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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 캐스팅에 관심이 갈 뿐이었다. 가수 겸 배우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박지훈과 지난 천만 영화인 <파묘>의 주인공 유해진의 만남이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의 합이 기대되었다. 밀린 일정을 소화하고 늦게나마 극장을 찾았다. 개봉 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관객 수가 200만 명도 채 되지 않았을 때쯤 드디어 관람하게 되었다. 비로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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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의 첫인상은 ‘엄청난 예술은 아니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영화’였다. 무언가 압도적인 예술을 마주한 느낌은 아니었으나 조금은 투박하기까지 한 인간적인 느낌은 따뜻함을 전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익숙한 신파일지도 모르고 지루한 클리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에 매듭지어진, 바꿀 수 없는 결말이다. 이를 풀어가는 영화의 전반적인 서사는 따뜻한 인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따뜻함을 비롯하여 많은 이가 다시금 찾게 되는 <왕과 사는 남자>의 매력을 차근히 짚어가 보고자 한다.


 

 

1. 여러 오브제의 등장


 

1) 노루와 호랑이, 그리고 나비


 
“왕이다…!”
 

 

노루 사냥에 실패하고 홀로 남은 엄흥도의 눈앞에 호랑이가 나타났을 때, 이홍위를 찾으러 산에 올라온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재차 발견했을 때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인다. 산속의 왕인 호랑이를 보고 광천골 사람들은 ‘왕’이라고 칭한다. 그와 대비되는 노루는 광천골 사람들의 사냥감이다. 하지만 그들은 노루 사냥에 성공하지 못한다. 노루는 화살에 맞지 않지만, 재차 등장한 호랑이에게 목덜미를 물린다. 어쩌면 노루는 ‘왕’이 노리는 존재인 이홍위가 아닐까?


 

“네 이놈, 네 상대는 나다.”

 

 

이홍위가 호랑이에 활을 겨누고 소리친다. ‘왕’의 상대는 이홍위다. 그렇다면 ‘왕’은 이홍위와 대립하는 수양대군 혹은 한명회를 의미할 것이다. 해당 장면은 그들의 대립 관계를 비유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작중에 등장하는 ‘나비’ 역시 이홍위를 뜻하는 오브제일 수 있다. 호랑이에게 쫓기다가 정신을 잃은 엄흥도를 깨운 것은 콧잔등 위에 내려앉은 나비였다. 엄흥도의 삶에 이홍위가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죽은 이가 소중한 이에게 나비로 찾아온다는 것처럼 마지막 장면에서 나비가 재차 등장한다. 시신을 수습하는 엄흥도를 찾아간 이홍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2) 강을 건너는 것

 

이홍위가 유배지에 오는 과정에서 뗏목이 갈라지며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를 회상하며 엄흥도가 이홍위에게 자신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떠내려갔을지도 모른다며 생색내듯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를 본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강을 건넌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홍위에게 강을 건너게 해주겠다는 엄흥도의 말도, ‘갑시다.’라고 내뱉는 그의 통곡 섞인 한마디도 모두 죽음을 뜻했다. 저들의 손에 죽기는 싫다는 이홍위의 간청을 들어주기 위한 엄흥도의 노력이 담긴 말이었다.


그러니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엄흥도의 생색에도 의미가 있으리라. 강을 떠내려가 죽음에 이르게 두지 않고 이홍위의 삶을 붙든 이가 바로 엄흥도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이홍위를 살려내고 살아가고 싶게 만든 이가 엄흥도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3) 두 사람의 신발

 

엄흥도의 아들인 태산은 이홍위에게 가르침을 구한다. 처음에는 디딤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태사혜 한 켤레와는 달리 다 헐어버린 짚신이 모랫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신의 재질, 상태뿐만 아니라 그 위치로써 이홍위와 태산의 신분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시간을 보낼수록 점차 가까워지며 신발이 같은 디딤돌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신발은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고 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태산은 공평한 기회를 만들고 싶다고 이홍위에게 말한다. 만약 이홍위가 왕위에 무탈하게 앉을 수 있었다면 같은 디딤돌 위에 놓인 신발 두 켤레처럼 어느 백성과도 동등한 위치에 서 있었을까? 태산의 신발이 정리된 모습에서 바랄 수 없는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 공평한 기회를 만들고 싶다던 태산의 말을 곱씹던 이홍위는 그를 실현해 주고자 힘쓰는 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영화에는 다양한 오브제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공통된 평가 중 하나인 CG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비판도 존재하고 장면 전환이 매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조금은 투박한 듯 보이는 연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출이 되레 서사에 더 다가가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적이고 친숙하기에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런 온기가 있었기 때문에 엄흥도와 이홍위라는 인물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서사와 인물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감정이 전해져 온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과 선택을 지켜보며 그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2. 메시지와 온기를 품은 영화


