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추석이 지나고 10월에 접어들면서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11월에 본가에 내려가 겨울옷을 챙겨 오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아침부터 엄마에게 너무 추우니 패딩이라도 먼저 보내 달라고 부탁드렸다. 바람에서는 아직도 익숙한 수능 공기 냄새가 나고, 캐럴이 조금씩 들려오면서 할로윈보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이 보인다.
슬슬 연말 여행으로 어디를 갈지 알아보고, 미리 식당을 예약하고, 주고받을 선물을 고른다. 10월과 11월은 그렇게 진짜 연말을 위해 보내는 준비 기간이다. 부푼 마음과 설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붕 뜨는 것에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연말을 어떻게 보낼지, 이번 방학에는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장바구니와 보관함에 이것저것 담다 보면 기대감만 커져 정작 해야 할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연말은 아니지만 연말을 준비하는 지금, 이 계절에 보기 좋은 드라마 몇 편을 추천해 보려 한다.
코로나19로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집에서 드라마만 몰아 보던 시기가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들은 대부분 그 시기에 만난 작품들이었다. 마침 그 무렵 OTT 플랫폼도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중국 드라마 붐도 함께 찾아왔다. 어설픈 CG와 거대한 스케일, 다소 유치한 캐릭터 설정에도 불구하고 50화가 넘는 장편 드라마가 대부분이었던 중국 드라마는 긴 호흡으로 시청자를 설득해 나갔고 나는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캐릭터 하나하나의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인물들의 관계를 오랜 시간에 걸쳐 풀어내며 좋은 수작을 만들어 냈다.
그 이후에도 올해 화제가 되었던 《축옥》(이것도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봐야한다)이나 현지에서 극찬을 받은 《장해전》 같은 작품을 꾸준히 보고 있다. 그런데도 5~6년 전, 중국 드라마를 도장 깨기 하듯 찾아보던 시절의 작품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좀처럼 지울 수 없다. 그때의 나는 어떤 이야기에 그토록 깊이 빠져들었던 걸까. 시간이 흘러 다시 꺼내 본다면 그때와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 한때 밤을 지새우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했던 드라마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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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운석전 — 독을 다루는 여인과 독에 중독된 남자
독에 관한 재능을 가진 한운석과 황족인 용비아의 이야기를 담은 《운석전》은 두 사람의 혼례날로 시작한다. 황궁에서 견제를 받고 있는 용비아의 첩자 노릇을 하며, 황족의 몸에만 나타나는 풍족의 표식을 확인하기 위해 시집온 운석과 그녀를 의심하는 용비아의 갈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똑 부러지고 명석한 여주인공 운석은 중국의 최고 미녀라 불리는 쥐징이가 연기했다. 어떤 의상을 입어도 찰떡같이 소화해 내는 것은 물론, 연기 역시 준수하다. 대부분의 사건이 독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해결된다는 점도 흥미롭게 다가왔던 작품이다. 무엇보다 장철한 배우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이 작품에서는 무척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 주어 의외였던 기억이 있다.
엄청난 수작이라기보다는 주인공 커플의 얼굴 합과 연기 합이 좋은 작품에 가깝다. 중국 고장극의 익숙한 문법인 출생의 비밀, 궁중 암투, 황궁의 견제, 선결혼 후연애 등의 요소가 피폐함과 달달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덕분에 중드 중에서도 무난하게 즐길 수 있고, 입문작으로 선택해도 부담 없이 후루룩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독에 당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표현하는 CG가 다소 어색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문중적진천천 — 남자를 낳다니, 가문의 씨를 말릴 셈이냐!
이 작품으로 중국 드라마에 입문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모계사회에 여존남비라는 생소한 설정과 탄탄한 스토리로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드라마 작가인 첸첸이 자신이 쓴 원고 속 삼공주에 빙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가 쓴 원고 속 세계관은 여존남비의 모계 사회인 화원성이다. 그곳에서는 남자를 낳으면 집안의 대를 끊을 작정이냐며 원망을 듣는다. 이야기는 부계 사회인 옆 나라 현호성의 왕자 한숴와 삼공주로 빙의한 첸첸이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 작품 역시 선결혼 후연애를 다룬다. 아무래도 나는 이 설정이 취향인 듯싶다. 한국 드라마 《궁》도 무척 재미있게 봤으니 말이다. 로맨스 판타지물인 이 작품은 사실 첸첸이라는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가 쓴 것이다. 작품 원고를 끝내던 날 갑자기 첸첸은 자신이 쓴 작품으로 타임슬립한다. 원작대로 결말을 내야만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첸첸은 자신이 빙의한 삼공주가 여자 주인공이아니였기에 남자 주인공 한숴와의 정략결혼을 무산시키려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고, 어느새 마음을 주고받게 되며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가볍고 간질간질한 로코물을 좋아한다면 만족스럽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결말까지 완벽했고 비교적 짧은 회차로 속도감있으면서 기승전결이 깔끔한 편이다.
