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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파라노만>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스톱모션이라는 손끝의 예술
초등학생 때 친구와 함께 찰흙을 빚어 핑구를 닮은 인형을 만든 적이 있다. 책상 위에 세워두고 한 컷씩 자세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완성한 이야기는 삼 분도 되지 않았지만, 둘이 힘을 모아 뭔가를 끝냈다는 사실 하나로 뿌듯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코렐라인: 비밀의 문>을 처음 봤을 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단추 눈을 가진 다른 엄마가 화면을 채우던 순간, 이게 사람 손으로 한 컷씩 만든 그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단추 눈과 공간을 넘나드는 문을 중심에 놓고, 아트인사이트에 오피니언으로 쓴 적도 있다. 그 기억을 안고 <파라노만> 상영관에 앉았다. 기대했고, 만족했다.

스톱모션은 흉내 낼 수 없는 장르다. 인형의 관절 하나, 손가락 마디 하나까지 사람 손이 지나갔다는 증거가 화면에 고스란히 남는다. <파라노만>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눈이 짝짝이다. 왼쪽 눈꺼풀이 오른쪽보다 살짝 처지고, 눈동자 위치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표정 하나를 위해 3D 프린터로 뽑아낸 부품이 150만 가지에 달했다는 후일담을 듣고 나면, 그 짝짝이 눈이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는지 납득이 간다. 좀비에게 쫓기는 자동차 추격 신에서는 인형의 머리카락 한 올, 옷자락의 흔들림까지 프레임마다 손으로 다시 잡았다. 사람 손이 만든 티가 나는 게 아니라, 사람 손이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각본과 공동연출을 겸한 크리스 버틀러, 그리고 함께 메가폰을 잡은 샘 펠. 한 사람이 이야기와 카메라를 동시에 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볼 때 유효한 정보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나 <유령신부>가 스톱모션으로 쌓아 올린 그로테스크한 정서를 이어받으면서도, <파라노만>은 한 발 더 나간다. 뇌를 밟고, 부패한 시체와 몸싸움을 벌이고, 사지가 뜯겨나간 좀비들이 스크린을 채운다.
미국 PG등급, 국내 12세 관람가라는 숫자로는 다 담기지 않는 강도다. 그런데 이 서늘함을 감당하는 카메라가, 뒤로 갈수록 마을 사람들을 찍는 방식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좀비를 찍는다. 처음엔 괴물처럼 보이던 존재가 뒤로 갈수록 사람처럼 보인다면, 그건 각본이 아니라 연출의 선택이다.
2. 웃음과 공포 사이
이 정교함은 코미디에도 그대로 쓰인다. 좀비가 마을에 나타나자 주민들은 몽둥이와 삽, 심지어 정원용 갈퀴까지 들고 뛰쳐나온다. 다들 좀비 하나 죽이겠다고 혈안이 되어 뛰어다니는 꼴 자체가 우습다. 그런데 그 누구도 예상 못 한 순간이 있다. 술집 카운터를 지키던 아주머니가 등 뒤에서 샷건을 꺼내 드는 장면이다. 예고도 없이, 가장 무해해 보이던 인물에게서 튀어나온 총 한 자루가 극장을 웃음으로 뒤흔든다. <파라노만>의 개그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예상한 곳이 아니라 예상 못 한 곳에서 웃긴다.
다만 이 영화, 생각보다 훨씬 무섭고 징그럽다. 아이들 애니메이션이라는 방심을 깨고 부패한 살갗과 뒤틀린 몸짓을 클로즈업으로 들이민다. 그리고 이 무서움과 웃김 사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대사 한 줄이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 유령이 노만과 함께 좀비 영화를 보다가 툭 던지는 잔소리, "폭력 대신 말로 하면 좀 좋아?" 웃자고 넣은 대사처럼 흘러가지만, 영화는 두 시간 내내 이 한 줄을 증명하는 데 쓴다. 좀비를 몽둥이로 잠재우려는 어른들도, 노만을 화형에 처하려는 어른들도, 결국 말 대신 폭력을 고른 사람들이다.
3. 다섯 얼굴, 다섯 개의 표정

노만은 아침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령에게 인사를 건네며 하루를 시작한다. 식탁 맞은편, 아무도 없는 자리에 대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그 모습이 이 영화가 노만을 소개하는 첫 이미지다. 반쯤 감긴 눈, 힘없이 처진 어깨, 좀비 영화 티셔츠. 죽은 자와 대화한다는 게 알려지자 가족도 이웃도 그를 이상한 아이 취급한다. 코디 스밋 맥피가 목소리를 맡은 이 소년은 실은 겁이 많다. 무섭지 않아서 나서는 게 아니라, 무서운데도 나선다. 그 차이가 노만을 여느 애니메이션 주인공과 다르게 만든다.

닐은 뚱뚱하다는 이유로 놀림받고, 알레르기 때문에 자주 코를 훌쩍인다. 그런데도 노만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동정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유령을 본다는 아이라니, 닐에게는 무서움보다 신기함이 먼저다. 자신이 왜 놀림받는지 정확히 알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다섯 명 중 자존감이 가장 단단한 인물이기도 하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묘지 한복판까지 함께 뛰어드는 데 망설임이 없다.

