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이 개봉한 이후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있다. 이 기회에 미뤄두었던 이창동의 영화들을 꺼내 보았다. 〈오아시스〉 이후 발표한 세 작품, 〈밀양〉, 〈시〉, 〈버닝〉이다.
이창동의 영화는 대체로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주인공이 알지 못하는 사건의 전모는 쉽게 드러나지 않고, 관객에게 주어지는 정보 역시 인물의 경험과 인식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같은 세계라도 주인공이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관객은 주인공과 깊은 정서적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가 알지 못하는 진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감정과 사건의 이면을 끊임없이 유추하게 된다.
이때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는 화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를 읽어내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인물의 말과 행동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영화의 인물은 각각의 제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신애에게 밀양은 어떤 곳이며, 미자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종수를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 인물과 제목이 맺고 있는 관계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1. '신애'와 '밀양'
신애에게 밀양은 자신이 믿고 싶은 세계이자, 동시에 그 믿음이 끊임없이 부정당하는 세계다.
밀양 사람들은 신애를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 바라본다. 이미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지역 공동체 안에서 신애는 외부인일 뿐이다. 그러나 신애는 마을 공동체에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줄곧 그곳에 속하고 싶어 한다.
밀양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고향이다. 동생과의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남편은 생전에 외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애의 가까운 사람들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신애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신애는 남편이 사랑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고 믿으며 그의 존재를 그리워한다.
남편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밀양에 온 그녀에게, 밀양은 단순히 새로운 삶의 터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은 남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자신이 믿어온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은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애가 마을 사람들에게 돈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땅을 보러 다니는 행동에서도 이러한 욕망이 드러난다. 그는 밀양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먼저 다가가거나 타인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인색하다.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종찬을 대하는 태도 역시 모순적이다. 종찬은 신애를 위해 인맥을 동원하고 마을 사람들과의 자리를 주선하며 그의 정착을 돕는다. 신애는 그런 종찬을 '속물'이라며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 역시 종찬의 도움을 받으며 마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종찬이 노골적으로 타인의 호의를 구한다면, 신애는 자존심을 지키면서 보다 우회적인 방식으로 타인의 인정을 얻으려 하는 셈이다.
신애의 말과 행동 사이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속내가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지 못한다. 남편의 외도를 인정하는 일은 자신이 믿어온 사랑과 결혼 생활을 부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결혼과 함께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가정을 꾸렸던 신애에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을 잃은 뒤에는 홀로 어린 아들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 신애는 자신의 불행을 감추고, 자신이 믿고 싶은 세계에 집착한다. 자존심이 강한 신애의 성격을 생각하면, 남편이 외도하지 않았다는 믿음은 사실에 대한 확신이라기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결국 남편의 고향에 정착하려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밀양은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아들마저 앗아간다.
아들이 실종된 날, 신애는 밀양에 도착한 첫날부터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종찬을 찾아간다. 그러나 종찬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카센터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신애에게는 믿을 수 없이 끔찍한 일이 일어났지만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간다. 그 순간 그는 타인과 자신의 세계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간극을 절감한다.
밀양은 신애에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처음 이곳에 온 날, 신애는 밀양이 어떤 곳인지 묻는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햇빛'이라는 뜻처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좀처럼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애 역시 밀양이라는 세계 안에서 자신조차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여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인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신애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지만, 그 믿음마저 자신을 구원하기는커녕 부정하듯 밀어낸다. 그럼에도 신애는 다시 햇빛 아래에서 살아갈 준비를 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햇빛은 신애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구원의 징표일까. 아니면 어떤 비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존재하는 세계의 무심함일까. 혹은 끝끝내 신애의 곁을 지키는 종찬이 그에게 남겨진 한 줄기 햇빛인 걸까.
2. '미자'와 '시'
예순 중반 나이인 미자의 얼굴에는 주름이 있고, 어깨는 조금 굽어 있다. 기억력이 떨어져 병원을 찾았다가 알츠하이머병 초기라는 진단을 받기도 한다.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나이다.
그럼에도 미자에게서는 어떤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미자는 언제나 꽃무늬가 그려진 옷에 스카프를 두른다. 타인에게는 예의를 갖춰 늘 살갑고 친절하게 대한다. 시 창작 수업을 다닐 만큼 세상을 향한 호기심도 가득하다. 이러한 미자의 모습은 그가 이제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익숙한 대상도 오랫동안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시선을 갖기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익숙함은 때로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무디게 만든다.
