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애도란 무엇일까? 나는, 죽음 이후의 모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의 것과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한 마디로 애도, 즉 이제 완전히 이해 바깥으로 탈선한 자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1986년, 데모가 한창이던 때,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 라는 짦은 유서를 남기고 죽은 여자친구. 그런 여자친구의 죽음 이후, 남자는 소설을 쓰며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회고하고자 한다. 정확히는, 그와 그의 죽은 여자친구가 ‘어떤 관계’였는지, 그러니까 ‘그녀가 왜 자살했는지’를 활자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소설을 쓰면 쓸수록, 그가 여자친구와 나눴던 모든 ‘의미’를 갖는 순간이 여자친구의 ‘죽음’ 앞에서 무력화되는 것을 느낀다.
그와 여자친구가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오직 그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여자친구의 투신에 논리적으로 부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문장으로 남길 것이냐, 그러지 않을 것이냐가 결정됐다. 하여 둘이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은 그가 쓰는 소설에서 사라졌다. 결국 그가 쓸 수 있는 문장들은 등반일지에 젖는 것과 같은 것들, 식사의 시기와 장소와 종류, 혹은 그날 불어온 바람의 세기와 방향, 그것도 아니라면 만난 장소와 대화를 나눈 시간 등이 다였다. 그러니까 그와 죽은 여자친구가 서로 소통하지 못했던 부분만 빼고, 소통할 수 있었던 것들만 문장으로 쓸 수 있다면 그게 다였다.
- 142p
그는 소설을 쓰며 더더욱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여자친구가 왜 자신의 언급도 없이 죽었을지, 자신은 어떤 존재였을지 소설 속에서 끝없이 그 해답을 구걸하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기자신만의 감옥 속에 갇힐 뿐이다.
소설이 점점 완성돼 갈수록 소설 속 여자친구의 삶에서 자신이 점점 지워진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여자친구에게 현실의 그는 은밀한 존재, 혹은 무의미한 존재 중 하나였을 수 있겠지만, 소설 속에서 그는 분명히 무의미한 존재였다. 은밀한 존재는 현실의 인과 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소설 속의 문장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다. 자신이 쓰는 소설 속에서 그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꿈이며 그럴듯하게 보였던 미래며 삶의 목적이 되었던 몇몇 순간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 141~142p
그러나 그가 소통할 수 있었던 것들만 쓰면 그게 전부라는, 그런 자질구레한 행위와 동작만이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것 자체로 허무함을 낳기는 하지만, 진짜 ‘이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서로 의식(儀式)적인 소통을 나누고 거기에서 맥락과 진심만을 읽으니까. 더더욱 그것이 죽은 이와의 것이라면, 거기에는 어떠한 진실도 없이 그저 남겨진 자의 몫이며 해석이다. 산악부 선배와 전화를 끝낸 후, “모든 게 끝났다.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지만, 패배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패배는 내 안에서 온다. 여긴 패배는 없다.” 라는 이 산뜻한 깨달음과 마무리는 이와 연결되어 있다.
저는 제 여자친구가 왜 자살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그걸 이해하려고 소설까지 썼는데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제 여자친구가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교수님이 펴낸 『왕오천축국전』이에요. 걔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죽기 전에 그런 책을 읽었는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 154p
언뜻 여자친구의 죽음은 당대 시대 상황에 차마 함께 나서지 못하는, 부끄러운 윤동주와 같은 마음이라 텍스트를 읽는 우리와 소설 속 인물들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일 뿐, 끝내 알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없음을 ‘그’와 소설은 말하고 있다. 앞선 깨달음과 별개로, 교수님에게 말을 쏟아내며 ‘걔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죽기 전에 그런 책을 읽었는지 그것도 모르겠다’며 하소연하는 남자의 모습은 애처롭다.

남자는 낭가파르바트 원정을 떠나게 되며, 소설이 아닌 삶 속에서 점차 여자친구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남자는 소설 내내 『왕오천축국전』의 빠진 문장을 계속 찾아 헤맨다. (이때 이 소설의 화자를 알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왕오천축국전』을 번역하고 주석을 단 교수이다.) 이때 삽입되는 문장, 그가 떠올린 공백 있는 문장 역시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 “원문이 사라졌으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문장은 원문이 될 수 있었다.” 라는 문장은 이미 벌어진 사건은,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든 그것 자체로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여자친구의 죽음이 그러했듯. 또, 마지막 절정으로 치달으며 남자가 실패한 원정의 맥락을, 사람들이 좋을 대로 이해하듯.
죽음의 지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 지점이었다. 물론 원정대장이 그 정도의 지식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그에게는 자금과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래서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갈 때 가장 필요한 감각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감각은 희망 없이 절망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 161p
더 이상 소설이 아니라 원정을 하며 제가 살아 있음을 뼛속까지 인지하고 생동을 느끼게 되는 등반 원정, 마치 고행자의 수행과도 같은 순간 남자가 여자친구의 유언을 곱씹는 것도 좋았다. “없었습니다”라는 존칭에서 “후회는 없어”로 건너뛰는 이 비칭 사이의 거대한 틈.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살아 있는 한 남자는 그 틈을 그대로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은, 소설이나 유언과 같은 텍스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여자친구와 소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그게 전부’라고 말했던 ‘현실의 순간’이다.
그런 것을 깨달을 때 등반 중인 산과 날씨는 너무 청명하며, 그 틈과 그 거리를 깨달은 남자는 소설 속으로 다시 한 번 영원히 사라진다. 이 소설은 끝까지 신뢰할 수 없는 화자들이 신뢰할 수 없는 해석을 지속적으로 서술한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불가해의 이해 시도를 완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