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Review] 사람들은 겁에 질리면, 생각보다 훨씬 끔찍해지곤 한다. - 파라노만 [영화]

스톱모션 명가 라이카의 영화 <파라노만>이 보여주는 '공포의 얼굴들'

by 김정현 에디터
2026.08.20 14:15

*

본 리뷰는

애니메이션 <파라노만>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3.jpg

 

 

만약 오늘 밤 내가 사는 동네에 좀비가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할까? 아마 열에 아홉은 무작정 도망치거나, 손에 잡히는 무기를 들고 맞서 싸울 것이다. 그동안 무수한 팝컬처와 좀비물들을 소비해 오면서 우리 머릿속엔 이미 나름의 상황별 대처 매뉴얼이 새겨져 있으니까.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단 한 번도 좀비와 대화해 볼 생각은 못 할까?"

 

말도 안 통하는 좀비와 무슨 대화냐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좀비조차도 사실 우리가 만들어 낸 크리처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제로 '좀비'와 형상이 비슷한 존재가 나타나더라도 어떤 행동을 취할 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 새겨진 메뉴얼들은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맞는 것보다, 문제의 본질을 똑바로 마주하는 게 더 두려워 만들어진지도 모른다. 각자 그럴싸한 해결책을 찾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문제 앞에서 겁에 질려 허우적거리는 우리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메인 포스터.jpg

 

 

영화 <파라노만>의 주인공 노만은 남들과 같은 행동을 취하기 보다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이다. 겉보기엔 평범한 소년이지만, 사람들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다. 바로 세상을 떠난 유령들을 보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마을 사람들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는 노만을 '별종' 취급하며 멀리하지만, 노만에게는 유령이나 산 사람이나 딱히 다를 게 없이 대한다. 오직 자신처럼 왕따를 당하는 친구 닐만 노만을 이상하게 보지 않고 멋지게 여길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이 마을에 내려진 오랜 저주를 막아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 유언은 300년 전 마녀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애거사의 저주를 막기 위해 매년 정해진 날 무덤가에서 동화책을 읽어줘야 한다. 하지만 그 의식은 실패하고, 마녀를 비롯해 과거 마녀재판을 주도했던 판사와 배심원들이 좀비가 되어 무덤에서 깨어난다.

 

한편, 좀비들이 나타나자 마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횃불과 무기를 집어 들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좀비들이 아직 누구 하나 해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 광기 어린 오해와 공포는 300년 전에도 똑같았다. 노만처럼 죽은 이들과 소통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던 어린 소녀 애거사는, 단순히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녀'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처형당했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아가기도 전에 '위험한 괴물'로 정의해 버리는 집단의 이기심이 300년이 지나 또 되풀이된 셈이다.

 

이건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쉽게 목격하는 '마녀사냥'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 속 평범함의 범주에 벗어나는 Outcast들이 확실한 근거도 없이 악마화되고 한쪽으로 여론을 몰아지는 현상 말이다.

 

영화 초반, B급 호러 영화를 보던 노만의 할머니 유령이 좀비와 대치한 사람을 보며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가 있다. "서로 대화해 볼 생각은 안 하나? 그럼 이야기가 달라질 텐데."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이 대사는 알고 보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웃픈' 복선이었다. 훗날 마을에 진짜 좀비들이 나타났을 때, 겁에 질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횃불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동안 좀비들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서 있거나 도망칠 뿐이었다. 서로 소통하고 오해를 풀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었음에도, 공포에 눈이 멀어 섯부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보여준 비겁함을 찌르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무서운 형상과 남들과 다르다는 것보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내몰아 내기 위해 점점 위협적으로 동조되는 군상이 더 무섭게 혹은 잔인하게 느껴졌다.

