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는 만화 중 상당수는 옴니버스 구성을 취한다. 하나의 메인 스토리가 있지만, 그 안의 작은 또 다른 이야기는 서로 연관성이 없다. 이러한 구성은 새로운 팬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도 한다. 만화 《명탐정 코난》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연재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지속적으로 팬들이 생겨나고 오랫동안 챙겨 보지 않던 팬들도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도 옴니버스 구성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탐정 코난》을 좋아하는 팬들은 꼭 옴니버스 구성이라서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어디까지나 '진입 장벽'을 낮춰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 작품의 실질적인 인기는 작품성과 캐릭터성,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 등 실질적인 작품 속 진행 상황을 따라간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몇 가지의 만화 중, 나는 특히 《명탐정 코난》과 《스파이 패밀리》를 좋아한다.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석이 많은 이 두 만화는 일본 현지는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두 만화의 공통점은 무엇이길래, 두 만화의 어떤 요소가 이러한 인기를 끌고 있는 걸까?
추리물과 첩보물, 판타지가 없는 세계관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판타지성을 띄고 있는 만화와 판타지성을 갖고 있는 만화지만 그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만화, 그리고 거대한 흑막과 주인공들의 비밀까지. 두 만화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거대한 서사 위에 쌓은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만화를 분석하며 그 인기의 발자취를 쫓아가보려고 한다.
그래서 장르가 뭔데?
《명탐정 코난》의 장르를 한 가지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추리물일 것이다. 매 에피소드마다 추리가 빠질 수 없고, 사건 발생이 곧 에피소드의 시작이다. 사건과 추리가 없다면 코난 세계관은 존재할 수도 없다. 연재 기간이 상당히 긴 만화인데, 매 에피소드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정작 작품 내 시간은 1년도 안 흘렀다는 점에서 우스갯소리로 며칠마다 사건이 일어난 건지 정리한 밈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단순한 추리물의 성격만을 갖고있지는 않다. 연재 초기에는 독자들에게 반전과 충격을 선사하는 여러 에피소드와 추리의 방식으로 추리물의 성격이 매우 강했고, 현재도 그러한 추리 요소가 꽤 자주 등장하지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번 새로운 방식의 충격과 이야기를 선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코난은 견고하다. 20개가 넘는 극장판은 공개 될 때마다 일본 영화 시장의 온갖 기록을 갈아 치우고, 한국에서도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명 '메이저' 취급을 받을 정도로 대중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대중성은 오로지 추리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명탐정 코난》은 사건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지만, 에피소드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사랑부터 유사 가족의 따뜻함, 그리고 서로의 사정 속 동료애 뒤에 숨은 짝사랑까지. 《명탐정 코난》의 중심이 되는 또다른 요소는 바로 사랑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랑은 역시 소꿉친구 사이의 사랑이다. 《명탐정 코난》에는 유난히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가 자주 나온다. 원작자 아오야마 고쇼의 취향이 소꿉친구 사랑이 아니냐는 말이 반쯤 공식으로 자리잡았을 정도로, 소꿉친구의 사귈 듯 말듯 한 사랑이 주를 이룬다. 주인공 '쿠도 신이치' (한국명 '남도일') 와 소꿉친구이자 메인 히로인인 '모리 란' (한국명 '유미란') 의 러브라인은 작품을 대표하는 커플인 동시에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러브라인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신이치의 친구이자 또 다른 주인공 격인 '핫토리 헤이지' (한국명 '하인성') 와 그의 소꿉친구 '토야마 카즈하' (한국명 '서가영') 의 러브라인 또한 유명하고, 란의 부모님인 '모리 코고로' (한국명 '유명한') 와 아내 '키사키 애리' (한국명 '노애리') 또한 소꿉친구에서 발전한 커플이다.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은 작품의 영향으로 러브라인의 클리셰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작품의 인기로 인한 영향도 없진 않겠지만, 미디어 속 러브라인의 극적인 전개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해당 관계가 개연성을 부여하기 가장 적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는 미디어의 극적인 전개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미디어의 사랑에 더욱 열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러기에 미디어의 사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전개에는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죽음의 여부이다.
《명탐정 코난》이 아무리 일상 속 추리물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더라도 만화는 어쨌든 만화이다. 주인공은 물론 작품 속 수많은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겪는다. 하물며 주인공 일행은 어떠할까. 당장 주인공 '코난'의 정체부터가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위치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쉬이 발설할 수도 없고,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코난이 엮이고 만 '검은 조직'은 작품 속 메인 빌런으로, 이 조직과 엮이는 순간 매일매일이 평범한 삶과는 멀어졌을 것이다.
