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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브스턴스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와
개인적인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 늙으니까 사진을 잘 안 찍게 돼. 늙은 내 모습이 사진에 담기는 게 싫고 서글퍼.
필름카메라부터 캠코더, 디지털 카메라까지 다양한 기록의 취미를 갖고 있는 내가 찍는 주요 피사체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가장 많이 내 카메라 앞에 선 것은 아마 엄마일 것이다. 엄마는 내가 하라는 대로 카메라 앞에 서면서도 막상 결과물을 보면 가끔 저런 말을 하면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노화를 바로 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적게나마 실감해 가고 있다.
소화할 수 있는 종류의 음식도 이전보다는 확실히 줄어들며 숙취 해소나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한 이후에 회복기간도 오래 걸린다. 건강검진 시 검사하는 항목이 추가되며 노화로 인해 생기는 질병들에 대한 상식도 알게 모르게 늘어난다. 안티에이징 상품을 보면 솔깃하고 주름을 미리 관리하면 좋다는 말에 보톡스도 맞아봤다.
최근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저속노화도 안티에이징의 연장선이다. 노화를 지연시키거나 현상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식습관, 생활습관으로 구현하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건강한 노화'에 대한 관심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종의 죄의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안티에이징에는 젊은 시절 몸을 함부로 쓴 대가를 나이 든 시점에 돌려받는다는 일종의 카르마, 업보적 시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화를 관리하지 않아 나이보다 훨씬 노숙해 보이는 사람과 지나치게 노화를 피하려다가 역풍을 맞은 사람. 사회가 더 아니꼽게 보는 인물은 누굴까. 정답은 둘 다다.
다른 사회에는 살아본 적이 없으니 한국 사회만 말하자면 그렇다. "관리 좀 하지"와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적당히란 어딜까. 우리는 왜 그렇게 늙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는 걸까. 서브스턴스는 그런 것들에 대한 영화다. 외면하고 싶은,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노화에 대한 혐오의 이야기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면 여성이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내면화한 여성성의 폭력성까지도 비추고 있다.
OLD AND FEAR, DISGUST
영화를 이끌어가는 서브스턴스는 더 나은 나를 위한 활성제다. 라임색으로 빛나는 형광물질은 자연에서 경고를 뜻하는 노란 계통의 색깔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그를 주사하기로 결심한다. 이유는 한때는 빛나고 아름답고 젊던 내가 소비될 수 없는 늙고 뒤처진 여자라는 '탈락' 딱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납작하게도 그런 이유때문에 어떠한 것도 보장되지 않은 서브스턴스를 주사한다. 더 나은 나를 위해.
그러나 '더 나은'의 범위는 철저하게 외형적인 부분에만 한정돼 있다. 더 젊고 더 예쁜 것이 절대적으로 더 나은 나를 보장할 순 없음에도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가 제공하는 왜곡된 개념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엘리자베스가 왜 이렇게 제한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 나타났는지는 영화를 보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평생을 스타로 '소비'되며 살아왔고 이제는 더이상 소비되지 않는 상태로 밀려났다. 그러한 상황을 그녀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에게 노화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나를 이런 꼴을 당하게 만든 원인일 뿐이었다.
그렇게 엘리자베스의 등가죽을 찢고 더 젊고 아름다운 '수'가 태어난다. 카메라는 수의 탄생을 아주 구석구석 훑는다.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 부분부분과 가슴, 엉덩이, 허리, 손끝까지 탐욕스럽게 훑어댄다. 불쾌감을 느낄만큼 수를 구석구석 탐닉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사회의 시선과 동일시된다. 불쾌하고 불편하다면 서브스턴스가 그를 아주 잘 재연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내가 속편히 이 몸으로 환승할 수 있느냐. 서브스턴스는 여기에 함정을 파놓는다. 두 사람은 하나. 예외는 없다. 모체인 엘리자베스가 사라진다면 수는 존재할 수 없다. 두 사람이 독립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 그 이상 지속하게 된다면 부작용인 '변형'이 발생한다. 서브스턴스는 그 부작용에 대해서는 일절 경고하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대가 없는 상은 없다.
수가 자신의 삶을 위해 규칙을 어기면서 엘리자베스의 신체는 그 대가로 훼손된다. 서브스턴스는 '변형'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관객은 훼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변형된 신체는 두렵게 그려진다. 바디호러물이 본능적으로 일으키는 공포감이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손과 비틀어진 손톱, 뒤틀린 무릎.
노화는 가장 기본적인 공포다. 늙는다는 것은 잃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것, 필요 없어진다는 느낌, 마지막, 그런 것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수와 엘리자베스를 교차 배치하고, 엘리자베스가 깨어날 때마다 한층 더 흉측해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객이 저도 모르게 수를 응원하고 싶게 만든다. 서브스턴스는 늙음이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을 숨긴다. 대신 추하고 거부감이 들며 역한 것과 연결시켜 철저하게 노화에 대한 혐오를 재생산한다. 종래는 머리카락도 빠지고 등은 굽었고 여기저기가 함몰된 변형된 엘리자베스의 신체는 급기야 '빌런'처럼 느껴진다.
