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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진다, 살아간다 - 도서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

후회와 함께 살아가는 법에 관하여, 마이라 칼만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

by 전지영 에디터
2026.10.0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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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를 직면하지 않고 싶은 마음


       

      하루의 끝에 일기를 쓸 때 주로 어떤 내용을 쓰는지, 이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타인과 세상에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일기장에 필터링 없이 쏟아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삭여지지 않는 슬픈 마음을 기록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유형이냐면, 하루 중에서 좋았던 일을 고르고 골라 쓴다. 여느 보통의 날과는 다른, 특별한 일이나 기분 좋은 일을 적는다. 긍정적인 이야기와 부정적인 이야기, 일기 내용을 두 가지로 거칠게 나눈다면 전자의 이야기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인 셈이다.


      부정적인 일은 오래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은 일이라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순간의 감정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쓰지 않아도 도저히 잊히지 않는 기억과 감정이 있다. 내게는 특히 후회스러운 일이 그렇다. 후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찾아와 머릿속을 쉽게 잠식한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다른 방법을 택했더라면,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그 상황을 마주했더라면에 대한 수많은 가정들을 떠올려본다. 부질없는 일임을,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후회에 휘둘리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어떻게 하면 이 감정을 조금은 잘 다룰 수 없을까.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미국의 유명 예술가  마이라 칼만의 책으로, 이 책의 원제는 ‘Still Life with Remorse’. 직역하면 ‘후회를 곁들인 정물화’이다. 이 책의 도입에서 저자는 후회를 ‘수치심, 죄책감, 슬픔을 수반하는 감정’이라 정의하며, “정물화와 실내화 속에는 사물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회한이 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그의 그림 51점과 에세이가 담겨 있으며, 칼만 자신의 가족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도 여러 편 등장한다. 어느덧 노년에 이른 저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 삶 속에서 마주한 후회의 감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것을 품은 채 어떻게 삶을 이어가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을 한정원 시인이 번역했다는 점도 반가웠다. 에세이 《시와 산책》에서 만난 그의 문장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문장을 옮기는 시인의 언어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을 읽는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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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를 도려내지 않아도


       

      책에는 칼만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그에게 영향을 미친 여러 사람의 삶이 등장한다. 사랑하기 어려웠던 아버지와의 관계,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기억, 사랑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톨스토이 부부, 그리고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브람스의 이야기 등이 짧게 교차한다. 칼만이 직접 겪은 기억과 오래전 사람들이 남긴 삶의 흔적, 때로는 그가 만들어낸 상상이 한데 섞여 흘러간다.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글 속 장면을 순간 포착한 듯한 그림들이 있다. 내게는 그것이 후회스러운 일을 떠올릴 때 유독 어떤 한 장면만 사진처럼 선명해지는 기억의 방식과 닮아 보였다. 칼만은 후회를 느끼는 상황과 순간을 외면하기보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자신만의 색채로 다시 그려낸다. 정물화와 실내화 속에는 사물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회환을 숨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그림 속 사물들 사이에 어떤 기억과 감정이 남아 있을지 상상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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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완벽하다.

      (...)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고

      더 이상 할 말은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

      모든 이가 무력감에 휩싸여 있다.

      두터운 무력감의 장막이

      지구상의 모든 이를 덮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가 삶을 이어간다.

      모든 이가 절망을 재고한다.

      모든 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모든 이가 삶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_〈모든 것〉(118~123쪽)

       

       

      칼만이 거듭 말하는 단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부정적인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거듭된 후회의 감정을 깨끗이 도려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사랑했던 이를 증오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과의 빛나던 한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돌이키고 싶은 실수를 했더라도 그 뒤를 수습하고 나아가는 일은 여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과거조차 나의 일부이다.


      나는 가끔 길을 걷다, 자기 전에, 어떤 물건을 보거나 특정한 말을 듣고 과거의 어느 수치스럽고 민망하고 잊고 싶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을 마주한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도 지우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있었기에 나는 과거의 후회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오늘 있었던 좋은 일을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일기에 적는다. 어떤 과거든 그 과거를 가진 채로도 다음 날로 넘어갈 수 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칼만만의 방식으로 담담하면서도 다정하게 알려준다.




      현재를 견디기 힘들 땐, 다시 과거로



      이 책에는 수많은 유명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화자 ‘나’가 프란츠 리스트에 전화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다(나는 이 화자를 마이라 칼만 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전화를 건 칼만은 슈만 부부 집에서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으며 멘델스존의 안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슈만 부부의 집에서 로베르트 슈만, 클라라 슈만, 브람스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나는 우정과 화기애애함으로 한껏 고조되어 집으로 왔다(47쪽)”이라고 말한다.


      칼만은 이들과 동시대 사람이 아니다. 리스트에게 전화를 걸고 슈만 부부와 저녁을 먹는 장면은 칼만이 만들어낸 허구다. 그런데 그 장난스러운 상상은 어느 순간 칼만의 현실로 이어진다. 실제로 로베르트 슈만은 마흔여섯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고, 클라라는 계속 그의 삶을 살았다. 연주를 멈추지 않았고 가족을 돌보았다. 이들의 삶에 관해 칼만의 가족들은 “클라라가 계속 나아갔다면 그 누구든 계속 나아갈 수 있다.”(48쪽)라는 말을 했다.

       

      이 글에 붙은 이름은 “지금은 충분하지 않아. 나는 과거를 원해”이다. 글의 제목과 칼만의 가족이 말한 클라라에 관한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고 보면, 칼만은 때때로 과거의 사람들에게서 현재를 살아갈 힘을 빌려오는 것은 아닐까.

       

      책을 펼치기 전의 나는 후회라는 감정에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과거는 되도록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칼만의 이야기를 읽고, 부끄럽고 미숙했던 나의 과거를 조금은 다르게 마주하게 되었다.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도, 뱉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말도, 얼굴이 뜨거워지는 순간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기억들이 지금의 삶까지 망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돌아가 고칠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때로는 현재를 살아갈 힘을 빌려올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삶은 어둡고,

      봄은 여기 와 있고.

      새들은 노래한다.

       

      _〈카프카와 말러〉(53쪽)

       

       

      이제는 일기에 고르고 골라 좋은 일만 적기보다, 간혹 후회스러운 일을 적어도 괜찮을 것 같다. 기록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 일을 오래 붙들어두겠다는 뜻만은 아닐 테니까.

       

      삶의 어두운 부분을 마주한다고 해서 지금의 삶까지 함께 어두워지는 것은 아니다. 어두웠던 순간을 적어둔 페이지를 넘긴 뒤에도 봄은 오고, 어딘가에서 노래하는 새를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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