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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상하리만치 몇 번이고 반복해서 찾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그 리스트에 있는 영화 중에서도 유달리 자주 접하게 됐던 영화로 예전부터 여러 영상 매체나 영화 평론을 다루는 매거진에서 수차례 소개해 왔음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대학교 수업에서 심심찮게 등장했던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다. 평소 종교를 테마로 삼는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나로서는 그토록 <밀양>을 여러 번 접하게 되었던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유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놀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를 서너 번 정도 방문했던 것을 제외하면, 나는 기독교는 물론이거니와 타 종교인들과 어울릴 기회조차 없었던 비종교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종교 영화와도 거리가 먼 사람으로 지금껏 살아왔는데 그것은 특정 종교 내지 종교적 세계관 자체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었다. 하나의 종교를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의 교리를 알아야 하며 또한 종교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성경이나 코란과 같은 경전에 있다. 성경을 한 번도 통독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결코 내가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것과 관련된 내용을 접해도 내가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드시 구체적인 종교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종교를 다루는 그 모든 매체는 수용자로 하여금 미묘하게 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단정적인 이미지들을 구축하게 하는 힘을 전달하고, 그러한 이미지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종교 너머에 있는 조금은 다른 생명의 장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밀양> 또한 누구에게나 그러한 경험의 일환일 것이라고 오연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것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생명과 죽음의 이미지가 개개인에게 어떠한 메시지로 나타나는가를 매번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밀양>은 그동안 수많은 평론가들에게 다각도로 조명되고 각각의 해석의 틀이 제공되어 온 영화지만 이번에는 이신애와 하나님의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양분해 보면 어떨까. 그러나 그 둘 중 무엇을 먼저 말하더라도 우선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둘의 관계는 이율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신애라는 인물이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관계를 가졌던 것도 아니고 영화 초반부만 보더라도 이신애는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인물일 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떤 특정한 신념과 가치관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어느 시점부터 이신애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율배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신애가 아들 준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작중에서 김 집사라고 나오는 약사와 이신애 간의 대사를 생각해 보자. 초반부에 이신애가 남편을 잃고 밀양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약사는 당신처럼 불행한 여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이 꼭 필요하다며 자신이 다니는 교회 책자를 건넨다. 중반부에는 아들을 잃고 괴로워하는 이신애에게 별것 아닌 듯 보이는 햇빛 하나에도 주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이신애 입장에서는 마치 자신을 조롱하고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가지고 빈정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이신애라는 인물에 몰입하여 그녀의 감정을 공감하고 있는 관객으로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약사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가정함으로써 그녀의 말에 진심 어린 위로와 사랑이 담겨있다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며 공감이다. 그러나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신애가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이 신애는 이율배반의 관계에 놓인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신애가 겪은 고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신애가 문득 부흥회에 들어가 목사 앞에서 목놓아 절규한 후부터 믿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신애가 교도소에서 살인범을 만나고, 기절하고, 자해하고, 하나님께 원망과 배신감을 느끼는 시퀀스보다도 아들의 시체를 목격한 장면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교도소에서의 장면도 결국 치유가 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것이다. 결국 이신애가 보기에 정작 치유가 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살인범이었고 이 신애는 그것을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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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치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신애가 왜 기어코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면회를 하러 갔는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다른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교리를 따르지 않아서 이신애를 말린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스스로를 신실한 기독교인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를 믿는 목적은 당장의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내지 치유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아마도 그들의 목적은 천국일 것이다. 그러나 이신애는 다르다. 본인 입으로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치유가 되고 새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본인 스스로조차 정말 치유가 된 것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교도소를 찾아가 살인범을 용서함으로써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치유가 됐음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만약 그 자리에서 살인범이 이신애에게 무릎 꿇고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아직 본인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 버렸다는 사실을 부정의 하다고 느끼는 이신애의 마음은 진실일까? 