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메타포와 역설로 전하는 메시지
영화 <레위기>는 금기된 욕망이 끔찍한 저주로 나타나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로부터 도망쳐야만 하는 두 소년의 독창적인 오컬트 호러라고 소개된다.
관람 전, ‘가장 사랑하는 이를 닮은 저주’라는 소재가 매우 흥미로웠다. 어떤 형태로 인물을 위협할지 궁금했고 크리쳐가 등장할까 싶었다. 하지만 ‘저주’는 정말 사랑하는 이와 닮아있었다. 그 존재를 ‘괴물’이라고 명명한다면, 괴물은 상대의 모습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다가왔다. 경계하지 않으면 잡아먹히기에 십상일 행색이었다. 과연 나라면 그러한 저주를 마주했을 때 죽음이라는 결말을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저주’는 관객에게 어떠한 불쾌감, 꺼림칙한 느낌을 전했다. 나임의 시선을 따를 때 라이언의 등장에 대해서 ‘괴물일지 모른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를 반길 수도, 좋아할 수도 없고 긴장하게 된다. 주인공에 동화되거나 그의 서사를 응원하는 관객으로서 그의 사랑에 긴장과 불안을 느껴야 한다는 상황이 모순적이고, 이러한 아이러니가 필연적이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레위기>는 퀴어 오컬트 호러라는 복합장르의 작품이다. 동성애라는 소재를 오컬트와 호러로 풀어낸 독특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불안은 동성을 사랑하는 관계, 그러한 과정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아무리 자유롭다고 할지라도 보통의 환경이라면 떼어낼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현 사회에서 동성애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할 감정은 때로 불안을 넘어서 공포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를 저주라는 메타포로 담아내 사랑과 공존하는 모순적인 감정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이고 축축해진 손바닥을 닦아내며 저주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과연 저 괴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어떻게 저주를 없앨 수 있는지 내리 생각한다. 과연 어떤 방법이 ‘맞는 것’일까?
영화는 두 소년이 함께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함께 탄 버스 차창 너머로 라이언을 닮은 괴물의 모습이 보이지만, 당장 옆에 라이언이 있었기에 나임은 그것을 괴물로 인지할 수 있었다. 관객으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거듭 생각해 보아도 최대한 두 소년이 함께 있는 것이 ‘맞는 방법’이라고 느껴졌다. 이처럼 결국은 그들이 함께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보여준다. 그 표현이 매우 직접적이라고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해당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결말은 역설을 품고 있기도 하다. 두 소년이 저주를 마주하게 된 이유가 된 것이 사랑이다. ‘그들’은 사랑을 죄라고 단정 지었고 그로 인해 소년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빼닮은 저주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주를 극복하는 방법이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자체가 모순적이다. 사랑을 죄로 보고 치유를 강요하지만 결국 소년들에게 주어진 구원은 사랑이었다. 이처럼 서사 자체가 역설을 품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분명하고 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들이 죄라고 판단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두 연인은 어쩔 수 없는 감정 앞에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저주를 피해 도망치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도 함께하며 헤쳐나간다는 선택 자체가 용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랑은 죄나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일지 모른다.
2.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것
나임의 모친 ‘알린’은 구원 치유 의식 이후에 원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임이 논하는 문제에 관해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두려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려움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가 논하는 두려움은 그것이 아니다. 강요된 정상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과 행동을 과연 무모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알린이 이야기하는 ‘두려움’과 ‘규율’은 모두 마을에서 정해둔 일방적인 것들이다. 소년들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 마을이다. 하지만 저주의 씨앗과 그 발아를 모두 소년들의 몫으로 떠넘긴다. 또한, 모순적인 것투성이지만 마을을 이루는 일원들은 그 누구도 그것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 욕망과 애정이 죄가 되어야 하는 이유조차 설명하지 못하면서 ‘그들’은 소년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며 고립시킨다.
나임을 비롯한 소년들은 경찰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저주라는 현상을 마주해도 도움을 청할 곳이 마땅치 않다. 부모에게조차 손을 내밀 수 없어 소년들은 가족, 학교, 마을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서서히 고립되어 간다. 이처럼 불안과 공포라는 감정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의 사람들이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도 극단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다. ‘동성애’라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배척된다. 이어지는 배척에 결국 고립되는 순간은 나임의 “제발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어 주세요”라는 간절한 외침으로 드러난다.
넌 내 곁에 있으면 안 돼, 나도 네 곁에 있으면 안 되고./ 서로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그들이 원하던 거야.
어쩌면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동성애의 결말인가 싶었다. 그러한 생각이 스쳤고 자연스럽게 ‘그들’이 누군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지만, 올라가는 영화의 크레딧을 보며 ‘그들’은 특정 집단, 사람이 아니라 현 사회를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임과 라이언이 서로를 닮은 저주를 피해 점차 거리를 두는 모습, 서로를 두려워하고 서로의 애정을 의심하는 모습은 자유롭지 않다는 부분에서 현 사회 속 동성 연인을 닮았다. 같은 사랑을 하는, 다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상대가 동성이라는 이유로 그러한 관계와 감정은 자유로울 수 없다.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하고 애정 어린 무언가를 경계해야 한다. 다소 극단적인 비유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임과 라이언이 겪는 저주와 그들이 마주하는 괴물이 과연 현 사회에 만연한 차별의 시선과 확실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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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는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성 소수자가 마주할 여러 문제를 담아내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이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고, 해석의 차이가 발생할 여지가 충분하다고도 판단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성 소수자와 공동체, 그리고 규율에 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마냥 편하게만 관람할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많은 이가 영화를 통해 고민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