스스로의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이런 상황 속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질문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신이치는 언제든 란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는 란도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연인이기 전에 거의 평생을 알고 지낸 소중한 친구이다. 짧은 몇 년의 세월보다 소꿉친구가 서로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훨씬 개연성 있고, 이야기의 진행에 수월하기에 클리셰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는 평가이다.
또 다른 사랑은 유사 가족이다. (직전 글에서 로판 속 유사 가족을 다루면서 해당 형태의 사랑에 대해 자세히 다뤘으니 추천 드린다.) 코난의 조력자 중 한 명인 '아가사 박사' (한국명 '브라운 박사')는 갈 곳을 잃은 '하이바라 아이' (한국명 '홍장미')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그저 코난의 조력자로 묶인 둘이었고, 하이바라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코난이 감시할 목적으로 박사님의 집으로 들인 것이지만 두 사람은 점차 서로를 가족처럼 의지하게 된다.
조직의 제일 가는 과학자이지만 어린 나이에 모든 가족을 잃고 삶의 의지를 포기한 하이바라에게 아가사 박사는 두 번째 가족이 되어주었다. 작중 두 사람이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시니컬한 성격이지만 박사님에게는 늘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라고 잔소리를 하는 하이바라와, 검은 조직과 엮일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하이바라를 늘 걱정하는 박사님의 모습은 유사 부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명탐정 코난》의 장르는 결국 추리물 위에 얹혀진 목숨도 거는 사랑과 구원, 그 옆에 곁들여진 유사 가족의 사랑, 그리고 그 모든 사랑을 품고 있는 일상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빠는 스파이, 엄마는 암살자, 딸은 초능력자?
'서로의 목적을 위해 가족이 된 세 사람의 이야기.' 《스파이 패밀리》의 주제이자 작품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문장이다. 각자 숨기는 것이 있지만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이 모든 걸 감추고 가족이 된 세 사람은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의 비밀을 하나씩 숨기고 있다. 아빠인 '로이드 포저'는 동국에서 위장 신분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는 유명한 서국의 스파이 '황혼', 엄마인 '요르 포저'는 서국의 시청 직원으로 위장하고 있는 암살자 '가시 공주', 그리고 딸 '아냐 포저'는 평범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초능력자이다.
오직 각자의 목표만을 위해 가족이 되었지만 점차 서로에게 가족애를 느끼고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게 작품의 큰 주제인만큼 대체적으로 가벼운 분위기의 일상물의 성격이다. 완벽한 스파이인 로이드가 요르와 아냐로 인해 망가지는 모습, 암살 밖에 모르는 요르로 인한 해프닝, 자신이 초능력자인 걸 철저하게 숨기느라 종종 엉뚱한 행동을 하는 아냐의 모습은 전형적인 코미디물의 성격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로이드와 요르, 그리고 아냐와 '다미안 데스몬드'의 로맨틱 코미디도 드러나는 등 상당히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대한민국에서도 대중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도 이러한 가벼운 분위기로 진행되는 에피소드와 잘 뽑힌 캐릭터 디자인으로 인한 영향일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상황적 배경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작품의 주 무대인 동국 '오스타니아'와 서국 '웨스탈리스'는 두 차례 전쟁을 했고, 현재 시점에서는 전쟁이 끝난 지 약 20년 정도 지난 상황이다. 애초에 로이드가 동국으로 파견된 것도 현재 두 국가가 물 밑에서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정보전으로 인한 것이었다. 두 번째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아냐와 친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 인물은 이 두 번째 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로이드는 전쟁으로 인해 부모님과 친구들을 잃었고, 요르 역시 부모님을 잃었다. 로이드의 상관 '실비아 셔우드'는 남편과 아이를 잃었으며, 요르의 시청 동료는 아버지를 잃었다. 각자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상황을 다루는 만큼 마냥 가볍게만 볼 수 없는 전개가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 온전히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한 쪽만을 보고 판단하는, 좁은 시야를 가진 이들을 비판하는 에피소드도 종종 진행된다. 대표적인 인물은 전쟁에 학을 떼는 로이드 및 대부분의 인물과 대비되는, 작품 초반에 등장한 동국의 대학생 무리이다. 전쟁을 제대로 겪지 않은 이들은 모순적으로 전쟁을 숭배하며 서국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국이 꾸민 일로 조작할 수 있는 테러를 계획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서국과 동국의 무력 충돌을 의도한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실비아의 대사는 작품을 관통하는 명대사 중 하나로 꼽힌다.
