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이라는 말은 꽤 낙관적으로 들린다. 데이비드 댐로시는 세계문학을 작품이 번역을 거쳐 국경을 넘고, 그렇게 움직이면서 오히려 가치를 얻는다는 매끄러운 흐름을 주장한다. 그런데 비서구의 작은 언어로 쓰인 글이 글로벌 영어라는 거대한 공간으로 들어갈 때, 그 흐름은 그닥 매끄럽지 않다. 시장은 지역의 고유함을 누구나 소비하기 좋은 상품으로 평평하게 다듬으려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의미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에밀리 앱터가 '번역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맞선 것도 이 지점이다.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감정이 겹겹이 배어 있는 의미는 다른 언어로 그대로 옮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강의 『흰』과 데버라 스미스가 옮긴 『The White Book』은 이 질문을 들여다보기 좋은 자리다. 그중에서도 나는 '배내옷'과 '강보', 영어판에서는 ‘Newborn gown’과 ‘Swaddling bands’가 된 두 편에서 가장 큰 괴리를 느꼈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아기, 작가가 끝내 만나보지 못한 언니에 대한 이 두 글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가치관, 그리고 흰색에 담긴 우리의 얼을 배경으로 읽을 때 훨씬 가깝게 다가온다. 그래서 한국어로 먼저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영어판을 나란히 펼쳐 무엇이 남고 무엇이 빠져나갔는지, 그리고 번역이 오히려 무엇을 새로 열어주었는지를 함께 보고 싶었다.
흰은 색이 아니다

『흰』에서 '흰'은 단순히 색을 꾸미는 형용사가 아니다. 그것은 염색하지 않은 재료가 지닌 본래의 빛, 소색(素色)에 가깝다. 우리에게 흰색은 깨끗해서 좋은 색이라기보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상태의 색이다. 천이 무언가를 거치기 전,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다. 서구에서 흰색이 밝음이나 순결처럼 무언가를 더한 의미로 읽힌다면, 한국의 무색은 그 무엇도 얹지 않은 본래의 상태 쪽에 서 있다.
흰색이 한국인에게 특별한 색이 된 것도 그래서다. 천을 물들이는 일은 값비쌌고, 염색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은 물들이지 않은 무명옷, 그러니까 흰옷을 입었다. 스스로를 백의민족이라 불렀던 기억은 흰색을 좋아했던 취향의 기록이라기보다, 계층을 넘어 모두가 같은 천을 입고 살았던 시간의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한강이 흰 것들에 대해 쓸 때, 그것은 중립적이거나 추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한 공동체의 역사가 통째로 배어 있는 색이다.
한국어는 이 흰빛을 다시 여러 갈래로 나눈다. 하얀, 허연, 희멀건처럼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고 물기를 머금기도 한 흰빛들이 각자 다른 감각을 품는다. 더 흥미로운 건 이 말들이 문장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이다. 영어의 ‘white’는 명사 앞에 붙어 그 사물의 속성을 알려주는 이름표에 가깝다. 반면 한국어의 색채어는 서술어로 쓰이며 하나의 상태를 그린다. 하얗게 빛난다, 희디희다처럼 거의 동사처럼 움직이며, 사물에 붙은 성질이라기보다 그 사물이 놓여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래서 이 모든 흰빛이 영어에서 하나의 ‘white’로 옮겨질 때, 사라지는 것은 단어의 개수만이 아니다. 몸으로 느끼던 흰빛이, 페이지 위에서 읽는 흰색이 된다. 앱터가 말한 번역 불가능성이 단지 빠진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한 언어가 세계를 보는 방식의 문제라는 것도 여기서 분명해진다. 옮겨지지 않는 것은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 뒤의 세계관이다.
