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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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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문득 아 내가 뭔갈 두고 온 것은 아닐까 하고 허겁지겁 가방을 뒤지는 기분과 같이 아주 어릴 적, 내가 분명 겪어본 적 있지만 어느새 잊어버리고 없는 분명 존재하는 기억들.


얼마 전에 떠오른 기억은 동화책이었다. 어릴 적 누군가에게 받아 읽었고, 내가 자랐을 무렵에는 또 다른 아이에게 건네졌던 그 동화책 전집.


내 방 한쪽 면은 언제나 책으로 꽉 차 있었다. 동화책은 자라면서 각양각색의 소설로 바뀌었고, 이따금 자기계발서가 끼어들기도 했지만, 지금도 책장의 대부분은 소설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자라기까지는 엄마, 아빠의 큰 지원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 집에는 몇 종류의 동화 전집이 있었다. 새로 사기도 하고, 이미 커버린 어떤 언니의 집에서 물려받기도 했고, 내가 읽기엔 너무 쉬워진 책들은 또 다른 집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마지막 동화책이 집을 떠날 때 엄마에게 그냥 책을 그대로 두면 안되냐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책들은 또 다른 어린이들을 위해 집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내가 동화책을 읽으면서 자랐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런 거다.


그리고 나는 자주 들르던 중고서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돌려받았다. 알라딘에 있는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이라는 서가에서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동화책 '따로와 꿈도둑'을 발견한 것이다. 책 상태가 좋지 않아서 구매를 미뤘더니 지금은 단권으로는 구할 수 없는 책이 됐다. 책 한 권을 위해서 전집을 구매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고민은 잠시였고 나는 전권이 등장하면 무조건 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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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에 동화 전집이 새로운 주인을 구한다는 중고거래 글을 발견했다. 딱 원하던 동화책이 포함된 전집은 아니었지만 두 번째로 좋아하던 동화책 전집과 CD까지 매우 합리적인 가격인 5만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뭐 어떻게 해. 사야지. 판매자 분과 대화 중에 어쩐지 아기엄마라는 오해를 산 것 같지만 해명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 말고 고민은 따로 있었다. 동화책 전집이 생각보다 많은 부피를 차지한다는 거다. 일러스트에 따라 책의 두께나 높이도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지금 있는 책장으론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전집이 동화책 50권짜리이기 때문에 차지해야 하는 공간도 상당하다.


그래도 샀다. 두 번 후회하기는 싫었기 때문에 그냥 사기로 했다. 책이야 이곳저곳에 잘 꽂아두면 되고 공간은 만들면 그만이다. 기다란 상자에 놓인 동화책을 보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옛날에 보던 동화책을 샀다고 이야기했더니 엄마아빠는 그저 웃기만 했다. 커서 이렇게 찾을 줄 알았으면 남 주지 말걸. 찾을 줄 알았나. 하는 멋쩍은 대화도 함께.


예상대로 책장에는 자리가 없어서 동화책은 여기저기에 나눠서 꽂아놔야 했지만 언젠가는 해야 했던 일을 한 느낌이라 마음만은 편했다. 이제 남은 전집 하나만 더 들여오면 임무는 완수다. 비밀이지만 CD를 듣기 위해 CD플레이어도 샀다. (CD플레이어가 전집 구맷값보다 비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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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을 정리하고 난 다음에 한참 동안 가장 좋아하던 동화책들을 들고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읽었다. 늘 함께이진 않아도 어딘가 있다는 점으로도 든든해지는 기분이란 이런 거였지 깨닫는다. 나는 한동안 퇴근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CD를 돌려 들었다.


20페이지 남짓 되는 동화책 내용과 성우들의 목소리까지 선명할 정도로 명확한 기억이었는데 어떻게 잊고 살았을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렇지만 기억난 게 어디냐. 감사하게 다시 가장 좋은 자리에 두고 자주 들여다보면 됩니다.


얼마 지나서는 새로운 책 식구가 들어온 것을 기념해 책장을 샀다. 배송 예정일마다 비가 오는 바람에 배송이 계속 미뤄지고는 있지만 곧 다들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겠지. 내가 쓰는 공간보다 책이 차지하는 공간이 더 많아지게 생겼다. 전집이 든든하게 자리를 차지하면서 순식간에 내가 보유한 책 중 가장 많은 것이 동화책이 됐다.


살다 보면 나는 이런 인간이야 라는 것을 정의하고 싶은 때가 있는데 이번에는 동화에 뿌리를 둔 인간이라고 설명해야 하겠다. 어른 말고 그냥 사람.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이야기에 열광하고 계속해서 각색되는 동화의 시작과 숨겨진 역사들을 찾아다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것이 내 근간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는 어릴 적 읽은 책을 그냥 지나온 시절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안다. 그 이야기가 내 안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동화는 내게 세상을 여는 문이었다. 예전엔 나만이 넘어갈 수 있었던 일방통행이었다면 이제는 그쪽에서도 내 이야기에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게 된 문이 된 건 변화라면 변화다. 아, 영원히 어른이 되기 싫다. 그런 건 돈을 줘도 별로 안 하고 싶다 발버둥치던 마음도 바뀌긴 하나 보다. 웃기게도 동화 전집을 덜컥 사고 나서야 나는 조금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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