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덧 그녀는 데뷔 13년차다.
수줍게 노래하던 소녀는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다. 시간이 참 빠르다.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이유는 인생에서 하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작아지기 때문이라 한다. 다섯 살 아이에게 일 년은 인생의 오분의 일이지만, 서른 살에게 일 년은 삼십분의 일에 불과하니까.
앞으로 우리는 얼마만큼의 하루를 쌓아갈까. 그중 어떤 장면이 남아 기억될까. 나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영화 한 편이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떤 텍스트로도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일기조차 결국 쓰는 사람에 의해 편집된 기억일 테다.
드문드문 남은 장면 속에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와, 시절과,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운명 같은 것들로 인해 매일은 변하지만, 내가 ‘나’인 것과 네가 ‘너’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백예린은 정규 3집 ‘Flash and Core’를 발매했다.
맨날 보고 듣는 게 다르고 입고 싶은 옷도 바뀌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어떻게 바뀌지 않을 수 있어요?
- VCR 인터뷰 中
1. Flash - 새로운 영감을 얻고 변화하는 백예린의 세계
정규는 아티스트의 음악 세계를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앨범이다. 예린은 5년 만에 세 번째 정규 앨범으로 돌아왔다. 총 15곡이 수록된 이번 앨범은 일렉트로닉, 힙합 등 이전에 그가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장르로 채워져 있다.
발라드와 알앤비를 중심으로 하던 솔로와 얼터너티브 록 밴드 더 발룬티어스 때와 다른 행보다. 이번에는 양쪽에서 예린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프로듀서 구름 대신 전작에서 호흡을 맞춘 PEEJAY가 파트너 프로듀싱을 맡았다. 앨범 참여진의 변화로 앨범 무드 또한 변화한 것. 이러한 변화에 대해 기존 팬들의 반응이 많이 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앨범과 동일한 제목을 가진 이번 공연 ‘Flash and Core’는 앨범 활동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올리는 단독 공연인만큼 변화한 예린의 세계를 팬들과 리스너들에게 보여주면서 앨범에 대한 설득력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라이브만큼 음악의 의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형태가 없다. 녹음된 음원은 리스너가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라이브 퍼포먼스는 아티스트가 의도한 사운드대로 어떤 장치의 장애물 없이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라이브 사운드에는 납작한 음원 파일에 담을 수 없는 호소력이 있다.
강렬한 비트와 사운드가 돋보이는 앨범의 첫 트랙 ‘DUST ON YOUR MIND’로 공연의 막이 올랐다. 이후 전반적으로 어둡고 강한 톤의 노래가 이어졌다. Qim Isle이 피처링한 ‘No man’s land’과 ‘MIRROR’ 무대에는 힙합 댄서 크루가 함께하기도 했다.
그녀는 뛰어난 리듬감과 곡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세심한 가창력을 보여줬다. 그녀에게 선호하지 않는 장르가 있을지 몰라도(이미 그녀의 음악 취향으로부터 선호의 폭이 넓음을 알 수 있다) 가능하지 않은 장르는 없다.
이번 앨범에서 최애곡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는데 특히 공연을 보고난 이후에는 앨범 전체에 흠뻑 빠졌다. 원래는 ‘Lovers of Artist’와 ‘Krama calls’와 같이 몽환적이며 다이나믹한 사운드의 곡을 좋아하지만, ‘Television star’이나 ‘Save me’, 펑키한 무드의 ‘Mirror’와 같이 드럼이나 베이스가 전면에 나오는 비트 중심 사운드도 새로웠고, 전자음의 활용도 좋았다.
이번 앨범에 대해 쇠맛이 도는 듯한 무채색의 예린이라 설명할 수 있겠다. 새로운 옷을 입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이나 곡에 대한 몰입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2. and Core – 백예린의 중심과 변하지 않는 진심
예린이 키보드 앞에 앉자 환호가 나온다.
이번 앨범에서 거의 유일하다 싶은 발라드 곡 ‘Put it back on’은 예린의 섬세한 감정 표현을 보여줬다. 얼마 만에 앉아보는지 모르겠다는 피아노 앞의 예린은 그 모습 자체로 팬들을 설레이게 한다. 악기 연주하는 사람이 얼마나 섹시한지 음악인들은 다 알고 있겠지.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음악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니 당연한 말인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했으니 여러분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겠다던 예린은 앵콜만 무려 7곡을 했다. 리프트를 타고 다시 등장한 예린은 ‘Big world’로 앵콜 무대를 시작했다. 이어 '0310', 'Square' 등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들을 불렀다.
오랜만에 듣는 ‘Saving All My love for you’ 커버 무대는 보통 가창력을 뽐내지 않는 예린의 곡들을 생각하면 예린의 보컬 기교를 볼 수 있는 기회라 좋았다. 그녀가 탁월한 보컬리스트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공연 내내 그녀는 감사인사를 여러 번 전했다. 감사함을 잊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여러분이 받은 사랑을 더 멀리 퍼뜨려달라고 말했다. 이렇듯 음악은 형태도 한계도 없이 멀리 멀리 퍼져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백예린의 힘.
I don’t need a reason with you
(…)
Lately, just wanna see you more
- 'Another season with you' 中
이유 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음악이 가진 본질적인 힘일 것이다.
사진 출처. 백예린 공식 X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