배내옷과 수의 사이

이 책의 중심에 놓인 물건들, 배내옷과 강보는 삶과 죽음 사이의 얇은 문턱에 걸쳐 있다. 한국의 전통 장례에서 갓난아기가 처음 입는 옷과 죽은 이가 마지막으로 입는 수의는 같은 표백하지 않은 흰 천으로 지어졌다. 아기를 감싸는 천과 망자를 감싸는 천이 같은 천이었던 것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태어남과 죽음을 서로 반대편에 놓지 않고, 같은 곳에서 나와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순환으로 보는 세계관이 그 천 안에 들어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죽었다'보다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끝나는 일이 아니라 처음 왔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3부에서 화자는 아버지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를 묻는 장면을 떠올리며, 아기를 감쌌던 강보를 수의와 나무 관에 겹쳐 본다. 이 장면에서 탄생과 죽음은 같은 시각의 평면 위에 놓이고, 시간은 기억 안에서 하나로 접힌다. 이소현은 이것을 '크리스털 이미지'라고 부른다. 한강이 새로 지어낸 은유가 아니라, 이미 그 물건들 안에 들어 있던 겹침을 꺼내 보인 것이다. 그런데 영어판에서 이 단어들이 ‘swaddling clothes’나 ‘white’ 같은 일반적인 말로 옮겨지는 순간, 이렇게 촘촘하게 얽힌 의미의 그물은 무게를 잃을 수밖에 없다. ‘swaddling clothes’는 그저 아기의 물건이다. 그 안에는 죽음도, 순환도, 돌아감도 없다.
조산과 premature 사이

두 판본을 나란히 읽다 보면, 언어의 구조 차이가 몸의 주체와 감정의 결까지 조용히 바꿔놓는다는 걸 알게 된다. '조산'은 아이를 일찍 낳는 일을 산모의 자리에서 말하는 단어다. 진통을 겪고,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이 주어다. 그런데 영어의 ‘premature’는 시선을 아기 쪽으로 옮겨, 의학적으로 진단되는 상태로 만든다. 그 사이에서 엄마의 경험은 조용히 빠져나간다.
'탯줄'도 그렇다. 태(胎)와 줄이 붙은 이 단어에는 이 책이 계속 붙드는 연결과 모계의 감각이 그대로 들어 있다. 한강은 앞서 아직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고 쓰는데, 그래서 탯줄이라는 말이 나타나는 순간 이미 그 문장이 메아리친다. ‘umbilical cord’는 해부학적으로는 정확하지만 아무것도 되울리지 않는다. 그 관계를 중립적인 생물학 용어로 납작하게 만들 뿐이다.
감각의 결도 영어로 건너가며 조금씩 넓어진다. 달떡은 설명적인 ‘crescent-moon rice cake’가 된다. 눈, 코, 입을 하나하나 짚던 말은 ‘features’라는 추상어로 줄어든다. 원문에서 그 나열은 엄마가 아기의 얼굴을 말로 하나씩 만져보는 일에 가까운데, 한 단어로 묶이는 순간 그 손길이 사라진다. 여리고 연약한 '아기'도 좀 더 넓은 ‘child’로 바뀐다. 하나하나는 작은 차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원문의 몸이 영어판에서는 조금 멀어져 있다.
소리의 결도 마찬가지다. 강보에서 싸여 있다와 쌓이다는 소리가 겹치며 두 의미를 동시에 품고, 몸과 몸 사이 같은 구절은 운율로 서로를 받아준다. 이런 소리의 놀이는 영어의 구조 안에서 그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스미스는 이 세부를 하나하나 붙잡는 대신, 글 전체가 지닌 이미지의 호흡과 정서의 결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소리값을 내려놓고, 대신 분위기를 끝까지 끌고 가는 선택이다.
죽지 마라 제발

그렇다고 번역이 잃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번역은 다른 언어의 독자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장면은 어머니가 죽어가는 아기에게 되풀이해 말하는 "죽지 마라 제발"이다. 종교도, 신도 없다. 추운 계절 홀로 아이를 낳은 엄마가 그 말을 계속 되뇔 뿐이다. 스미스는 이 문장을 ‘For God’s sake don’t die’로 옮기고, 그것이 주문처럼 반복된다고 덧붙였다.
