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 들어서면 한국인이라면 알고 있는 역사의 상처가 언제나 느껴진다. 1896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을미사변, 乙未事變)된 후 덕수궁이 황제의 중심적 거처로 정해지면서, 사실상 일본의 지배에 들어서게 된 비운의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경궁 등과 같은 궁궐과 달리 전통적인 가옥 사이사이 서구적인 건물과 연못이 들어서 있는 덕수궁은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지워져 가는 조선이 느껴져, 왠지 고종이 좋아하던 커피의 씁쓸함이 떠오른다.
이러한 국가유산을 모바일 게임 <쿠키런: 오븐브레이크>와 <쿠키런: 킹덤>을 창시한 데브시스터즈가 국가유산청과 함께 12월 9일 국가유산의 날을 맞아 새롭게 해석했다.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린 특별전 '쿠키런: 사라진 국가유산을 찾아서'라는 전시명처럼, 이번 전시는 역사 속에서 희미해진 대한황제 고종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나는 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끝내 그러지 못했소.”
“새긴 뜻은 희미해지고, 그 존재는 흐릿해졌으며…
내 손에서 놓쳐버린 그것들을,
이제는…
누구도 다시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소”
이 목소리를 들은 건 다름 아닌 쿠키런 캐릭터들(용감한 쿠키, 옥춘맛 쿠키, 바람궁수 쿠키)이었다. 마녀의 오븐 속에서 먹히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 있게 세상 밖을 향해 나아간 모바일 게임 속 쿠키런 캐릭터들이, 근대화를 도모하려 했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흐릿해진 고종의 목소리에 이끌려 황제의 미완의 꿈을 따라 다시 모험을 떠나게 된다.
전시는 모험한다는 설정과 함께 쿠키런의 인물들의 성우가 해설로 등장해 대한제국의 서막부터 상상 속 근대화된 대한제국의 모습 구석구석 경험한다. 또한, 그들의 상상 속에는 흐릿해진 고종의 자주적 의지를 상상화로써 다시 되살린다.
세계 속에서 ‘대한제국’으로써 당당히 서고자 했던 희망과 이상, 대례의궤 (大禮儀軌)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관련해 황제 즉위식과 황후, 황태자 책봉 등에 관한 기록이 담긴 대례의궤는 황제국의 격식에 맞추어 황색 비단으로 표지를 꾸며 제본되었다. 제후국 조선은 1897년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같은 해 10월에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황제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했다. 이를 기념하듯 본 전시의 도록 또한 대례의궤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다.
화재로 실현되지 못했던 근대 황궁의 재현, 덕수궁
출처 : 국가유산청
대한제국의 황궁인 덕수궁은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한 지역 한가운데 위치해 세계 열강들에게 대한제국 황궁의 위엄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1904년 대화재로 덕수궁이 큰 피해를 입어 중층 중화전을 비롯한 황궁의 주요 전각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이러한 과거에 "조금이라도 이랬다면"이라는 희망을 담아 쿠키런 세계 안에서 바람궁수 쿠키가 능력을 사용해 불길을 잡는다고 연출된다. 또한, 불타버린 궁궐을 덕수궁 평면도에 반영된 최대 규모의 덕수궁을 상상해서 그린 <상상화 덕수궁, 다시 피어난 황제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던 덕수궁의 완전한 모습을 쿠키런만의 색깔로 재현했다.
상상화로 이룬 근대 황제국의 의례, 청경예식
출처 : 국가유산청
1902년(광무 6) 11월,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대한제국이 준비했던 청경예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 거행되지 못했다. 이는 단순한 축하행사가 아닌 대한제국으로서의 전통적 위상과 근대 국가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하는 근대적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게 재현된 '쿠키런 상상화 2: 청경예식, 새 시대를 열다'라는 병풍 속에는 끝내 열리지 못했던 대규모 국가행사 청경예식을 다섯 폭 병풍 형식으로 재해석하였다. 고종이 외국 사절단을 갖가지 화려한 음식으로 맞이하고, 오얏꽃 문양[이화문]의 샹들리에와 황제 지휘 아래 근대 관병식이 장식했다.
과거와 현재의 의지로 이루어낸 ‘대한’, 서울
이후 이어진 큰 포스터 '상상화 3: 꺼지지 않을 희망의 빛'은 시간과 시대를 넘어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꿈을 전하고,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서울의 사대문과 사소문 중 훼손되어 사라진 문까지 모두 복원되어 그렸고, 그렇게 재현된 도성 안쪽에는 과거 대한제국 한성에서부터 이어져온 건축물과 공간들이 현재의 서울과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전통과 현대가 합쳐진 서울을 한국적 요소와 쿠키들로 표현했다. (포스터는 전체 모습이 담기지 못할 정도로 웅장하다.)
매 어려운 시기 속에서도 '대한'이라는 자주성을 잃지 않고 나아가 완성된 서울의 모습은 낮과 밤은 웅장했다. 그 속에 쿠키런 등장인물들로 꾸며낸 모습들은 쿠키런 팬들에게 큰 재미일 것이다. 꼭 관람객들이 현장에서 경복궁에 있는 다크 카카오 쿠키, 돈덕전 옆 천년나무 쿠키와 같은 보물찾기를 하길 바란다.
자주적이고 용기있던 모험을 마치며,
이번 전시를 기획한 곽희원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가 덕수궁에서 펼쳐지는 대한제국의 이야기가 슬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지향했던 문화적 이상과 부국강병의 꿈을 쿠키런의 세계관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니 전시 중간에 마주했던 쿠키들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용감한 쿠키 : 만약 우리의 상상처럼 대화재를 막았다면 자주 독립의 상징이 더 굳건해 졌을까?
옥춘맛 쿠키 : 역사는 돌이킬 수 없지만 유물은 질문을 남기지요. 오늘 그 질문에 답해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대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보다 독립은 더 굳건 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과거 고종이 근대화를 통해 대한을 지키려던 의지와,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끊임없이 해석하는 의지가 이어진 이상, 무한한 가능성과 시간을 넘어 ‘대한’은 언제나 자주적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에 담긴 가치를 해석하고 기억하며, 미래 속에 각자의 자주적 의지와 '대한'을 새길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이번 전시가 바로 그런 용기를 주었다.
이 특별한 전시를 통해 용기를 되새기고,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덕수궁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오얏꽃과 근대화로 물들여진 덕수궁 돈덕전에 모두 들러주길 바라며, 용감하고 아름다웠던 데브시스터즈와 국가유산청의 모험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부록
전시만큼이나 굿즈 또한 국가유산을 가득 담은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갖고 싶었던 우편 스티커가 모두 떨어져서 참 아쉬웠다…
전시는 3월까지이니 넉넉한 재입고를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