로알드 달의 '마녀를 잡아라'를 기반으로 했던 니콜라스 뢰그의 영화 '마녀와 루크'에서는 완벽한 인간의 탈을 덮어쓴 징그러운 마녀의 모습이 나온다. 아름다운 한 중년의 여성이 피부에서 마스크를 뜯어내자마자 순식간에 흉측하게 문드러진 몸을 가진 마녀로 변한다. 변형된 엘리자베스의 신체에서도 비슷한 공포가 느껴진다.
관객들의 분열도 여기서 시작된다. 더 어리고 아름답고 활기찬 수를 응원하는 마음과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이전의 아름답고 건강했던 몸까지 잃어버린 엘리자베스가 짠하고 안타까운 마음. 엘리자베스에게 향하는 안타까운 마음은 그 전도 충분히 아름답고 젊었는데, 라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브스턴스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자기혐오에 대한 확장판이다.
엘리자베스가 사랑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은 집합체인 수와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로 이루어진 변형된 엘리자베스. 당신은 누굴 살리고 싶으세요, 무엇이 엘리자베스가 더 행복할까요.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 종료를 누르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You're the only lovable part of me...
MATRIX and ME
서브스턴스는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또 다른 나. 분리된 나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이파이의(Sci-fi) 단골 소스다. 얼마 전에 개봉한 미키17도, 아직까지도 내 인생 영화로 꼽히고 있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역시도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앞의 두 영화들이 또다른 내가 나를 위해 협업하고 서로가 서로의 원형과 모방임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간다면 서브스턴스는 지속적으로 또다른 나를 부정하고 분열하고 급기야는 죽이기까지 하는 다소 급발진적인 영화다.
왜냐하면 서브스턴스는 거울을 보면서 아 여기를 고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여기가 좀 바뀌면 좋을 것 같은데, 여기도, 저기도. 와 같은 소망이 만들어 낸 나에 대한 이야기다. 나와 분리될 수 없고 나와 다르지 않지만 끊임없이 도망치고 싶은 나의 한 부분.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 종료를 멈추고 모든 것을 되돌리려 할 때 둘은 예외적으로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수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엘리자베스에게 지나칠 정도의 적대감과 공격성을 드러낸다. 정말 죽일 듯이 두드려 팬다. 거울 앞에 동시에 선 둘은 모두 피칠갑을 하고 있지만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수는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고 엘리자베스는 두려움과 체념으로 거울을 바라본다. 수가 여러번 엘리자베스를 거울에 처박으면서 둘을 함께 담은 화면이 깨진다.
이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 것도 상징적이다. 나와 '다른 나'를 함께 세워놓은 거울을 깨뜨리며, 엘리자베스를 향한 폭력은 곧 자해의 일종을 깨달을 수 있다. 마지막 수의 펌피럽 킥을 맞고서 엘리자베스는 죽는다. 수는 그렇게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 '나'를 파괴한 순간부터 수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걸.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수는 쇼에 서기 위해 최종 금기까지 어긴다. 일회용으로 안내된 활성제를 다시 자신에게 주사한 수는 너도, 나도, 또 다른 누군가도 아닌 몬스트로 엘리자수로 재탄생한다. 분열되다 만, 혹은 무너지다 만 기이한 공존 속에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생각 외로 침착하다. 파괴와 자해를 멈춘 그녀는 약속대로 라이브쇼에 참석하기 위해 치장하기 시작한다. 몇 가닥 남은 머리를 고데기로 말고, 어딘지도 불분명한 귀에 귀걸이를 꽂는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의 사진을 오려 본드로 얼굴에 붙인다. 엘리자수의 표정은 분명 만족스러워 보인다.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규칙을 어긴 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종말의 끝에 와서야 엘리자베스와 자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무대에 서자 엘리자베스와 수가 여태 겪은 사회의 무분별한 평가와 잣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엘리자수가 최종 변태의 종착지로 가슴을 '낳은 것'은 "이것 봐라 너네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가슴"하고 냅다 던져준 느낌과도 같이 느껴진다.
엘리자수를 살해한 남성은 앞서 제대로 비춰진 적 없는 엑스트라다. 누가 엘리자수를 죽였든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다. 관객석에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했어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엘리자수는 관객 모두에게 시원하게 피를 흩뿌리면서 폭발한다. 일정 수준을 넘어선 고어는 코믹해보이기까지 한다. 킹스맨의 머리 폭죽을 봤을 때와 비슷한 종류의 헛웃음이 터졌다. 하하, 저렇게까지 한단 말이지. 화면을 빨갛게 물들인 피는 이쪽 세계의 관객들에게도 흩뿌려지는 기분이다. 핏빛 분수처럼 흩날리는 피 속에서, 엘리자수의 마지막 유언도 금세 잊힌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전히 나예요!!!!!"
나가기 직전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고, 화장이 이상해서 지우다가 결국은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 쫓기듯 밖에 나가야 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화장을 아무리 바꿔도 내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옷을 아무리 갈아입어도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버릴 수가 없다. 영화를 봤던 주변인들의 대부분이 데이트를 앞두고 수를 보며 입술을 고쳐 바르고, 진하게 그리다 결국은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화를 분출하는 엘리자베스의 장면이 가장 슬펐다고 꼽은 이유다.
상처는, 문제는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이 상처와 문제를 어디에서 받아왔을까. 난 무엇을 위해 똑같은 문제를 되풀이하는 것일까.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비슷한 경험을 겪어본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덩달아 피칠갑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나를 찌르고 있던 자기혐오의 덩어리를 마주보게 된다. 다시 한 번, 이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