원문에는 없는 신을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이 번역은 원래의 세속적인, 혹은 애니미즘적인 맥락에 서구 신학의 틀을 얹은 셈이다. 그런데 ‘Please don’t die’처럼 그대로 옮겼다면 '제발' 안에 담긴, 목구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절박함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스미스는 영어에서 가장 감정이 실린 표현 가운데 하나를 골라, 한 어머니의 고통을 다른 언어의 독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애도의 말로 옮겨놓았다. 단어는 옮기지 못했지만 감정은 옮겼다. 덧붙인 '주문처럼'이라는 말도 흥미롭다. 신을 부르는 문장 뒤에 붙은 이 말이, 오히려 종교와 상관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원문의 리듬을 되살려낸다. 잃은 것을 다른 자리에서 조금 되찾아온 셈이다.
물론 글로벌 영어가 중립적인 매개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언어 사이의 비대칭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스미스는 그 비대칭 안에서 순진하게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수전 바스넷이 말했듯, 번역은 단어를 하나하나 베끼는 수동적인 일이 아니라 다른 맥락 안에서 다시 짓는 창조적인 일이다.
제목도 마찬가지다. 한국어는 압축된 모호함과 시적인 여백을 품을 수 있는 언어지만, 영어는 간결하고 분명한 쪽을 선호한다. 한 글자뿐인 '흰'은 영어에서 ‘The White Book’이 되면서, 형용사였던 흰이 하나의 명사이자 주어로 선다. 외국 독자에게 흰은 책 전체를 감싸는 하나의 존재로 먼저 다가가게 된다.
번역되지 않는 자리에서
『흰』과 『The White Book』을 함께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어떤 언어도 세계의 문학을 온전히 소유하거나 빈틈없이 옮길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완벽하게 같은 의미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같은 언어 안에서도 같은 글을 똑같이 읽는 두 독자는 없다. 번역은 늘 불완전하고, 무언가를 잃는다.
앱터가 말한 번역되지 않는 잔여는 분명히 거기 있다. 흰빛의 스펙트럼, 백의민족의 기억, 같은 천으로 탄생과 죽음을 잇는 세계관, 조산 안에 있던 엄마의 자리는 영어로 온전히 건너가지 못했다. 그러나 바스넷의 말도 맞다. 스미스는 잃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핵심을 건너보내기 위해 능동적으로 선택했다. 내가 이 두 편에서 흥미롭게 본 것은, 두 이론이 서로 부딪치는 게 아니라 같은 번역의 같은 순간에 함께 일어난다는 점이다. 앱터는 무엇이 사라지는지를, 바스넷은 무엇이 만들어지는지를 말한다. 같은 과정을 다른 쪽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번역 불가능성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면서도, 결국 그것을 건너 세계의 독자에게 닿았다. 번역되지 않는 잔여는 이 책의 유통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낯섦이 세계의 독자들이 이 책을 붙잡게 만든 이유의 일부가 되었다. 번역의 가치는 바로 그 틈을 건너가는 데 있다. 하얀과 허연과 희멀건을 하나의 white로밖에 옮길 수 없는 자리에서도, 한 어머니의 '제발'은 다른 언어의 주문이 되어 누군가에게 닿는다. 깊이 한 곳에 뿌리내린 이야기가 다른 언어의 독자에게 건너갈 수 있는 것은, 번역이 그 번역되지 않는 자리를 끝까지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한강. 『흰』. 난다, 2016.
Han Kang. The White Book. Translated by Deborah Smith. London: Portobello Books, 2017.
Apter, Emily. Against World Literature: On the Politics of Untranslatability. London: Verso, 2013.
Bassnett, Susan. “From Cultural Turn to Translational Turn: A Transnational Journey.”
Damrosch, David. What Is World Literatur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