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얗게 웃는다 [도서/문학]

한강 <흰>
글 입력 2022.09.0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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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오월,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를 펴낸 한강 작가는 이민 가방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연고도 없는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났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줄곧 생각해온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소설 <흰>에 대한 이야기다.


흰 것에 대한 목록을 나열한 뒤에 들었던 의문은 이 목록들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였다. 나열된 단어들은 언뜻 보면 한데 모아둔 예쁜 조약돌처럼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라고 말했다.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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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것에 대한 초고를 닦기 전에 펴낸 도서가 '소년이 온다'였다. 앞서 민주화 항쟁이라는 잊어서는 안 되는 어두운 과거를 다뤘기에 죽음과 추모는 낯설기만 한 감상이 아니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와 거기 덮을 흰 거즈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연고와 거즈는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일이 될까. 그것은 현재 말하고자 하는 '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과거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도시가 완벽하게 무너지고 칠십 년이 지나 재건된 도시를 걷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은 벽 앞에 초를 밝히고 저마다의 넋을 기렸다. 그러나 나는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마음을 잘 알지 못했다. 현대에 이르러 뉴스를 통해 또는 분향소를 찾아 애도를 표하거나 슬픔을 나눴지만, 오래도록 애도하는 마음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다.


 

어떻게 하셨어요, 그 아이를?

스무 살 무렵 어느 밤 아버지에게 처음 물었을 때, 아직 쉰이 되지 않았던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겹겹이 흰 천으로 싸서, 산에 가서 묻었지.

혼자서요?

그랬지, 혼자서.

 


'나'에게는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아서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가 있다. 준비한 배내옷과 어울렸던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이. 그에게 흰 것은 백지의 텅 빈 새하얀 바탕이었고 강하고 맑은 생명력이었다. 하얀 숨을 가파르게 내쉬던 아이는 눈처럼 하얀 강보에 꼭꼭 싸여 그렇게 갔다.


죽지 마라, 죽지 마라.


'나'의 어머니가 죽은 언니를 품에 안고 말한 것은 주문일 것이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음을 예감하게 되는 순간은 과연 몇이나 될까.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고 강보가 관이 되었다. 인간은 유한하기에 어쩌면 죽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느껴본다는 구절에서 나는 다시 한번 삶의 태도를 돌아본다.


'나'에게는 죽은 언니의 인생 보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따져볼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연고와 거즈를 바르고 덮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계속 기억하는 것에 있다. 죽지 마라. 살았으면, 바랐던 어머니의 몸짓과 마음을. 산에 홀로 묻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침묵을.




나만의 목록을 만들어보았다


 

*

고양이 발톱

마스크

소금

흰죽

새치 염색

감기약

영가 등

*


'흰'을 읽자마자 영가 등이 떠올랐다. 나의 엄마가 매년 조계사라는 절에 방문하여 올리는 영가 등이었다. 내게 절은 향냄새와 절 밥으로 기억되었고 형형색색의 연등 행렬을 연상시키는 석가탄신일과 같은 특별한 행사의 전부였다. 어느 날 엄마는 어릴 적 죽은 남동생이 있음을 고백했다. 엄마의 엄마를 위한 연등을 다는 줄로만 알았는데,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동생의 부재는 오랜 세월 가슴에 그리움으로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3년 전, 외조모상을 당했을 때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엄마는 유골함을 발견하곤 아이처럼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한 줌이 되어 버렸네. 엄마는 어느새 나보다 한 뼘이나 키나 줄었고 나는 그 말이 슬퍼져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할머니를 위해 연등을 달았다. 흰색 빛을 은은하게 발하는 연꽃 등. 고통을 잊고 다시금 자유로운 세상에서 새로이 태어나길 기원하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흰 유골 가루를 뿌렸던 엄마는 흰 연등을 달았다. 까만 밤하늘을 수놓는 연등 행렬과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엄마. 이제부터 그들을 위해, 그리고 엄마를 위해 기도하려 한다.

 

 


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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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흰'을 주제로 열린 전시가 있었다. 2년 만에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최되었던 시오타 치하루의 개인전이다. 아쉽게도 지난달 8월에 갈무리되어 다음 기회를 노려보아야 할 테지만 인간의 유한함과 삶의 지속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전시였다. 일본은 특히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운명론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많고 이는 '흰'을 강조하는 우리 정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하얗게 웃는다.'


위 표현을 일컬어 우리의 모국어에만 존재하는 웃음이라고 말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물론 인간은 끝없이 훼손되고 끝없이 더럽혀질 수 있지만 언제나 끝없이 그 위에 다른 윤곽선을 그리고 다른 색을 칠해볼 수 있는 '흰'의 차원이 있다고. 그 '흰'의 차원에서 살아남기를 선택한 자들이 삶으로부터 내팽개쳐질 수 있는 만큼 그와 반대로 죽어가는 타인에게 온 힘으로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고.

 


우리는 그 '흰'의 차원에서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죽어가고 있거나 혹은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남겨진 타인들을 온 마음으로 기억하기 위하여 애쓸 것이다. 앞서 아기의 배내옷이 수의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두 시간만에 숨을 거둔 아기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인간은 언제나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 우리는 '흰' 차원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의미를 늘 껴안고 살아갈 것이다.

 

고열을 넘나들며 엄마가 끓여주었던 흰죽과 입이 썼던 감기약, 조문 후에 뿌렸던 소금, 새치 염색을 그만둔 아빠, 마스크 안으로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기억하고,


밝게 빛나던 연꽃의 의미를 잊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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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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