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Review] 그 이야기는 누가 완성했나 - 파라노만 [영화]

마녀라는 이름 뒤, 300년 동안 감춰졌던 목소리

by 오수민 에디터
2026.08.18 18:53

*

본 글은

애니메이션 <파라노만>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완성하는 데 익숙하다.


짧은 영상과 몇 줄의 게시물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한다. 설명되지 않은 부분은 익숙한 유형과 이미지로 채우고, 한 번 완성한 이야기는 좀처럼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삶보다 타인이 붙인 이름으로 더 오래 기억된다. 이러한 판단이 공동체의 확신이 되면 한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 그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동체가 대신 완성한 이야기가 그의 삶보다 더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common-8.jpg

 

 

2013년 국내에서 처음 개봉한 뒤 2026년 4K 리마스터링으로 돌아온 라이카 스튜디오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파라노만>은 한 공동체가 타인의 이야기를 대신 쓰고, 그렇게 빼앗긴 이야기가 당사자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유령과 좀비, 마녀의 저주가 등장하지만, 묻는 것은 누가 진짜 괴물인가 보다 누가 한 사람을 괴물로 기억하게 만들었는가에 가깝다.


블라이스 할로우에 사는 소년 노만은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다. 아침마다 교통사고로 숨진 유령과 인사를 나누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영혼과 텔레비전을 본다. 그에게 죽은 자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을 함께하는 이웃에 가깝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노만은 그저 기이한 아이다. 학교에서는 놀림받고, 아버지는 아들이 유령을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먼저 곁에 다가오는 사람은 자신처럼 따돌림을 당하는 닐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 프렌더개스트가 마을의 오랜 저주를 막아야 한다는 임무를 남기고 죽는다. 300년 전 마녀로 몰려 처형된 애거사 프렌더개스트가 깨어나는 것을 막으려면 매년 정해진 날 마녀의 무덤에서 책을 읽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식은 제때 이루어지지 못하고, 과거 마녀재판에 참여했던 판사와 배심원들이 좀비로 되살아난다. 저주를 풀기 위해 나선 소년의 곁에는 닐과 코트니, 미치,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앨빈까지 뜻밖의 일행으로 합류한다.

 

 


마녀의 이름으로 쓰인 이야기


  

<파라노만>의 배경인 블라이스 할로우는 1692년 세일럼 마녀재판을 연상시킨다. 당시 세일럼에서는 200명이 넘는 사람이 마녀로 고발되었고, 스무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영화 속 마을은 이 비극을 반성하기보다 관광 상품으로 소비한다. 마녀의 얼굴은 동상과 기념품, 학교 연극과 상점 간판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는 실제 세일럼이 마녀재판의 역사를 핼러윈 축제와 관광 산업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풍경과도 겹친다. 비극은 끊임없이 재현되지만 그 안에서 희생된 사람의 얼굴은 희미해진다. ‘마녀’가 마을의 마스코트로 소비되는 모습은 과거의 폭력이 어떻게 오락과 이미지로 가공되며 본래의 맥락을 잃는지를 보여준다. 공동체는 마을이 죽음으로 내몬 한 사람을 기억하는 대신, 그 삶을 다시 ‘마녀’라는 이미지 안에 가둔다.

 


common-2-2.jpg


 

300년 전 죽은 사람들이 다시 무덤에서 일어난다는 설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제대로 반성하지 않은 과거는 저주가 되어 다음 세대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다. 처음에는 저주의 희생자처럼 보였던 좀비들이 사실 어린아이에게 사형을 선고한 가해자였음이 드러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두려워했고, 마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 생명을 빼앗았다. 현재의 주민들 역시 좀비가 나타나자 무기와 횃불부터 꺼내 든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것은 저주만이 아니다. 낯선 존재의 말을 듣기 전에 그를 위험한 괴물로 규정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도 함께 되풀이된다.

 

 


괴물의 얼굴을 뒤집는 방식


  

이러한 문제의식은 영화의 장르적 형식과도 맞닿아 있다. 각본과 공동 연출을 맡은 크리스 버틀러는 작품의 출발점을 ‘존 카펜터와 존 휴스의 만남’으로 설명했다. 존 카펜터식 호러의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 위에 존 휴스의 성장영화에서 볼 수 있는 외톨이 청소년과 가족, 학교의 문제를 포갠 것이다. 여기에 <스쿠비 두>와 1980년대 소년 모험영화, 고전 좀비영화의 흔적이 더해진다. 특히 버틀러는 좀비영화가 본래 사회적 논평을 품어온 장르라는 점에서 따돌림과 편견을 이야기할 가능성을 발견했다.

