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얼굴을 한 두 영화,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단편영화 '월남보살'은 모두 혼혈인 여자아이가 무당이 되는 이야기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루미는 헌터 어머니와 악마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몸에 있는 악마의 무늬를 숨기도록 길러진다. '월남보살'의 수연은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내림굿에서 한국 신이 아니라 베트남 신을 마주하는 곤경을 치르게 된다. 두 작품 모두 여자 친구 셋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주인공은 혼혈이며, 무당이라는 경계 위에 서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경계는 사실 우리 삶 전체를 따라온다. 태어나는 순간 그어지고, 몸과 정신에 새겨지고, 이야기 안에서 풀리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그 이야기를 누가 어떻게 전하는지까지 이어진다. 두 작품이 함께 붙들고 있는 질문도 결국 이것이다.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에 속하는지를 정하는가. 민족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 몸과 역할은 늘 한가운데에 놓여 왔다. 이 질문을 따라 두 소녀가 몸과 정신에 새겨진 경계를 어떻게 견디고, 이야기 안에서 어떻게 풀어내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차례로 읽어보려 한다.
숨기거나, 떠나거나

여성은 오랫동안 민족의 상징적인 경계를 지키는 존재로 세워져 왔다. 누가 우리이고 누가 아닌지를 몸으로 표시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루미와 수연은 조금 흥미로운 자리에 서 있다. 둘 다 무당이니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인데, 동시에 둘 다 혼혈이라서 그 자신이 곧 경계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혼혈은 말 그대로 '섞인 피'다. 단어 안에 이미 혈통의 논리가 들어 있는 셈이다. 기원과 혈통을 중심으로 세워진 민족일수록 섞임에 대한 두려움이 이렇게 말 속에 남는다. 한국의단일 민족 신화가 그렇다. 한 민족이라는 논리는 '우리'를 지키는 동시에, 바깥에 대한 배척도 함께 뿌리 깊게 전해 내려왔다.
이런 지점에서 신병이라는 개념이 영화에서 어떤 장치로 쓰이는지 또한 흥미롭다. 신내림을 거부하면 몸이 계속 아프고 가족에게도 불행이 온다는 특징을, 두 영화는 둘로 갈라진 자아의 고통으로 가져온다. 자기 안의 한쪽을 밀어낼수록 몸이 아파지는 것이다. 루미는 무늬를 숨기도록 배웠고, 숨길수록 노래하는 목소리가 무너진다. 수연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베트남 신을 받았다는 이유로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베트남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부모님에게서 해결책처럼 듣게 된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몰이해 속에서 흔히 던지는 ‘go back to your country’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입에서 듣는 것이다.
2000년대 초부터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이 크게 늘었고, 지금은 베트남이 한국 국제결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2021년 한 농촌 지자체는 인구를 늘리기 위한 농촌 총각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라며 베트남 여자 유학생을 결혼 상대로 지목한 공문을 냈다. 맞선 지원 옆에는 출산장려금 표가 붙어 있었고, 넷째를 낳으면 3천만 원까지 준다고 적혀 있었다. 여성에게 출산은 개인이 아니라 민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처럼 지워진다. 국적을 불문하고 낮은 출산율, 높은 출산율 등 출산율을 둘러싼 모든 문제에 대한 국가의 원망은 여성을 향한다. 그 과정에서 여성은 돈으로 매수되기도, 강요받기도 한다. 이 공문은 그 구조를 그대로 답습했으며, 한국에서도 큰 비판을 받았다. 선진국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여성을 지목했다는 점에서 인종과 성별과 계급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결국 한국은 이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 주길 바랐으면서도,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여전히 타자로 바라본다. 수연은 한국의 내림굿을 받으니 문화로는 이미 안에 있지만, 기원으로는 절반이 바깥에 있다. 그래서 부모조차 그녀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너는 원래 거기 사람이라는, 사회가 혼혈 아이들에게 오래 해온 그 말을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고민하다가 결국 되풀이하게 된다. 그렇게 루미는 남기 위해 숨기기를, 수연은 속하기 위해 떠나기를 제안받는다.
굿

굿은 원래 한 사람이 아니라 마을 전체를 위한 의례였다. 가부장제의 긴 역사 속에서도 굿판만큼은 대대로 여성들이 이끌어왔다. 사람들이 무당을 찾은 이유도 결국 속에 쌓인 것을 풀기 위해서였다. 굿은 그 자체로 치유의 자리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달래는 위령굿으로도 이어져 왔다. 그러나 굿은 일제강점기에 미신으로 금지됐고, 근대화 과정에서도 계속 밀려났다. 무속 역시 오랫동안 숨겨져 온 역사를 품고 있는 셈이다.
같은 형식도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두 영화도 대대로 이어져 온 굿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져온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굿은 콘서트가 된다. 전 세계 팬 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이자, 노래로 악을 막아 경계를 봉인하는 도구다. '월남보살'에서 굿은 지금 세대의 손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과자, 블루투스 스피커, 산리오 손 선풍기, 챗GPT까지 동원해 독서실에서 셀프 굿을 하고, 그 굿으로 두 신을 모두 맞이한다.

