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며 디자이너인 마이라 칼만의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작가 자신의 내밀한 가족사와 그녀의 삶을 스쳐 지나갔던 각국의 인물들에 대한 개인사를 겹쳐 놓음으로써 슬픔이라는 감정의 원형을 담담한 어조로 그린다. 슬픔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 속에서 저마다의 얼굴로 돌출되는 까닭에 우리에게는 좀처럼 '슬픔의 원형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와 같은 질문을 던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슬픔의 얼굴이 짓는 표정은 항시 슬프기만 한 것일까?
이것이 우리가 가능-확률적 후회 시제라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났을지도 모를 재앙에 대해 사후에 겪는 고통.
우리 집안에서는 이 시제가 아주 빈번히 쓰였다.
매일. 아니 매시간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인 '회한'은 위의 진술과 같이 고통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회한의 고통이 매일, 아니 매시간마다 얼굴을 들이미는 환경 속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슬픔의 얼굴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슬픔은 뭉뚱그리기 쉽고, 여타의 얼굴과 혼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족이 매일같이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얼굴은 어떠했을까. 크게 다를 수 있었을까? 아마도 날마다 슬픔에 잠식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자신이 느끼는 것의 정체가 슬픔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도 슬픔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것은 슬픔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슬픔의 원형을 모르기에 그것이 슬픔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그러고는 긴 침묵)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심지어 그 독하다는 전갈자리 여자조차!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이었다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
- 「슬픔의 진화」, 심보선
시의 마지막 질문은 마이라 칼만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과 동일한 맥락 속에 놓인다. 회한의 무거운 짐을 떨쳐낼 방법이 무엇일지 묻는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른다며 그저 노래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영원한 침묵과 대조되는 또 하나의 방법일까. 혹은 그것마저도 침묵 속으로 용해되는 운명에 처한 몸부림에 불과한 것일까.
언어에 세계가 빠져있다는 것은 해당 언어를 통해서는 도무지 나와 너의 세계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환치된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적당히 측량하여 그에 걸맞는 상황과 조건 등을 예거하는 일에 낯설지 않다. 그러나 심보선과 마이라 칼만은 서로의 세계에 대해 영영 알 수 없다. 그저 서로가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을 살며시 내놓을 뿐이다. 어디로 내놓는 것인가. 그것은 방에서 조용히 장기 투숙하고 있는 책상이다.
또는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좋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슬프고 절망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슬프고 절망적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가 절망을 재고하고 삶을 즐기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에서 '모든 이'로 확장되는 순간에 슬픔은 다시금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층위로 회귀한다.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에서 언급되는 인물들, 이를테면 카프카와 체호프, 스탈린과 레닌, 보들레르와 랭보를 한데 모아 그들의 슬픔을 헤아릴 때면 그것은 '모든 것'에서 멈춘다. '모든 것'은 우리가 적당히 그려 보고 납득할 수 있는 선에 위치한 슬픔과 아름다움이다. 완벽하고 좋으며 슬프고 절망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오직 그만의 질문이다. '모든 이'에 속하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의 질문이며 답이다.
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일까?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책을 덮고 홀로 내밀한 상상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슬픔을 끌어안은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수 있다. 마이라 칼만이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 속에 새겨 넣은 51점의 정물화를 유심히 들여다보자. 유난히 많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그 밖의 가구가 등장한다. 과연 나는 그 많은 가구 중 어떤 가구로 진화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