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

본 오피니언은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흰.jpg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흰』을 읽게 되었다. 한강 작가님의 작품은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마침 우리 집 책장에 『흰』이 있어 펼쳐보게 되었다.

 

이 책은 작가가 태어나지 못한 언니를 기억하며, 그녀의 삶을 상상 속에서 재구성하며 쓴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이 반드시 작가 자신은 아닐 수도 있다. 『흰』에서는 주인공이 한강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강 특유의 모호한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기법이 돋보인다.


나는 이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끝까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흰'의 의미: 흔적과 상실


 

『흰』에서 '흰색'은 단순한 색상이 아니다. 삶과 죽음, 기억과 상실, 순수와 공허를 아우르는 깊이 있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흰색의 요소(눈, 우유, 뼈, 달, 소금, 천, 죽은 아기의 피부 등)는 각기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공통적으로 ‘무언가의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 쓰인다.


보통 우리는 흔적이 '검은색'이나 '자국'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강은 반대로 '흰색'이 흔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흰색은 무언가를 덮어버리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들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게 만든다. 눈이 내리면 세상이 하얗게 덮이지만, 우리는 그 아래 있던 풍경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기억과 고립: 도망쳐도 피할 수 없는 것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지난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주인공이 외국의 낯선 도시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혼자 있을수록 잊으려 했던 것들조차 더 생생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현실에서 도망칠 방법은 없으며, 오히려 더 깊이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일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하지만 가끔은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자신이 어디에 있든 결국 자신만 온전하면 모든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을 잘 아는 것만큼 강한 무기와 장점이 있을까?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ㅡ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파도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파도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계속 이어지는 것 같지만, 같은 순간은 단 한 번도 반복되지 않는다. 이 구절을 읽고 있으면, 모든 것이 찰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사라지는 순간 속에서도 우리는 그 순간을 붙잡고, 느끼고, 기억하려고 한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지만, 사라지기 전까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삶이 되고, 그 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진다.

 

 

 

이야기를 마치며


 

["그러니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이 구절은 공존할 수 없는 두 세계, 즉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어둠(죽음)과 빛(삶), 이 두 개가 교차하는 순간에만 '나'와 '당신'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현실에서는 함께할 수 없지만, 꿈이나 기억에서는 가까스로 마주할 수 있는 둘. 우리는 잃어버린 존재를 완전히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는 죽은 사람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채, 그들과 만날 수 있는 '틈'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