"너희들은 사람을 죽여본 적 있나? 남에게 죽어본 적은? 포격으로 손발이 날아간 적은?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진물에 문드러진 살 냄새를 맡은 적은? 연인의 살점이 온 벽에 달라붙어 있는 걸 본 적은? 굶주린 끝에 나무껍질까지 칼로 벗겨 먹은 적은? 사람 고기를 솥에 삶아본 적은? 적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죽고 죽이고, 그런데도 귀환 후에 마음이 심하게 병들어, 후회와 치욕으로 눈물지으며 구역질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를 가까이서 본 적은?"
"대학에서는 '전쟁'을 배우지 않는 모양인가 보지, 도련님들?"
현대 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들이 지속되고 있다. 한 쪽만을 바라본 채 판단하는 사람들은 늘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이런 동질감 속, 《스파이 패밀리》는 우리에게 마냥 가벼운 코미디가 아니라고 일깨워준다.
다만 치열한 두뇌 싸움은 부각되지 않은 편이다. 아직 애니화가 진행되지 않은 에피소드 중, 포저 가족이 놀러간 산장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명탐정 코난》과 같은 추리물이었다면 한 에피소드가 나올 수 있는 분량이었지만, 아냐의 초능력으로 범인은 바로 밝혀지고 이를 로이드에게 슬쩍 알려준 덕에 범인은 단 몇 컷만에 붙잡힌다. 치열한 정보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작품의 주요 설정이지만 이 정보전으로 인한 육탄전을 훨씬 많이 보여주고 있다. 어두운 서사를 다루면서 두뇌 싸움까지 길게 끌고갔다면 작품의 진행이 한없이 늘어졌을 수도 있지만, 액션 장면으로 빠른 흐름을 만들어서 적당한 분량 조절을 통해 많은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스파이 패밀리》 역시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유사 가족이 아예 주인공인만큼 로이드와 요르, 아냐, 그리고 반려견 본드까지 점차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은 전쟁으로 인한 피폐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따뜻한 인류애를 불어 넣는다. 또한 서로의 목적이 목적인 만큼 포저 가족이 추후 어떤 방식의 결말을 맞이할 지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이다. 비록 전쟁을 최대한 막아야 된다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로이드와 요르는 서로 극을 달리고 있는 처지이다. 게다가 요르의 동생이자 외교관으로 위장하고 있는 동국의 비밀 경찰 '유리 브라이어'는 '황혼'을 무조건 잡고야 말겠다는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황혼'의 정체를 생각해본다면.... 절대 쉬이 풀리지 않은 문제이다.
초능력으로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아냐는 최선을 다해 가족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초반에는 그저 로이드의 정체를 알고 스파이의 가족이 된다는 게 재밌을 거 같아서 로이드에게 입양된 것이지만, 아냐는 몇 번의 파양을 겪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가족을 또다시 잃는 건 바라지 않은 일이다. 로이드와 요르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냐의 모습은 코미디 요소로 쓰이고 있지만, 종종 등장하는 아냐의 진심을 통해 포저 가족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스파이 패밀리》의 장르는 첩보물 위에 얹혀진 가족물, 그 위에 얹혀진 로맨스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장르의 혼합은 독자에게 많은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그 정도가 과해지면 오히려 혼란만 유발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은 이러한 장르의 다양성을 성공적으로 녹여내는 동시에 거대한 서사까지 놓치지 않는 '잘 만든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개개인의 캐릭터성 역시 빠질 수 없는 완성도의 요인이지만, 그 캐릭터성이 쌓아 올린 서사가 장르의 다양성을 완성시키는 개연성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 장르의 혼합은 미디어에서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만화 뿐만 아니라 웹툰, 드라마, 그리고 영화까지. 하나의 작품에서 여러 장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전혀 다른 성격을 띄는 작품의 공통점을 찾다 보면 나의 숨겨진 취향을 발견할 수도 있고, 작품의 교집합을 이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접하면서 취향을 개척할 수도 있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자신만의 취향을 새로운 단어로 정의해보는 것도 나를 알아가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