그러나 미자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다. 시 창작 강좌를 듣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시를 쓰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시 낭송회에 찾아가 방법을 묻기도 한다.
그런 미자에게 외면하고 싶은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이 돌보는 손자가 또래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에 가담했고, 피해 학생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의 시선에 쉽게 굴하지 않던 미자도 이 사건 앞에서는 주저한다. 자신이 사랑하고 돌봐온 손자의 모습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사이에 너무나 큰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간극 사이에서 미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피해 학생의 추모 미사에 참석하고, 피해 학생이 몸을 던진 강가에도 찾아간다. 시를 쓰기 위해 사물과 풍경을 오래 들여다보았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그 흔적을 따라간다.
시를 쓰려고 아무리 애써도 좀처럼 한 줄을 완성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 역시 쉽지 않다. 함께 배드민턴을 치고 일상을 보내던 평범한 손자가 또래 여학생에게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다는 것. 그가 자신이 알던 아이인 동시에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잔혹함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 미자는 그 모순을 마주해야 한다.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로서 미자는 결국 그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에 나선다. 다른 가해 학생들의 부모가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려는 가운데, 미자 역시 합의금을 마련하는 일에 동참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간병하던 노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미자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손자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과 피해 학생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미자는 갈등한다. 결국 손자가 경찰에 연행되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본 후, 마침내 그는 시를 쓴다.
미자에게 시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태도이자,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문장 안에는 아름다움과 고통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3. '종수'와 '버닝'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도 유난히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영화라는 인상을 준다. 미스터리 장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이전 작품들과 다르다.
'버닝(Burning)'은 무언가가 실제로 불타는 상태를 의미하면서도, 마음속에서 감정이나 욕망이 격렬하게 타오르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현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태를 동시에 환기하는 단어다.
‘버닝’은 종수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종수는 해미를 갈망한다. 그리고 종수가 갈망하는 해미는 마치 불타 사라진 것처럼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해미와 종수는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재회한다.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여행하는 동안 고양이를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해미가 없는 집에서 종수는 그를 떠올리며 자위한다. 해미의 부재는 오히려 종수의 갈망이 더욱 타오르게 만든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그곳에서 만난 벤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아직 변변한 직업도 없는 종수에게 벤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무슨 일을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언제나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한다.
종수에게 벤의 세계는 해미의 방에서 바라보는 남산타워처럼 멀리 있다. 하루 중 아주 잠깐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처럼, 자신의 삶과 좀처럼 맞닿지 않는 세계다. 종수는 결국 해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채 벤과 함께하는 해미를 바라보기만 한다. 해미를 향한 갈망이 커질수록 벤을 향한 질투와 분노 역시 강해진다.
그러나 해미를 향한 갈망에는 해미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닌 소유욕만이 존재한다. 결국 종수는 자신이 갖지 못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해미에게 전가한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해미에게 모욕적인 말을 통해 감정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해미는 사라진다.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자신의 취미라고 말한다. 이때 그들의 대화 속 ‘비닐하우스’는 사회에서 쉽게 사라져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존재를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이러한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해미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벤이 그 일에 관여했는지 관객은 끝내 확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종수에게 그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해미가 사라진 뒤 종수는 집요하게 벤을 추적한다. 해미를 향한 갈망과 벤을 향한 열등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분노가 뒤섞이면서 그의 내면은 점점 격렬하게 타오른다. 그리고 결국 종수는 스스로 벤을 살해하고 불태우기에 이른다.
벤이 실제 가해자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에서 종수의 극단적인 행동은 해미를 위한 복수라기보다 개인의 욕망과 분노가 물리적으로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종수의 욕망은 해미를 향한 소유욕과 자신이 갖지 못한 세계를 향한 계급적 갈망이라는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그리고 종수는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무력감과 절망 속에서 분노할 뿐이다.
위와 같이 〈밀양〉, 〈시〉, 〈버닝〉의 세 인물과 제목이 맺고 있는 관계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마주했을 때, 신애는 그 세계를 믿어보려 하고, 미자는 관찰하듯이 바라보며, 종수는 스스로 불태워버린다.
각 영화의 주요 메타포는 인물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은유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사랑〉은 어떨까. 〈가능한 사랑〉은 극장 개봉 이후 오는 11월 6일 넷플릭스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인물을 따라가며 제목에 담긴 메타포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보는 일은 이창동의 영화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