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10살의 나는 <런닝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런닝맨>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일요일 저녁 6시에 시작해서 1시간 30분가량 방영되고 있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나는 런닝맨 레이스의 클라이맥스 직전인 6시 50분까지만 TV를 시청할 수 있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7시 저녁 예배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재방송을 보면 되지 않느냐는 엄마의 말에도 런닝맨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교회 가는 길에 눈물을 훔치던 기억들이 선명하다.
나의 최애 에피소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다. 바로 초능력자 특집, 환생 특집, 감옥 특집이다. 왜 이 특집들을 다른 회차들보다 좋아했을까? 생각해 보니 세 특집들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에피소드 별로 특정한 '세계관'이 존재하고, 멤버들은 그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아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는 설정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능력자 특집은 그 시절 런닝맨의 단골 소재였던 '이름표 떼기'에 '초능력 컨셉'이 더해진 회차로, 각자만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 서로를 아웃시켜 최후의 생존자의 자리를 쟁취해야 하는 내용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분신술을 하는 등의 능력이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한 멤버가 결정적인 타이밍에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회차였다. 그렇게 프로그램에 가미되는 다양한 컨셉과 스토리텔링이 비슷한 포맷 속에서도 다음 회차를 기대하게 하는 원동력이자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 현재의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러한 '스토리텔링'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예능, <대탈출>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제 '본방사수'를 못해도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예능 취향은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추리 예능도 좋아한다. 출연진들이 범죄 사건의 용의자들이 되어 각자의 공간을 파헤치며 서사를 파악하고 진범을 찾아내는 <크라임씬>도 좋다. 그리고 여고 안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추리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해결해 나가는 <여고추리반>도 정말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번 글에서는 <대탈출>에 대해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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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탈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탈출이 다른 추리 예능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매 회차마다 달라지는 대규모 탈출 환경과 그곳에 얽힌 서사이다. 이때 각 회차에서 나오는 스토리들은 별개가 아니라, 다음 회차와 시즌이 거듭될수록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서로 연결되며 새 에피소드의 시작점 혹은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대탈출의 세계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바로 좀비, 악령, 타임머신이다. 그중에서도 타임머신은 가장 최근에 공개된 시즌인 <대탈출 : 더 스토리>까지도 이어지는 유일한 세계관이다.
타임머신 세계관
이 세계관의 첫 에피소드인 "타임머신 연구실"에서는 멤버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그것의 개발자인 김태임 박사의 연구실을 다양한 시간대로 방문하면서, 타임머신을 탐내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박사를 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회차의 세트 연출은 다른 예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밀한 디테일을 자랑하는데, 같은 장소를 시간대별로 다르게 세팅해서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동시에 멤버들이 과거 시점에 연구소에 몰래 숨겨둔 단서가 미래에도 똑같이 남아있는 등, 갑작스러운 변수까지 즉각적이고 치밀하게 하나의 세계관으로 구현해 낸다. 또한 후반부에 멤버들이 자신들과 다른 시간대에 있는 김태임 박사와 소통하기 위해 택하는 창의적인 방법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후 멤버들은 타임머신을 통해 더욱 다양한 시대와 장소로 여행하게 된다. 특히 <대탈출 : 더 스토리>에서는 타임머신이 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며, 여러 개로 쪼개져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로 흩어진 '금척'을 찾아 하나로 완성해야 한다는 메인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이 특히 재미있는 이유는 NPC를 센스 있게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김태임 박사는 "타임머신 연구소" 외에도 타임머신 세계관과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에서 재등장하고, 다시 한번 멤버들이 구해야 할 존재가 된다. 이때 다양한 시대에서 멤버들과 만나기 때문에 에피소드별로 다른 나이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조력자가 되어주기도 하면서, 빌런들과 대립하고 그들로 인해 야기된 위험을 되돌려 놓는 '선한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하며 세계관의 완성도를 높인다.
