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우리는 모두 특별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특별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다.’ 이 말인즉슨 우리 모두가 조금씩 다른 구석들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모두 유일한 존재라는 뜻일 테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특별함은 사랑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미움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네 그대로를 보여주면 돼.”
'에드워드'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보통 인간의 손과 달리 가위로 된 손을 가졌다. 그 손에 스치는 순간 피부는 베이고, 옷은 찢어지며, 물침대는 터져버린다. 에드워드에게 가위손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자, 사람들의 낯선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거무죽죽한 옷에 허연 얼굴, 무엇보다 날카로운 가위손을 가진 에드워드에게 경계심과 흥미로 가득 찬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화장품 외판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펙’만은 그를 측은지심과 사랑으로 품어주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펙’은 마을 사람들과의 파티 음식을 준비하며 ‘에드워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그대로를 보여주면 돼.” 내 그대로를 보여주어도 괜찮다는 이 말을 들어본 지가 언제였을까. 아이였을 시절에는 선생님이나 부모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셨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다름은 특별함보단 약점이 되기 쉽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정상’ 혹은 그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보일까 고민하게 된다. 심지어 누군가를 사랑할 때조차 내 그대로를 보여줄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아니, 그 이전에 나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더라도 상대방이 여전히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다. 나조차 아직 그 믿음을 배우지 못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의 그대로를 보여주어도 괜찮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간 듯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엄마의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펙의 품을 벗어나 마주하는 세상은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다. 마을 사람들은 에드워드를 가십거리로 여기거나, 자신이 아는 의사가 있다며 그를 고쳐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미용사 '조이스'는 에드워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 장애인이라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당신은 멀쩡해요.”
에드워드를 위로하려는 말이지만, 역설적으로 장애인은 '멀쩡하지 않다'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멀쩡하다'는 말에는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구분하는 가치 판단이 개입할 수 있다. 신체적·정신적 특성이 다르거나 불편함을 겪는다고 해서 누군가가 비정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이스의 대사는 겉으로 우호적이고 친절해 보이는 태도 이면에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시선이 숨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펙이 “네 그대로를 보여주면 돼”라고 말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펙은 에드워드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어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조이스는 그를 긍정하기 위해 오히려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에드워드에게 호의를 보이지만, 그 말에 담긴 시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를 그의 자리에 두고 바라보는 것과 내가 서 있는 자리 옆에 세워두고 바라보는 것. 어쩌면 사랑이란 나와 상대방이 다른 자리에 서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가 손을 건네는 법
하지만 에드워드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인물만은 아니다. 그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면을 표현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간다. 에드워드가 살던 성(城)은 드라큘라의 성처럼 음산하고 어둡다. 하지만 성 앞에는 알록달록한 꽃이 피어 있고, 사슴과 손 모양으로 다듬어진 나무들이 자리한다. 음산한 성과 대조되는 조형물들은 아이처럼 순수하고 섬세한 그의 내면을 드러낸다. 겉모습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에드워드의 또 다른 모습인 셈이다.

그는 이러한 재능을 마을 사람들과도 나눈다. 사람들은 그의 특별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에드워드는 가위손으로 마당의 나무를 다듬고 얼음을 조각하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 그에게 조각은 단순한 예술적 행위를 넘어 내면을 표현하고 타인에게 다가가는 방식인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가위손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에드워드는 자신을 세상과 멀어지게 만든 바로 그 가위손으로 세상과의 거리를 좁혀간다.
‘눈 속에서 춤추는 기쁨’
하지만 에드워드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호의는 오래가지 못한다. 여러 사건과 오해가 겹치면서 한때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가위손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끝내 그를 배척하는 명분이 된다. 결국 에드워드는 자신이 살던 성(城)으로 도망친다. 성으로 돌아온 에드워드는 자신이 사랑했던 순간들을 얼음으로 조각한다. 춤을 추고 있는 ‘킴’, 공놀이하고 있는 아이들 등 마을에서의 기억을 얼음 조각상으로 만든다. 그가 얼음을 깎으며 생긴 얼음 가루들은 마치 눈처럼 흩날린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된 킴은 손녀에게 말한다. “너도 언젠가는 눈 속에서 춤추는 기쁨을 알게 될 거다.”라고. 그녀에게 눈은 에드워드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이자, 그를 그리워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눈 속에서 춤추는 기쁨’이란 어쩌면 사랑하는 것들을 더는 슬프게만 그리워하지 않게 되는 순간의 기쁨이 아닐까. 야속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하는 것들의 수는 많이 늘지 않는데, 사랑하는 것들을 그리워할 일들은 많아진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하는 것들을 그리워할 용기가 나지 않아 마음 한구석에 넣어두고는 꺼내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들을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 그리움에 웃게 되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