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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맨홀에 두고 온 것들 - 맨홀(2025) [영화]

한 소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방법

by 이수빈 에디터
2026.10.1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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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대체로 사람이 어렵다.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은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심연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깊은 못'이라는 심연의 사전적인 정의처럼,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그곳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함부로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심연을 다룬 작품에 끌린다. 실제 삶에서는 보이지 않던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사람의 심연을 이해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영화 《맨홀》은 고등학생 '선오'의 심연을 비춘다.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에서 도망쳐 나온 10년 전 어느 날, 누나는 ‘선오’를 폐건물 단지 안의 한 맨홀로 데려간다. 그때부터 그 맨홀은 선오에게 현실로부터의 안락한 피난처가 된다. 그런데 어느 늦은 밤, 선오는 누나에게 맨홀에 아주 중요한 걸 놓고 왔다고 말한다.

       

       

       

      맨홀 속에 있는 것


       


      "그냥 그런 건, 나이 먹다 보면 그런 덴 안 가게 되니까."
       

       

      선오가 맨홀에 두고 온 건 무엇이었을까. 물리적으로 본다면 선오가 그곳에 두고 온 것은 살해당한 이주 노동자의 시체다. 선오와 친구들이 이전에 싸움이 붙었던 이주 노동자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데려와 폭력을 휘두르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선오가 두고 온 것이 단순히 그의 시체라고 하기에는 '맨홀'이라는 공간은 작품 전반에서 상징적으로 기능한다.

       

      영화의 공식 소개에서는 맨홀을 '가장 깊은 심연의 구멍'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심연의 성질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심연의 성질, 다시 말하면 선오가 머무는 맨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과거로 온전히 흘려보내지 못한 침전물'들이다. 맨홀 안에는 시체 말고도 그가 두고 온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아버지의 유품이다. 선오와 누나가 시체를 확인하러 가기 전, 선오는 누나에게 요즘 왜 맨홀에 오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누나는 "그냥 그런 건, 나이 먹다 보면 그런 덴 안 가게 되니까."라고 대답한다. 누나는 어린 시절을 놓아주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선오는 아직 그 시간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맨홀에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공포로 얼룩진 유년 시절,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 그리고 죗값을 치르지 못한 범죄의 결과가 가라앉아 있다.

       

      영화는 이러한 선오의 내면을 유사한 장면의 반복을 통해서도 드러낸다. 어린 선오가 누나와 폐건물 단지로 향하는 장면과, 성장한 선오가 여자친구 ‘희주’와 같은 장소를 찾아가는 장면은 서로 닮아 있다. 그러나 카메라가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어린 선오와 누나가 폐건물 단지로 향하는 플래시백 장면에서, 카메라는 두 아이의 모습을 달리 트래킹숏으로 따라간다. 카메라는 흔들림 없이 수평으로만 움직이며, 트래킹숏 안에서는 두 인물의 측면만이 비춰진다. 이와 같은 구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장면을 마치 액자 속 그림처럼 납작하게 바라보도록 하며, 인물과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생성한다. 이를 통해 플래시백 장면의 회상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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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희주가 선오에게 "오늘은 우리 집 가지 말고 너희 집 가자."라고 말하며 함께 길을 걷는 장면에서는 같은 트래킹숏이지만 핸드헬드 기법을 사용한다. 카메라 역시 완전한 측면이 아닌 사선에서 인물을 담아냄으로써 입체감을 더한다. 앞선 플래시백 숏이 관객과 인물 사이에 거리감을 형성했다면, 이 숏은 핸드헬드와 사선 구도를 통해 관객을 인물의 현재 속으로 끌어들이며 현장감과 몰입감을 강화한다.

       

      폐건물 단지를 바라보는 인물을 비추는 숏에도 차이가 있다. 어린 선오와 누나가 폐건물 단지의 펜스 앞에 서 있는 장면에서는 두 인물을 부감의 웨이스트숏으로 잡는다. 이는 인물이 장소로부터 느끼는 심리적인 위압감을 보여준다. 반면 성장한 선오와 희주가 같은 장소에 서 있는 장면에서는 두 인물을 앙각의 바스트숏으로 잡는다. 이는 앞서 언급한 부감의 웨이스트숏과는 다르게 인물, 특히 희주의 표정과 반응에 집중하도록 한다. 시간이 흘러 폐건물 단지 앞은 더 허름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냄에도 불구하고, 희주는 “뭐야, 장난쳐?”라고 말할 뿐이다. 


      이처럼 영화가 숏의 크기와 카메라 앵글, 촬영 방식을 변주하면서도 유사한 시퀀스를 반복한 것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선오의 내면이 자라지 못했음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제 선오의 곁에는 누나가 아닌 희주가 있고, 폐건물 단지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어릴 적 괴담도 더 이상 무섭지 않다. 하지만 선오의 내면은 10년 전 누나와 그곳으로 향하던 때와 다르지 않다. 그렇게 선오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한때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피난처인 맨홀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결과를 숨기는 장소가 되었다. 이처럼 ‘맨홀’은 ‘아버지의 학대로부터의 피난처’이자 ‘시체 유기의 장소’라는 양면성을 통해 아이러니를 형성하는 동시에, 선오가 과거로 온전히 흘려보내지 못한 내면의 침전물들이 가라앉아 있는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이러니


       

      맨홀뿐만 아니라 영화 곳곳에는 양면적인 성격을 지닌 요소들이 등장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아버지라는 존재다. ‘선오’의 아버지는 집 안에서는 흉악한 가정 폭력범이었지만, 집 밖에서는 영웅으로 대우받는 순직 소방관이기도 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양면적인 모습은 선오에게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혼란을 남긴다.


