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톱 모션 명가 라이카 스튜디오의 〈파라노만〉이 13년 만에 재개봉한다. 유령을 보는 소년 ‘노만’이 마을에 걸린 마녀의 저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 영화는 수공예와 첨단 기술이 만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유령을 보는 노만의 능력이 대체 얼마나 특별하기에 이토록 거대한 사단이 나는 것일까? 영화는 환상적인 스톱 모션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스톱 모션의 메시지
스톱 모션은 촬영 대상의 움직임을 한 프레임씩 변화를 주며 촬영한 뒤, 이를 연속으로 영사해 움직임을 만드는 기법이다. 그만큼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는 이 방식을 활용한 작품이 바로 〈파라노만〉이다.
주인공 노만의 얼굴만 해도 8,000개가 넘는다. 눈썹과 입 조각의 조합으로 약 150만 가지의 표정을 구현해 감정 묘사의 생동감을 더했다. 퍼펫 메이커 60명이 인형을 손수 제작했고, 교체용 얼굴만 30,000개 이상 출력됐다. 이토록 쏟아부은 정성 덕분에 캐릭터의 얼굴과 몸짓은 관객에게 생생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섬세한 기술이 스크린에 펼쳐내고자 한 이야기는 단순히 유령과 대화할 수 있는 소년의 기묘한 모험, 그 이상을 담고 있다.
그냥 유령 보는 소년
노만은 유령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소년이다. 하지만 그 비범한 능력 탓에 가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를 꺼린다. 학교에서는 놀림 받기 일쑤고, 가족들은 그를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노만 역시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을 고깝게 여기며 움츠러든다.
평온한 듯 외로운 일상을 보내던 노만은 작은할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마을에 얽힌 마녀의 저주를 알게 된다. 저주를 풀기 위해 온갖 고생 끝에 마주한 진실의 끝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단지 특별하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소녀. 노만은 그 소녀의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다.
특별함이란 때로는 타고난 재능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세상의 테두리에 녹아들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장애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남들과 다를 바 없어야 한다’라는 강박은 곧 특별함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노만은 그 폭력의 희생자이며, 과거 마녀사냥을 당한 소녀 역시 매몰차게 버려진 희생자였다. 우리는 대체 왜 이토록 ‘특별함’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특별함과 평범함의 차이
결국 마을은 노만 덕분에 위기에서 구제된다. 그러나 그에 기대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그들은 “남들도 다 그랬으니까”, “그땐 어쩔 수 없었으니까”라는 비겁한 변명 뒤로 슬그머니 숨어버린다. 남들과 똑같기만 하다면 어떤 잔인한 일도 죄의식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세상에서, 노만의 특별함은 곧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간주되었다.
소녀를 죽인 재판관과 마을 사람들이 뒤늦게 용서를 구하고 어찌저찌 해결된 것처럼 보이듯 연출되지만, 사실 이 결말마저도 또 다른 폭력처럼 느껴진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잔혹한 실수를 왜 너그럽게 용서해 줘야 하는가? 노만의 마을 사람들이 여전히 본성을 간직하고 있는 이상, 이 비극적인 역사 역시 언제든 되풀이될 것이다.
기준은 매번 달라진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가족들은 비로소 노만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시선이 여전히 완전히 달갑지만은 않다. 노만이 이 차가운 무리에 완전히 녹아들 수 있을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애초에 왜 그가 굳이 이 무리한 다수에 섞여야만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마녀의 저주와 같은 거대한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사람들은 결국 노만과 같은 ‘특이한’ 재능에 기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토록 맹신하던 평범함이란 위기의 순간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특별함과 평범함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 어쩌면 노만이 유령을 보는 눈이 가장 보편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인정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저주로 인해 좀비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에서는, 그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실용적인 생존 기술일 테니까.
우리가 굳게 믿어온 ‘진리’라는 것에 의문이 드는 작품이다. 시간이 흐르고, 배경이 바뀌고,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변하는 것을 과연 진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수가 맹신하고 소수가 가혹하게 배척받는 그 구조가 곧 ‘법’이 될 수 있을까. 인간보다 오히려 이미 한 번 죽은 유령들이 더 잘 알고 있을 이 진실을 우리는 언제쯤 노만이 되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