 

처음은 감독과 배우들의 화제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개봉을 앞뒀을 때쯤에는 그 누구도 천만 관객을 기록할 영화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결국 개봉한 지 한 달 만에 누적 관객 수 천만 명을 돌파했다. 그렇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어떻게 입소문이 나고 천만 영화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설령 거사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 했던,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는 기록이 후대에 전해질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금성대군에게 서신을 보내는 이홍위의 독백이다. 옳지 않은 것을 바꾸며 정의를 되찾고자 하는 노력, 실패의 가능성이 있어도 어떻게든 저항해 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저항의 메시지가 현대 사회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저항의 움직임이 유의미한 결과를 낸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 저항의 시기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우리는 그때의 감정과 행동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몸에 남은 그때의 모든 것이 되살아나 영화와 공명하게 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동시에 영화는 코미디도 놓치지 않는다.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속절없이 웃게 되는 대화는 가벼운 가족 오락 영화를 보는 듯하다. 태산이 곤장을 맞기 직전까지도 그 분위기가 이어지기에 영화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진입의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쉬이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없는 현대 사회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복잡한 서사, 어둡고 감정 소모의 폭이 큰 서사는 되레 부정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서사를 마냥 슬프게만 조명하지 않는다. 극장에서 함께 눈물 흘리는 것 이전에 소리 내어 웃을 수 있는 순간을 마련한다.


그러한 코미디 외에도 영화 전반에는 따뜻함이 녹아 있다. 엄흥도는 이홍위가 왕이었단 사실을 알고 나서도 종종 웃어른처럼 구는 모습을 보였다. 죽을 생각 말라며 혼내기도 하고 악몽을 꾼다는 말에 천마를 캐러 간다. 마치 자식을 대하듯 살뜰히 챙기는 모습에서 온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관객은 그 온기에 반응하게 된다. 엄흥도가 쓰다듬는 것은 이홍위의 손이며 그가 살피는 것은 이홍위의 안위였지만, 관객은 그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 받는다. 누군가의 애정 어린 손길이 닿은 듯 위로받고 눈물 흘리며 아픔을 토해낸다.


<왕과 사는 남자>는 대단한 업적이 있는 왕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유배를 떠난 왕의 유배 생활을 그린 영화다. 관객은 많은 정보에 노출될 필요가 없다. 소소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서사가 아니라 마치 어릴 적 할머니께 듣던 옛날이야기처럼, 자주 펼쳐보던 동화책처럼 어딘가 모르게 편안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순수하게 다가오는 이야기였기에 더 감동적이다. 우리의 현재 일상과는 전혀 관계없고 비슷할 수 없는 이야기인데도 우리는 당시의 일상을 그린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삶이 고초를 마주해야만 했다는 사실에 못마땅해하고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어린 소년이 안타까워 울분을 터트린다.


 

그때 이홍위의 나이는 17세였다.

 

 

현대로 따지면 이홍위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어린 소년이었다. 왕의 손자,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앉았던 단종도, 어린 나이에 유배를 당한 노산군도 모두 ‘이홍위’일 뿐이었다. 관객들은 단지 이홍위라는 ‘사람’을 마주해 온 것이다. 그래서 많은 관객이 마지막 장면에 눈물 흘린 것이리라. 물장난치는 모습이 너무 그 나이대의 소년 같아서, 고작 열일곱의 소년이 겪기에 고된 시간을 보내고 떠난 것이 마음 아파서 엄흥도와 함께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려보낸다.

 

우리가 거쳐온 시간을 닮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냥 슬프지는 않지만, 밀려오는 온기와 안타까운 삶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영화이기에 거듭 곱씹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물을 응원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영화가 전하는 사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고 소화해 내고자 하는 자세로 이어진다. 거듭 들여다보고 함께 공유하며 그들을 기억한다.


*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재차 관람하고 해석하며 서로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팬층이 생겼다. 영월 방문객이 늘었고 청령포로 들어가는 배편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졌다. 그만큼 이홍위, 노산군, 단종을 기억하는 사람이 늘었다. 대개 비운의 왕으로 기억하던 단종은 백성 가장 가까이에 남은 왕으로 기억될 것이고, 그의 이름 석 자를 많은 이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영화가 전하는 온기가 우리의 시간을 지킬 힘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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