코트니는 노만의 누나다. 등장할 때마다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고, 근육질 남자를 보면 눈이 뒤집힌다. 동생을 찐따라고 부르며 성가셔하지만, 노만이 사라진 걸 알아채자마자 가장 먼저 뛰쳐나가는 것도 코트니다. 아빠가 그녀의 말투와 태도를 통제하려 들 때마다 코트니는 물러서지 않고 맞선다. 결정적인 순간, 성난 어른들 앞을 가로막고 서서 노만과 좀비들을 지키는 쪽도 코트니다. 철없어 보였던 소녀가 그 순간 가장 어른스러운 판단을 내린다.
미치는 닐의 형이다. 근육이 터질 듯한 몸, 그러나 그만큼 채워지지 않은 머리. 코트니는 미치를 보자마자 반한다. 자동차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머리 쓰는 일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이 캐릭터의 설정된 농담이다. 그런데 영화 끝자락에서 미치가 툭 던지는 한마디가 이 농담의 결을 바꿔놓는다. 함께 영화 보러 가자는 코트니의 제안에 미치는 "너 내 남자친구 완전 좋아할 거야, 걔 완전 로맨스 영화 덕후거든" 하고 답한다. 코트니의 얼굴에서 기대가 스르르 빠져나간다. 그뿐이다. 영화는 이 사실에 어떤 음악도, 어떤 클로즈업도 붙이지 않는다. 편견 없는 세계를 주장 대신 연출로 증명하는 방식이다.
앨빈은 노만을 매일 괴롭히는 학교 일진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지만 간단한 맞춤법조차 자주 틀린다. 여자에게 관심이 많지만 정작 인기는 없다. 평소엔 기세등등하게 약한 아이를 밀치고 다니다가, 진짜 좀비와 마주치는 순간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허세로 쌓아 올린 자존심이 실제 위협 앞에서 제일 먼저 무너진다는 점에서, 앨빈은 뒤에 등장할 어른들의 축소판이다. 큰소리치던 사람일수록 진짜 두려움 앞에서 약하다는 걸, 이 캐릭터가 미리 보여준다.
4. 가려진 진짜 피해자

영화는 큰 반전 하나를 숨기고 있다. 마녀란 초록색 피부에 매부리코를 하고 빗자루를 타고 다니며 사람을 해치는 존재라는 편견, 영화는 이 편견을 그대로 스크린에 세워놓고 뒤집는다. 마녀로 불리던 존재의 정체는 억울하게 처형당한 소녀 아가사 프렌더개스트였다. 마녀가 아니었는데도, 노만처럼 유령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어른들 손에 죽었다. 이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마을 설립 신화 속 '일곱 명의 마녀 희생자'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뒤바뀐다. 진짜 피해자는 그 신화 뒤에 가려져 있던 소녀 한 명이었다.
이 반전은 초반의 한 장면을 뒤늦게 설명해준다. 프렌더개스트 할아버지가 노만에게 물려준 책은 어른이 아이에게 읽어주는 동화책이다. 처음엔 왜 하필 동화책인지 의아했다. 아가사는 죽던 순간 아직 어린아이였다.
5. 멈추지 않는 눈덩이

마을 이름 블라이스 할로우는 우연이 아니다. 실제 모델은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1692년 마녀재판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곳이다. 이웃의 손가락질 하나로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 세일럼은 그 비극을 마녀박물관과 기념품으로 판다. 블라이스 할로우도 다르지 않다. 마을은 해마다 아가사의 전설을 연극으로 공연하고 관광 상품으로 판다. 가해자였던 마을이 대대로 피해자 행세를 하며 그 죽음을 되팔아 온 것, 영화가 가장 냉소적으로 겨누는 지점이다.
영화가 겨누는 두 번째 과녁은 그 마을을 움직이는 집단심리다. 노만이 좀비들의 정체, 즉 아가사에게 용서받고 싶어 하는 마을 사람들의 원혼이라는 걸 알아채고 그들을 감싸려는 순간, 어른들은 노만을 마녀로 몰아 교수형이든 화형이든 처하려 든다. 노만의 말을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말을 하는 한 사람을 일단 듣고 보는 대신 침묵시키는 쪽을 택하는 무리,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면 그건 300년 전 세일럼과 지금 우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무리를 눈덩이로 만드는 건 악의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할머니의 유령이 노만에게 건넨 말,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야, 노만. 그것 때문에 너 자신이 변하지만 않으면 돼"는 노만 한 사람만을 향한 조언이 아니다. 300년 전에도 지금도, 두려움 앞에서 자신을 잃고 폭도로 변해버린 마을 전체를 향한 말이기도 하다.
영화 곳곳에 어른과 아이의 대척점이 심어져 있다. 코트니가 사춘기다운 말투를 쓰거나 화를 낼 때마다 아빠는 딸을 통제하려 든다. 학교 연극 선생님은 자기 경력을 위해 아이들에게 배역을 강요한다. 노만을 처형하려는 어른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참다못한 코트니가 내뱉는 한마디, "어른 씩이나 되어선!" 이 대사 하나가 영화 전체가 그리는 어른과 아이의 대척점을 요약한다.
이 대척점 위에서 노만이 아가사에게 던지는 대사가 있다. "나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좋은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하는거야?" 복수에 사로잡혀 세상을 가해자와 피해자로만 나누던 아가사에게, 노만은 이분법 바깥을 가리킨다. 그 한 줄이 영화 전체의 주제 의식을 관통한다. 편견은 괴물을 만들고, 그 괴물은 언제나 편견을 가진 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제목 '파라노만'은 초자연적 현상을 뜻하는 '파라노멀'과 주인공의 이름 '노만'을 합친 말이다. 유령을 보는 소년의 이름이 곧 영화의 제목이 되는 이 말장난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받던 아이가 결국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는 사실과 정확히 포개진다.

다시 그 짝눈으로 돌아간다. 완벽하게 대칭인 눈보다, 살짝 어긋난 눈이 더 사람처럼 보였다. 편견은 대칭을 찾다가 사람을 놓친다. 노만도, 아가사도, 미치도,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을 뿐 틀린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