배우 조로사가 출연한다고 하면 믿고 보는 편인데, 특히 로코물에서 빛을 발하는 배우인 만큼 여주인공의 매력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남녀 주인공의 케미 역시 훌륭하다. 물론 무리수 액션과 억지스러운 연출, 이를테면 이불로 화살을 막는 장면 같은 단점도 있다. 하지만 그런 단점마저 상쇄할 만큼 작품 자체의 매력이 상당하다. 가볍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로맨스 판타지를 찾고 있다면 정말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곡주부인 — 난 선생이고 넌, 제자야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초반부만 넘기면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어 추천하고 싶지만, 유명한 작품은 아닌 데다 방영 당시 여러 OTT 플랫폼에서 볼 수 없었던 탓에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삼각관계와 사제지간의 사랑을 다루면서 궁중 암투까지 더해져 매력 포인트가 다양한 작품이다. 남자 주인공의 외모가 진입 장벽이 될 수는 있지만, 스토리도 탄탄하고 두 사람의 감정선과 텐션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처음에는 남자 주인공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 빠져들게 된다고 자신한다.특정 계절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겨울과 정말 잘 어울리는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황제의 호위무사인 방제의 손에 거두어져 가르침을 받는 방해시는 어린 시절 자신을 제외한 일가족은 물론 온 마을까지 피해를 입었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황제를 끊임없이 암살하려 하지만, 황제와 자신이 사랑하는 스승 방제가 운명을 함께하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방제와 황제를 노리는 암살자들로부터 두 사람을 보호하려 한다.
그러나 방제는 제자인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 끊임없이 마음에도 없는 말로 밀어낸다. 서로를 위한다는 마음이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멀어지게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던 남자 주인공이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마침내 마음을 드러내는 과정에 흥미를 느끼는 편인데, 이 작품은 그러한 감정의 변화를 무척 잘 표현한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그 마음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우면서도 절절한 사랑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빠져들었다.서브 커플 역시 작품의 재미를 더하고, 이야기의 볼거리도 다채롭다. 사제지간의 사랑과 궁중 암투, 삼각관계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시청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동궁 —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너를 잊을거야.
가장 불쌍한 여주인공과 분리수거도 안 될 쓰레기 남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동궁》은 없던 취향마저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이른바 후유증이 무척 심한 드라마로, 혐관을 좋아한다면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자신한다.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고, 사랑해서는 안 될 사이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슬퍼지는 이야기. 사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만났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일을 반복하며 애정보다 증오가 쌓여 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나는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는지 모른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은 연출에 있다. 추천 글인 만큼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아끼겠지만, 두 주인공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과거와 현재를 겹쳐 보여 주는 장면들에서는 그동안 쌓아 온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이 쌓일수록 특정 장면이 지닌 의미도 달라지고, 이미 지나간 순간들이 새로운 감정으로 다가온다.
비극적인 스토리에 걸맞은 OST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한몫한다. 비극적인 선율은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그려 내고,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작품을 다 보고 나서도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슬픈 결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과 증오가 뒤엉킨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는 동안 그들의 감정에 깊이 이입하게 되고, 끝내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그 감정만큼은 쉽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 동북공정논란만 아니였어도 더 널리 알리고싶은 작품이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누군가의 새로운 추억을 위해
어쩌면 그 시절의 드라마들이 유독 계속 생각하는건 이야기 자체의 힘 때문만은 아니다. 그 작품을 보던 당시의 나, 내가 기억나고 그때의 나를 불러오는 향수이기 때문이다.
긴 겨울밤을 밝히던 화면 속 세계는 이제 기억 속에 머물지만, 그 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끝내 헤어졌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문득 되살아난다. 마치 오래 덮어 두었던 책의 책갈피를 펼치면 그 페이지를 읽던 날의 공기까지 되돌아오는 것처럼. 나는 작품에 깃들어있는 한사람 한사람의 향수를 좋아한다. 나만이 가지고있는 향기이고 나만이 느낄수 있는 공기이기 때문이다.
연말을 기다리는 계절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무언가를 새로 계획하고, 다가올 날들을 기대하며 마음을 분주히 움직이는 시기. 이상하게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의 향은 유독 짙고 금방이라도 특정 날짜가 생각날만큼 선명하다. 이번 겨울, 누군가에게는 이 드라마들이 새로운 이야기가 되고, 내년, 내후년에 꺼내볼 수 있는 올해의 향수가 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