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이상하게도 별것 없던 날이 더 오래 기억날 때가 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잊었는데 그날 먹었던 음식은 기억나고, 여행의 목적지는 흐릿해졌는데 길에서 보았던 낡은 의자 하나가 머리에 남는다.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은 놓치면서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장면이 오래도록 생각날 때가 있다.
마이라 칼만의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을 읽으면 자꾸 그런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 책에는 대단한 것과 대단하지 않은 것이 뒤섞여 있다. 삶과 죽음, 가족과 역사처럼 무거운 이야기가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 시선은 음식이나 옷, 구두와 의자 같은 것으로 향한다. 그림 옆에 붙은 글도 길지 않다. 생각 하나를 툭 적어놓고 다음으로 넘어가 버린다.
처음에는 조금 산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오래 들여다보니 오히려 그것이 마이라 칼만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삶이라는 것도 원래 그렇게 산만하니까.
기억에는 순서가 없으므로. 우리는 중요한 일을 기록해야 한다고 배운다.
역사책에는 전쟁과 혁명, 죽음과 투쟁이 기록된다. 개인의 삶에서도 생일과 결혼, 이별처럼 이름 붙일 수 있는 사건을 기억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실제로 채우는 것은 그런 날들만이 아니다.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길을 걷다 무엇을 보았는지 같은 일들이 훨씬 많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수많은 날이 모여 한 사람의 생애가 된다.

마이라 칼만은 그 평범한 부분을 자꾸 바라본다. 슬프다고 울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에서 러시아 문학의 거장 안톤 체호프를 기억하는 방식은 조금 남달랐다. 그녀는 한 사람을 기억하면서 죽음에만 시선을 두지 않는다. 체호프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기보다는 그가 살아 있었던 흔적과 그를 둘러싼 것들을 바라본다.
그가 남긴 짧은 글도 그렇다. 하나의 주장을 길게 설명하기보다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둔다. 그림을 친절하게 해설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보았고, 그것을 보며 무엇이 떠올랐는지 몇 마디 남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완성된 이야기라기보다 기억의 조각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기억도 그렇지 않을까?
과거를 떠올릴 때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영화처럼 재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입었던 옷이나 함께 먹었던 음식이 불쑥 생각나기도 한다.
기억은 중요한 것부터 차례대로 줄을 서지 않는다.
칼만의 쪽글도 그런 기억을 닮았다. 알록달록한 그림과 일상의 물건을 보고 있으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한데 엉겨 붙어있다. 가족의 역사와 죽음, 전쟁과 박해처럼 한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등장한다.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비극 역시 이 책의 배경에 놓여 있다.
그런 이야기를 읽다가 다시 음식이나 옷, 가구를 마주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를 잃은 다음 날에도 아침은 온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밖에 나가려면 신발을 신어야 한다. 견디기 힘든 소식을 들은 날에도 버스는 다니고 빵집에서는 빵을 굽는다. 한 사람에게는 세상이 무너진 날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화요일일 수 있다.
삶은 그런 무심함을 가지고 계속된다. 잔인하지만, 동시에 그 무심함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만 기억하지 않는 일. 역사는 사람을 짧게 기억한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희생자, 생존자. 한 사람의 긴 생애가 몇 개의 단어 안에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그 단어 밖의 시간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을 것이고 자주 입는 옷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기분 좋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냈을 수도 있다.
죽음은 한순간이지만 삶은 그 앞에 아주 길게 놓여 있다. 나는 그녀의 책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죽음만 기억한다면 그가 살아 있었던 수많은 날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 질문을 떠올리고 나니 칼만이 그린 사소한 것들이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
구두 하나를 그리고 음식 하나를 기억하는 일이 더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삶을 기억한다는 것은 거대한 사건만 남기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살았던 평범한 하루까지 함께 기억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 순간 슬픔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마음 안에 슬픔 말고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도 생긴 것이다. 칼만의 그림 속 작은 물건들이 내게는 그 자리처럼 보였다. 슬픈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책을 다 읽고 제목을 다시 보았다.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
처음에는 ‘슬픈 것’과 ‘아름다운 것’이 각각 있다고 생각했다. 삶에는 슬픈 일이 있지만 한편에는 아름다운 것도 있다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조금 다르게 읽혔다. 슬픈 것과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서로 다른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의 순간에서 두 감정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기억 때문에 웃을 수 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기에 그때의 풍경이 더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아름다움이 슬픔을 없애는 것도 아니고, 슬픔이 아름다움을 망치는 것도 아니다. 둘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제목에서 ‘슬픈’이나 ‘아름다운’보다 그 사이에 있는 ‘그리고’를 오래 바라보게 됐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슬픔이 끝난 다음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니다.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 별것 아닌 것을 하나 기억해두기로 했다. 책을 덮고 나서 거창한 무언가를 기록하고 싶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오늘 먹었던 음식이나 출근길에 본 사람,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컵처럼 내일이면 잊어버릴 것들을 하나쯤 기억해두고 싶어졌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면 삶의 대부분은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 매일 역사적인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날에는 별일이 없다. 밥을 먹고, 걷고, 사람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가끔 아주 슬픈 일이 생긴다. 그런 날에도 우리는 결국 다시 밥을 먹는다.
마이라 칼만의 그림을 보며 그 당연한 사실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죽음도 있고, 개인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는 역사도 있다. 그런데 그 곁에는 여전히 의자가 있고 음식이 있고 구두가 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사소한 것들을 바라보며 또 하루를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이 내게 남긴 것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라는 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슬픔을 없애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대신 그 옆에 작은 것 하나를 놓아둘 수 있다는 것. 나는 오늘 그 자리에 별것 아닌 의자 하나를 놓아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