둘 다 굿을 지금의 방식으로 바꿨고, 어떻게 보면 둘 다 원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쪽이 더 진짜 굿에 가까운지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오래 내려온 상징도 시대가 바뀌면 의미가 바뀌기 마련이다. 내가 눈여겨보고 싶은 건 그 상징이 각 영화에서 무엇을 하느냐다. 같은 굿이 한쪽에서는 편을 고르게 하는 의례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둘 다 품는 의례가 된다.
고르지 않기로 한 소녀

두 소녀는 모두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루미는 스스로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다른 절반인 악을 물리친다. 진우는 사라지고, 경계는 다시 봉인된다. '월남보살'에서는 두 신이 수연에게 하나를 고르라고 다그치자, 수연이 오히려 판을 뒤집는다. 자기가 둘 다 거절하면 너희는 다음 사람을 기다려야 하지 않느냐고, 그러니 빌어야 하는 건 너희 쪽이라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선과 악을 나누고, 그중 한쪽을 기준으로 세운다. 루미가 받아들여지는 것도 결국 그 기준 안에서다. 악마인 절반을 물리치고 선한 쪽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숨기지 않아도 된다. 반면 수연은 주어진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한국 신이냐 베트남 신이냐를 고르는 대신, 고르라는 질문 자체를 돌려보낸다. 어느 한쪽을 받아들이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자기가 속할 조건을 스스로 다시 쓰는 것이다.
달래던 굿이 베는 굿이 되기까지

매기 강 감독은 굿을 음악과 춤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의식으로 설명한다. 영어로 한국 문화를 알리는 것이 자신에게 맞는 방식이라고, 앞에 K만 붙으면 미국 관객이 열광한다고도 말했다.
물론 무속에는 재앙을 물리치는 면도 있다. 하지만 무속은 물리치기만 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달래고, 산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일도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중 물리치는 쪽만 남겼다. 전사가 된 무당, 그리고 서구 관객에게 이미 익숙한 선과 악의 구도다. 달래고 떠나보내는 쪽은 조용히 삭제된다.
서구의 시선은 어디 출신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이 비판은 서구에서 활동하는 비서구 출신 창작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나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서구화는 바깥에서 강요된 것이 아니다. 한국계 디아스포라 감독이 무속을 서구 관객이 받아들이기 쉬운 선악의 이야기로 옮기면서, 결국 한쪽을 품지 못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왜 이렇게 이야기했을까. 이야기 밖으로 한 걸음 나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을 볼 필요가 있다.
매기 강 감독은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어릴 때 이민을 갔고, 백인 친구들에게 케이팝 앨범을 숨겼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문화의 경계에 서 있던 사람이다. '월남보살'의 주연 권유경 배우는 실제로 베트남계 한국인이다. 기원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다문화 아이들이 늘 피해자나 배려의 대상으로만 보일 뿐,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관객들이 둘 중 하나로 나누어 보는 대신, 수연처럼 양쪽을 다 담을 수 있는 사람으로 봐주길 바랐다.
둘 다 가져가기로 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경계를 그은 것은 누구였을까. 국가는 아이를 낳으라고 하면서 그 아이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말했고, 이야기와 시선은 편을 고르라고 다그쳤다. 그래도 마지막 결정은 결국 소녀들의 몫이었다. 루미는 숨기던 무늬를 드러내고 친구들과 목욕탕에 간다. 수연은 두 신을 모두 받아들이고 친구들 곁에 남는다.
이야기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때 앨범을 숨겼던 감독과, 자기가 살아온 삶을 연기하는 배우가 이 이야기를 직접 만들고 전한다. 남이 만들어준 이미지로서의 Woman에서, 자기 자리를 스스로 말하는 women으로 조금씩 옮겨가는 움직임이다. 민족은 같은 과거가 아니라 함께 가는 미래, 같이 나눠 지는 운명으로 볼 수도 있다. 두 영화는 모두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둘 다 소녀에게 마지막 말을 맡기면서도, 누구도 내쫓지 않고 모두를 속하게 하는 쪽은 '월남보살'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다문화를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이야기가 뜨겁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이 이미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수연 같은 아이들은 이미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의 굿을 받는다. 이미 여기 있는 사람들을 두고 받아들일지 말지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받아들여질 대상이 아니라, 그냥 이미 여기 있는 사람들이다. 두 신 중 하나를 고르라는 요구 앞에서 수연이 둘 다 가져가기로 했듯, 한국 사회도 무엇을 받아들일지 고를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났다.
'월남보살'의 김근호 감독은 신도, 태어나는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막상 해야 할 때가 오면 수연처럼 또 해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주어진 것은 고를 수 없어도, 그 위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고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섞여 있는 세상에서 진짜 뿌리를 묻는 일은 점점 의미를 잃는다. 어디에 속하는지는 피가 어디서 왔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삶에서 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