대탈출의 탈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는 '머리를 쓰느냐'와 '몸을 쓰느냐'의 차이다. 즉 열쇠나 비밀번호를 찾아 다음 스테이지로 향하는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 있고, 플레이어로서 스토리에 직접 관여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있다. 전자를 더 재밌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역시 후자에 더 끌린다. 대본도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온몸으로 맞닥뜨린 낯선 상황에 온전히 몰입하고 미션을 수행해나가는 멤버들의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이 특히나 강했던 레전드 에피소드들을 소개해 보겠다.
태양여고 (시즌 1 11-12회)
안대를 풀었더니 멤버들이 도착해 있는 곳은 한 여자고등학교였다. 다짜고짜 수행평가를 풀던 중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보내는 쪽지를 전달하며 두 학생이 실종된 친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그들의 아지트를 찾은 멤버들은 학교 선생님들이 사실 사이비 종교의 제사장과 사제들이고, 학생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아까 쪽지를 주고받던 학생들마저 제물로 바쳐질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 그래서 멤버들은 사제들로 잠입해 제사 의식을 중단할 작전을 세운다.
사제로 변장하기 위해 다른 신도들에게 들킬 뻔한 위험이 여러 번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 순간들이 시청자들에게 가장 큰 쫄깃함과 짜릿함을 선사한다. 결국 멤버들은 제사 진행을 방해하고 성수에 몰래 수면제를 타 제사장과 사제들을 잠재워 학생들을 구출한다. 이때 그들의 영리한 전략과 협동이 매우 인상적이다.
희망연구소 (시즌 2 7-8회)
대탈출 좀비 세계관의 두 번째 에피소드로, 폐쇄 군사시설에 세워진 좀비 바이러스 임시 연구소를 배경으로 한다. 멤버들의 최종 미션은 연구소 어딘가에 있는 좀비 바이러스 면역자 '희망이'를 찾아 좀비들을 피해 그곳을 탈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3팀으로 나뉘는데, 통제실 팀이 불꽃을 터뜨려 소리로 좀비들을 유인하면 '희망이 찾기 팀'과 '열쇠 팀'은 안전한 동선을 확보해 미션을 수행한다. 그러나 작전 중 결국 멤버 중 한 명이 좀비들에게 잡히게 되고, 다 같이 탈출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이 장면은 프로그램의 극한의 리얼함을 보여주며 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장면으로 뽑힌다.
빵공장 (시즌 3 9-10회)
배경은 빵 속에 생화학무기를 넣어 빼돌리고, 불법 카지노에서 판을 조작해 사람들을 빚지게 해서 노동자로 부리는 공장. 생화학무기 유출을 막기 위해 비밀 보안 단체 'SSA'는 요원 두 명을 투입했으나, 모두 위기에 빠진 상황이다. 멤버들은 요원 중 한 명을 만나 노동자 숙소에 숨겨진 서류 가방을 열고, SSA의 작전을 직접 수행하게 된다. 그 작전은 바로 CCTV룸을 장악해 게임 승률을 조작하고 비밀 게임장의 카드 게임에서 우승하는 것. 그리고 VIP 대기실에 입성해 그곳과 연결되는 서버실을 해킹하고 유출된 모든 정보를 되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멤버들은 수면제로 조직원들을 재우고, CCTV룸에 진입해 카드 게임 현장을 살펴보며 조작 패턴을 파악한다. 그리고 카드 게임에 투입된 나머지 멤버들에게 지령을 내려 게임을 승리로 이끈다. 시청자들은 두 공간에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게임과 그 속의 똑똑한 팀워크를 관전하며 멤버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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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일상을 탈출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평소 같은 공간들을 오가고, 항상 열고 닫는 문의 비밀번호야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대탈출 멤버들이 가상의 이야기 속으로 뛰어 들어가 문제를 풀고 사건을 직접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대리 만족을 느낀다. 나 또한 멤버들과 또 다른 세계를 모험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은 비단 멤버들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가상 세계를 탈출할 때, 우리들은 현실을 탈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