그가 지옥에 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을까? 이신애는 교도소에서의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평생 치유되지 못한 채 괴로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치유됐다는 맹신과 합리화에 빠져 평생을 위태롭게 살았을지 모른다. 그것은 이신애가 겪은 고통이 종교로 치유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작중 어떤 시점부터 하나님과 이신애의 관계를 이율배반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것은 대부분의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처럼 교도소에서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신애가 하나님께 의심을 품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이신애가 보인 태도는 의심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하나님이 정말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정말 분명한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로 계시든 아니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하는 식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신애가 하나님을 만나고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신애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신애는 하나님께 자신의 원망과 분노의 감정을 담아 소리친다. ‘사실 신은 없구나’가 아니라 ‘이 신은 내가 바라던 신이 아니구나’인 것이다. 자신이 믿고 순종하는 신은 결코 이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진정으로 기독교에서 죄악시하는 ‘의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의심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후 영화는 지속적으로 이신애가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과 의구심을 표출하는 장면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는 사실 신과 인간의 충돌이라는 형이상학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관객은 물론이고 작중 인물 그 누구도 이러한 생각을 가질 거라고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혹은 기독교에 빠져있는 인물들뿐이다. 소위 무신론자들은 그것이 형이상인지 형이하인지 관심이 없고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형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당장의, 현실의 하나님인 것이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가시적인 그 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이신애에게는 당장 해결하지 않고서는 미칠 것만 같은 아주 치열한 현실의 문제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이신애의 모습이 하나님의 눈에는 참으로 괘씸하고 당혹스러우며 우스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만물에 깃들어 있는 주님의 뜻은 항상 제자리에 있었고, 움직이고 변화한 것은 이신애 한 명뿐이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혼자 찬양하고, 너무 절망스러워서 혼자 저주하는 인간 한 명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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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은 작중에서 몇 번이고 지명인 밀양의 의미를 이신애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말해준다. 비밀의 햇볕. 비밀이라는 것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보이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어쩌면 신은 김종찬(송강호)의 모습으로 이신애에게 온 것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이신애의 곁을 맴도는 인물이 김종찬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신애가 그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고 또 알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비밀이기 때문이다. 왜 꼭 비밀이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남편이 죽고 뒤이어 아들이 죽는, 한 여자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삼켜내는 그 순간부터, 그 고통이 하나님의 의도와 주님의 뜻이던지 아니던 상관없이, 하나님과 이신애의 관계는 도저히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율배반에 놓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신애로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더욱 큰 고통이 돼버린 것이다.

 

카뮈는 종교를 믿는 것은 철학적 자살이라고 말했다. 이신애는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해 손목을 긋는 자해 행위를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죽지 않았다. 사실 죽지 않은 것은 그녀의 육신이다. 물리적 실체가 죽지 않은 것이다. 죽은 것은 그녀의 영혼이고 정신이다. 그녀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되어버릴 것이다. 또한 이신애는 심지어 종교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종교를 믿는 것 자체를 논할 것이 아니라, 이제 이신애를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가의 층위로 논의를 옮겨가야 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신애가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르는 장면은 자신의 사념 따위를 떨친다거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죽은 영혼을 스스로 바라보면서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가? 그녀는 어째서 자살을 하지 않는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여전히 있기 때문인가? 그것을 고민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졌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이신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며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과 정신이 이미 죽어버렸음을 확인하고도 자신의 육신만을 이끌고 나가는 생물은 이미 생사의 문제에 놓여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러한 까닭에 <밀양>은 단순히 반기독교적인,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영화가 아닐뿐더러 영화의 전반적인 주제를 기독교로 삼고는 있으나 종교 영화로 분류되기 어려운 영화이며, 당연하게도 영화의 초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가 아니라 이신애에게 놓여있다. 영화 속에서 종교는 일종의 장치이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한 인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언제나 확실한 것을 요구하는 세상과 주변인들 속에서 이신애는 적어도 그녀가 깨닫게 된 반항으로, 그녀의 의지대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녀 자신조차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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