 

재미있는 건 영화의 제목에서도 이런 주제의식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영어 접두사 'para-'는 '옆에 나란히(parallel)'라는 뜻도 되지만, 동시에 '정상 범주를 벗어난/피해망상(paranoid)'이라는 뉘앙스도 가진다. '정상'이라는 테두리 바로 옆으로 밀려나 있는 소외된 이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집단적인 오해와 피해의식(Paranoid). 영화는 제목인 <파라노만(ParaNorman)>에서부터 이 미묘하고도 잔인한 경계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란히 서로를 대하기 전 조금의 범주라도 벗어난다면 완전히 반대에 대치될 수도 있는 점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이 미묘한 심리적 경계와 인간의 미세한 감정을 포착해 내기 위해, 영화 <파라노만> 제작진이면서 스톱모션의 독보적인 명가, 라이카(LAIKA) 스튜디오은 말 그대로 인간의 한계에 가까운 노동과 집념을 집어넣었다.

 

 

[포맷변환]다운로드.jpg

 

 

영화 <파라노만>을 만들기 위한 레시피

 

- 1초의 장면을 위해 24개의 입 모양 모형을 일일이 교체하는 정교함

- 이전 프레임과 조금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극도의 집중력

- 8,000파운드의 프린팅 가루, 77갤런의 접착제

- 40,000개의 얼굴 모형과 66,400개의 표정 고정용 자석

- 50개의 무대, 300개의 인형, 5,000개의 칼날, 729개의 사포

- 25,000장의 니트릴 장갑을 소비하며, 인간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무려 127년에 달하는 수작업의 시간

 

Made in LAIKA Studio

출처 LAIKA Studio 유튜브

  

 

손끝으로 미세한 표정 조각들을 한 땀 한 땀 바꿔가며 만든 이 어마어마한 레시피의 결과물 속에는, 요새 효율성만 강조하는 AI 기술로는 도저히 품을 수 없는 '진짜 사람의 온기와 표정'이 흘러넘친다.

 

이 미련하리치만큼 고집스러운 아날로그 제작 방식을 지켜나가는 주인공이 바로 라이카(LAIKA) 스튜디오다. 단추 눈을 한 인형들과 기괴하면서도 매혹적인 세계관을 선보였던 <코렐라인>으로 대중에게 스톱모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그 제작진이다.

 

라이카 스튜디오가 굳이 스톱모션을 고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손으로 직접 깎고 만져서 만든 인형과 무대는, 디지털 그래픽이 줄 수 없는 특유의 질감과 분위기를 풍긴다. 살짝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기운을 가감 없이 풍기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손길이 만들어내는 아주 섬세한 미세 표정 변화를 통해 '인간 내면의 복잡하고 치밀한 감정'을 완벽하게 포착해 내기 때문이다.

 

첫 장면부터 여자가 뇌를 밟고 미끄러지는 <파라노만>부터 피와 잘린 살점이 그대로 표현되는 <쿠보와 전설의 악기>, 잔혹한 악당이 등장하는 <박스트롤>에 이르기까지, 라이카는 스톱모션이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마녀'로 몰아세우는 소외된 약자들의 이야기와 인간성의 진면목을 끊임없이 들추어낸다.


 

"두려워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노만. 진짜 중요한 건 그 두려움에 먹히지 않는 거지."


 

영화 속 노만의 할머니가 노만에게 건네는 이 대사는 공포 때문에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묵직한 경고다.

 

우리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굴복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폭력과 배타성을 행사한다면, 그것만큼 비겁하고 잔인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공포에 눈이 멀어 무작정 횃불부터 들어 올리는 것은 가장 손쉬운 도피일 뿐이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가만히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시도하는 데서 나온다. 라이카 스튜디오는 장인들의 수억 번의 손짓을 통해, 우리가 공포에 가려 놓치고 살았던 그 아름다운 '사람의 표정'들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스크린 위에 새겨두며, 애니메이션 <파라노만>은 오는 8월 CGV 단독 재개봉한다.

 

 

김정현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Opinion] 그 끝이 비극일지라도 - 왕과 사는 남자 [영화]
  2. 02 [Opinion] 나도 사실 체인소맨 본 적 없어 [음악]
  3. 03 [Review] 알다시피 현실은 다소 메마르기 때문입니다. - 페르난도 보테로展 [전시]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