 


common-6.jpg


 

<파라노만>은 이러한 장르의 전형을 계속해서 배반한다. 살아난 시체들은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괴물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전하려 하고, 사악한 노파일 것이라 예상했던 마녀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건장한 운동선수 미치 역시 외양만으로 짐작한 정체성을 가볍게 벗어난다. 영화 말미 그는 코트니의 데이트 신청에 자신의 남자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자고 답한다.


2012년 당시 주류 가족용 애니메이션에서 성소수자 캐릭터가 이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버틀러는 관객이 미치의 외모와 말투만 보고 그를 이성애자라고 짐작하게 한 뒤 그 판단을 뒤집는다. 이를 통해 편견을 가진 것은 영화 속 마을 사람들만이 아니었음을 관객 스스로 깨닫게 한다. 이 작품에서 거의 모든 인물은 누군가를 판단하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판단 받는다.


영화가 인물을 하나의 외형과 유형으로 고정하지 않는다면, 라이카의 제작 방식 역시 하나의 얼굴만으로 인물을 완성하지 않는다. 제작진은 컬러 3D 프린터로 수천 개의 눈썹과 입 모양을 출력하고, 서로 다른 상·하단 얼굴을 프레임마다 교체해 약 150만 가지 표정 조합을 만들었다. 스크린 위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인물의 표정은 사실 수많은 얼굴 조각을 교체하고 조합한 결과다. 이는 타인이 붙인 하나의 이름으로는 한 사람을 설명할 수 없다는 영화의 태도와 닮았다. 마녀, 괴물, 불량배, 운동선수라는 고정된 얼굴을 벗겨낼 때 비로소 그 안의 서로 다른 표정과 이야기가 나타난다.

 

 

 

복수를 멈추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법


 

그렇다고 영화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단순히 바꾸는 데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애거사는 분명 억울한 희생자다. 그녀의 분노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문제는 복수가 과거의 가해자를 넘어 현재의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향하고, 오랜 증오가 마침내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게 만든다는 데 있다.


유일하게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년은 그를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성급하게 용서하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먼저 자신 역시 같은 능력 때문에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아 왔다고 말한다. 모두가 무서운 마녀만을 볼 때, 그 이름 뒤에 가려진 애거사의 얼굴을 발견한다.


두 사람은 같은 능력을 가졌지만 서로 다른 길에 서 있다. 애거사는 다름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노만은 배척당하면서도 끝내 곁에 남아준 사람들을 만났다. 아무리 밀어내도 곁에 남아준 닐, 위험에 빠졌을 때 함께 싸우는 누나와 친구들, 서툴게나마 아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가족이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가족은 할머니의 유령이 함께 있다는 그의 말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다. 특별한 능력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밀어내지는 않게 된 것이다.

 

 

131.jpg

 

 

이러한 관계의 여부가 두 사람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주인공이 분노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은 것은 상처가 작아서도, 본래부터 더 선한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혼자였던 애거사에게도 증오 밖의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의식을 이어온 후대의 사람들은 동화책을 애거사와 관계 맺는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를 잠재우는 주문으로 사용했다. 반면 소년은 책을 덮고 그동안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마녀’의 말을 듣는다. 저주를 풀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더 강한 힘이나 새로운 주문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태도였다.


영화 초반 할머니는 사람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수롭지 않은 농담처럼 지나간 이 말은 결말에서 저주를 끝내는 방법이 된다.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과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다르다. 전자가 이미 정해진 결말을 반복하는 일이라면, 후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결말을 함께 만드는 일이다. “그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느냐”는 질문에 소년이 “네가 정하는 것”이라고 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악을 물리친 승리라기보다 폭력의 반복을 멈추고 타인에게 빼앗겼던 이야기를 되찾는 순간에 가깝다. 복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과거의 폭력을 없던 일로 만드는 용서가 아니다. 자신을 해친 사람들에게 존재와 기억 전체를 내어주지 않는 일이다. 오랫동안 ‘마녀’로만 기억되었던 애거사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이름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되찾는다. 괴물의 얼굴을 벗은 자리에는 다시 한 명의 아이가 남는다.


우리는 유령을 볼 수 없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한 뒤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일에는 익숙하다. <파라노만>은 그 이름 뒤에 가려진 얼굴을 다시 보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그가 들려줄 이야기를 기다리는 대신 이미 알고 있는 결말만 반복해서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컬쳐리스트 오수민 .jpg

 

 

오수민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PRESS] 고양이를 따라 들어간 하루키의 세계 [전시]
  2. 02 [PRESS] 둥글고 말랑말랑한 상실 - 지상의 밤
  3. 03 [PRESS] 가장 뜨거운 계절은 왜 가장 오래 남는가 - 여름을 닮은 우리 [전시]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