은 아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경험 이후에도 내가 다시 삶을 지어낼 수 있을까. 상처가 여전히 몸에 남아 있고, 한번 구겨진 삶이 좀처럼 펴질 것 같지 않아도.
당신 없으면 술이 무쟈게 써. 근데 당신이랑 먹으면 달아. 호석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내 안에서도 뭔가 해소가 됐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 너무너무 안심이 됐다. 내 근처에 있는 것 같은 인물이 영화 끝에서 예지가 말하는 '특별한 사람', 상우가 말하는 '뻔한 해고노동자 한 사람'으로만 남지 않고 겸연쩍게 미옥의 남편으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쓰면서 깨닫는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틀린 곳이 하나 없다.
3. 사랑을 지키는 사람, 미옥
솔직히 나는 미옥이 제일 어려웠다. 이해할 수 있다가도 이해할 수 없는 인물. 푼수 같은가 싶다. 헤헤 웃으면서 저는 소설 잘 몰라요 하고 얼버무리는 여자, 다 가진 남자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이나 시선을 제대로 채비하지 못하는 어설픔. 그러다가도 카메라 앞에서는 노조 설립 조건을 줄줄 읊으며 사장을 압박하고, 예지에게 티셔츠가 얼마냐고 서슴없이 물은 뒤 다큐 찍는 사람이 그래도 되겠냐고 핀잔을 준다.
결코 물렁하지 않은 여자인데 그걸 세속적으로 포장할 줄 몰라 어리숙해 보일 뿐이다. 자본 앞에서 겁먹거나 질식할 거 같지 않아 하면서도 자본이 가진 자유 앞에서는 동경 어린 눈빛을 하는 사람이 신기하고 어렵다.
미옥은 손세차를 하는 엄마를 보며 물줄기가 너무 예뻐 자신도 엄마처럼 물을 뿌려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호되게 혼이 났다고. 그런데 아들 철이가 관리인 민식과 함께 나무에 물을 주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미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미옥은 한 번 더 바라보기를 선택한다. 호석이 혼자 비척비척 숲으로 들어가 소리를 지르며 괴로워할 때 미옥은 걱정스러운 발걸음으로 뒤를 쫓는다. 그러나 끝까지 따라가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멈춰 서서 바라보다 그대로 돌아선다.
나는 그것이 미옥이 사랑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쫓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고,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고통에 끝까지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그저 등을 돌려주는 것도 지키는 방법일 수 있다.
영화에서 인물 중에 사랑을 직접 말로 하는 사람은 예지와 미옥밖에 없다. 예지는 대사로, 미옥은 노래로. 미옥은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노래로 사랑을 처음 말한다. 남편과 함께 투쟁에 나서고 술 없이는 잠을 못 자는 남편을 위해 향만 맡고 취하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옆자리가 비면 그 사람의 흔적을 찾아 발을 동동 구르는 이 사람이 사랑을 지키는 방식이 너무 진짜 같아서 잠시 말을 잃었다. 달라도,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거야.
4. 사랑을 개의치 않는 사람, 상우
상우는 매끄럽고 친절한 자본력이다. 그가 연출하는 모습은 너무 터무니없어서 가끔 웃겨 보인다. 이를테면 노래방에서 냅다 클라리넷을 연주한다든지, 반지를 주워다 주면서 got it!이라는 영어 감탄사를 내뱉는다든지. 웃기지만 우습지 않은 건 이러한 사회의 굴곡과 맞지 않는 모습이 맞출 필요가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색함이라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상우는 불쾌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웃고 넘길 줄 아는 여유가 있다. 호석이 자신의 화장실 여기저기에 소변을 흩뿌리고 마침내 욕조를 변기처럼 쓰고 있는 것을 목격한 때에도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그 행위에 동참하면서 그의 '수준'을 맞춰 준다.
상우가 힘줘 말하는 단어는 자유였다. 그러나 상우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으로부터 얻고 싶었던 자유 역시 자본이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자유라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아마도 SP 중공업일 인수 건을 처리하고 난 뒤, 상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다로 가자는 미옥을 따라나선다. 바다로 가자고 한 것은 미옥인데 앞서 걷는 것은 상우다. 그렇게 매번 여유만만하던 상우가 처음으로 인상을 쓰고 무너진 모습을 보이는 순간은, 마치 전리품처럼 제 앞으로 굴러들어 온 미옥이 끝끝내 자신을 거부하고 해변을 떠날 때다.
상우는 그 이후 미옥을 붙잡거나 화를 내는 대신 속풀이 대상으로 예지와의 섹스를 택한다. 예지가 '다른 사람 같아'라는 말에 '나는 나야'라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상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우다. 어떤 것도 잃지 않고,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은 채로. 상우에게 사랑은 가능과 불가능을 따져야 할 만큼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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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이 불가능을 논할까. 사랑의 가불을 따지는 게 중요할까.
사랑하려는 마음도 사랑일 수 있고, 사랑 때문에 망가진 뒤에도 누군가에게 돌아가는 마음도 사랑일 수 있고, 붙잡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마음도 사랑일 수 있다. 어쩌면 사랑은 각자에게 허락된 만큼,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지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장면이 중요하다. 그들은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도 아니고, 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없던 일이 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달을 바라본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달이지만 드라마틱 하지 않은 달을 촬영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는 후일담 인터뷰를 보면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어렵다는 말을 이해한다.
함께 있지 않아도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서로를 전부 알지 못하고, 끝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남겨둔 채로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불가능한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가능한 것을 찾아내는 일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고. 자꾸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떤 이름이 사랑이냐고.
출처: [인터뷰] 어떤 날은 밤새 달만 바라봤다, <가능한 사랑> 이창동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