      영화는 이러한 혼란을 가족 안에서의 선오와 비행 청소년들 사이에서의 ‘선오’를 대비하여 보여준다. 가령 선오와 어머니가 함께 식사하며 "앞으로 우리 셋, 잘살아 보자."라고 말하는 장면 다음에는 선오가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이 이어진다.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선오의 일상은 아버지가 남긴 혼란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하천에서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리게 되는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아버지를 향한 선오의 감정은 카메라 연출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맨홀이 열리면 카메라는 맨홀의 내부보다 이를 응시하고 있는 인물의 표정을 담아내는 것에 주력한다. 어린 ‘선오’가 맨홀 속을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극단적인 앙각을 취한 채 서서히 달리 인하며, 어린 선오가 느끼는 두려움을 강조한다. 반면 어머니와 누나가 순직한 소방관인 아버지의 추모행사를 다녀왔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맨홀 속에 아버지의 유품을 던진 후, 선오를 비추는 장면에서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강조된다. 이때 카메라는 앞선 장면과 동일한 크기의 숏과 앵글을 취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달리 인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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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두 장면은 거의 동일한 숏의 크기와 카메라 앵글, 촬영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아버지를 향한 선오의 서로 다른 감정을 드러낸다. 어린 선오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현재의 선오에게는 유품을 맨홀 속에 내던질 만큼 증오와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는 맨홀의 내부가 아닌 그 안을 바라보는 인물의 얼굴을 포착함으로써 ‘선오’의 심연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부에서 선오는 살인죄에 대한 감형을 받기 위해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를 긍정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집 밖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자신에게는 폭력의 가해자였던 아버지를, 이제는 자신의 죗값을 줄이기 위해 긍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선오의 내적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든다.

       

       

       

      맨홀과 하천, 심연과 외부 세계


       

      맨홀이 선오의 심연을 상징한다면, 그와 친구들의 아지트이기도 한 하천은 외부 세계를 상징한다. 영화에서는 촛불과 폭죽이라는 사물을 통해 이를 드러낸다.

       

      촛불과 폭죽은 빛을 발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촛불은 자신을 소모하며 조용히 타들어 가는 반면 폭죽은 화려한 색과 소리를 동반하며 터지는 순간의 모습에 주목하게 만든다. 영화는 맨홀 속 촛불을 보여준 직후 하천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장면을 제시한다. 두 장면의 병치는 선오의 내면과 외부 세계의 간극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맨홀과 하천은 서로 분리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선오의 내면과 외부 세계 역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그렇다면 선오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와 상처는 외부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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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왜 ‘사다르 마타’를 살해했나


       

      언뜻 보기에 비행 청소년들의 우발적인 범행으로 보이는 이주 노동자 ‘사다르 마타’의 살인은 사실 지독한 타자화의 결과이다.  선오의 친구들은 이주 노동자들을 '쟤네'라고 칭하며 자신들과 구분 짓는다. 특히 선오의 여자 친구이자 이주 노동자인 형부를 둔 희주가 ‘사다르 마타’에 대한 폭행을 제지하려 하자, 친구들 중 한 명은 "왜 또 쟤네 편 들게?"라고 말한다. 이러한 대사는 이주 노동자들을 '우리'와 구분되는 외부의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살해당한 사다르 마타가 이전에 선오에게 폭력을 가한 인물인지 영화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역시 타자화의 양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오와 친구들은 사다르 마타를 개별적인 인격체가 아닌 '이주 노동자'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 개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주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폭력 및 살해 행위는 단순한 타자화를 넘어, 개인의 분노와 불안을 이주 노동자라는 취약 계층에게 표출하고자 하는 시도로 읽힌다. 사다르 마타는 선오가 겪는 분노의 직접적인 이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대상이 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분노를 실제 원인인 아버지에게 표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감정이 이주 노동자에게 전치된 것이다. 이 순간 폭력의 피해자였던 선오가 가해자가 된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다시 맨홀 속으로


       

      선오는 맨홀에 두고 온 것을 되찾는다. 재판을 통해 법적인 처분도 받는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끝난 것일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리의 부재'다. 어머니와 누나가 사는 우리 집에도, ‘희주’의 집에도 더 이상 그의 자리는 없다. 영화는 이러한 선오의 모습을 버드아이뷰 숏을 통해 보여준다. 교차로 위의 선오는 자신의 앞에 여러 길이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곳으로도 향하지 못한다. 심지어 횡단보도도 아닌 도로의 한가운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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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초반부, 어린 선오와 누나가 폐건물 단지를 가로질러 맨홀로 향할 때에도 버드아이뷰 숏이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어린 선오와 누나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길조차 나 있지 않은 폐건물 단지를 헤치며 걸어간다. 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 나와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아이 특유의 생명력을 지닌 채 살아간다. 길이 없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두 장면은 길이 없어도 나아갈 수 있었던 선오가 정작 여러 갈래의 길이 놓인 현재에는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는 역설을 드러낸다. 두 버드아이뷰 숏의 대비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은 선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땅 위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선오’는 결국 다시 맨홀로 들어간다. 아마 이것이 그의 진짜 형벌일 것이다.

       

      보호관찰이 종료되던 날, ‘선오’는 묻는다. 

       


      왜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않을까요? 제가 죽인 ‘사다르 마타’에 대해서요.”
       

       

      영화 《맨홀》은 어쩌면 서로 다른 이유로 자리가 지워진 이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사다르 마타'와 '선오'처럼 말이다.

       

       

       

      이미지 출처


      영화 《맨홀》(2025) 포스터: YTN, 「[윤성은의 영화이야기] 구멍을 인정하기까지 버텨야 할 시간, <맨홀>」(2025. 11. 13.)

      본문 내 영화 장면: 영화 《맨홀》(2025) 직접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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