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몇 년간 K-POP의 화력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만 이제는 넷플릭스까지 K-POP에 발을 들였다. 단순 K-POP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무려 K-POP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온 것이다. 현재 전 세계 31개국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개봉하자마자 미친 열풍을 불러일으킨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몬스터 호텔’과 같은 세계적인 스튜디오 소니 픽쳐스가 제작을 맡았다. 말 그대로 한국이 아니라 완전히 해외에서 제작된 한국 영화인 셈이다. 이 소식을 접한 처음에는 ‘넷플릭스가 대체 왜?’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 직후에는 ‘아, 좀 두려운데’라는 아이돌 팬이자 한국인으로서의 당연한 불신이 피어올랐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보라색 브릿지와 찢어진 눈을 가진 ‘Kim’을 보아왔던가. 기본적으로 해외 필름에서 보아온 동양인의 스테레오타입들을 알기에 소니가 과연 한국의 아이돌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두려웠다. 특히나 K-POP은 해외의 음악 산업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이돌들이 마스크 하나 없이 당당하게 길거리를 노다니는 말도 안 되는 진풍경을 만들어 내면 어떡하지. 무대 위에서 갑자기 사랑 고백이라도 하면? 그걸 팬들이 좋다고 환호 질러줄 거라곤 생각하진 않겠지? 그동안 아이돌 판에 발을 들이면서 수없이 봐왔던 고증 오류들이 머릿속에서 흘러 다녔다. 할리우드가 아닌 일산, 파주, 고척의 K-POP을 그들은 어떻게 만들어 냈을까. 굉장히 궁금했다.
더불어 단순 아이돌물이어도 걱정이 되는데, 이들은 오컬트까지 접목한 세계 최초 무당 아이돌이었다. 오컬트에 아이돌을 접목한 건지, 아이돌에게 오컬트를 접목한 건지 알 수는 없어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아이돌은 굿판을 벌이고 악귀를 쫓는 ‘무당’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요소도 틀림없이 등장한다는 건데, 이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 둘을 이어놓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의심과 불신을 가지고 약 90분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러닝타임을 거쳤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 정도면 손뼉을 쳐줄 만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예상외의 퀄리티였다. 물론 중간중간 혼성 그룹 합동 팬 사인회라든지 선배 그룹을 대놓고 무시하는 등의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야 연출적 허용으로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정말로 감동적이었던 건 그들이 진짜 K-POP스러운 음악과 안무, 컨셉을 들고 온 것이었다.
K-POP의 본질을 담아낸 컨셉과 음악
EXO '늑대와 미녀' MV
K-POP의 아이돌 문화는 해외와 완전히 다른 결을 띤다. 미국에서는 힙합, 일본에서는 밴드가 강한 것처럼 한국 하면 아이돌이다. 그러나 아이돌을 정확히 힙합과 밴드처럼 장르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복합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 장르를 K-POP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의 엔터테인먼트들은 힙합과 밴드, 발라드와 팝을 넘나들며 저만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 그렇게 한국 음악 시장에는 요정부터 야수까지 온갖 컨셉이 난무했다.
그중에서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는 가장 세계적이고 대중적인 K-POP 컨셉을 가지고 나왔다. ‘헌트릭스’는 강렬한 걸크러시 기반의 대중적인 걸 그룹으로, ‘사자보이즈’는 청량과 퇴폐를 넘나드는 컨셉추얼한 보이 그룹으로 말이다. 걸그룹과 보이그룹의 이런 명확한 컨셉 차이 또한 K-POP 씬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적용한 모습이라 웃음이 나왔다.
컨셉에 걸맞게 ‘헌트릭스’는 강렬하고 묵직한 비트와 멜로디 랩을 기반으로 한 힙합 댄스곡 ‘How It’s Done’을 부르며 등장했다. ‘How It’s Done’은 세계가 알고 있는 K-POP을 가장 잘 나타낸 곡이다. 특히 K-POP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는데, 바로 곡의 브릿지와 마지막 싸비다. 최근 4세대와 5세대로 접어든 아이돌들의 음악에서는 이 특징이 많이 사라져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3세대 아이돌 음악을 듣다 보면 무조건 등장하는 부분이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곡이 벌스와 코러스를 반복하며 곡의 전개를 이끌어 나가다가 브릿지에서 잠잠하게 기조를 바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그 긴장은 메인보컬의 폭발적인 고음과 코러스로 전환되어 마음을 벅차게 했다. 소녀시대, 마마무, 비스트, 인피니트 등 많은 아이돌이 이와 같은 곡 구조를 가져갔으며, 밝든 어둡든 모든 컨셉에 적용되었던 K-POP의 정석이었다.
‘How It’s Done’은 그 곡 구조를 똑같이 보여준다. 후반부에 터져 나오는 주인공 ‘루미’의 고음과 그를 뒤받치며 탄탄하게 마지막까지 곡을 이끌어가는 ‘미라’와 ‘조이’의 보컬은 너무나도 알던 맛이었다. 기분 좋은 소름이 팔뚝에 돋을 정도였다.
더불어 놀랐던 점은 과하지 않은 표정 연기와 제스처였다. 외국 애니메이션의 특징 중 제일 먼저 두드러지는 것이 국내나 동양과는 남다른 제스처의 강도인데, ‘케이팝 데몬 헌터스’ 또한 일상적인 부분에서는 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음악이 흐르고 무대를 선보이는 동안에는 딱 음악에 맞는 조화로운 제스처와 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이 제스처와 표정들은 보이그룹인 ‘사자보이즈’의 무대에서 더욱 잘 나타났는데,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남돌 특유의 제스처와 모션들이 있다. 묘하게 깔린 눈빛과 관능적으로 살짝 비틀린 입매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정도면 진짜 모션 맵핑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여기서 ‘사자보이즈’의 컨셉 이야기로 살짝 넘어가자면, ‘사자보이즈’가 보여준 두 컨셉은 K-POP 남자 아이돌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양대 산맥이다.
K-POP 팬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햇살, 청량을 부르짖는 파와 퇴폐, 음기를 부르짖는 파. 그래서 보통의 남자 아이돌이라면 이 두 컨셉은 아이돌 활동을 하며 반드시 거쳐 가는 필수 관문이다. 아이돌 서바이벌 무대를 봐도 이 두 가지 컨셉은 무조건 미션으로 들어갈 정도다. ‘사자보이즈’는 여기서 K-POP 남자 아이돌 활동의 정석을 따른다.
산뜻하고 풋풋한 데뷔는 ‘청량’하게, 그 이후 후속곡 활동은 반전 있는 ‘퇴폐미’로. 양쪽 수요를 모두 다 잡는 대표적인 발매 전략이다. 중요한 것은 당연히 이 ‘청량’과 ‘퇴폐’를 어떤 소재로 구현할 것인가에 달려있는데, 여기서 제작사가 ‘사자’ 컨셉을 가져온 것이 굉장히 유리하게 작동했다.
‘청량’은 사실 소재가 중요하지 않다. 노래와 안무, 코디의 조합이 짝짜꿍 잘 맞기만 하면 별문제 없이 대중성을 잡을 수 있는 컨셉이다. ‘사자보이즈’ 또한 ‘청량’은 본체를 숨기기 위한 장치였기 때문에 밝고 팝스러운 무드를 가진 ‘Soda Pop’을 내세워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사자보이즈’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의 무대에서 이들은 악명 높은 ‘저승사자’ 그 자체였다. 원한과 악의를 잔뜩 품은 눈빛과 손톱이 잔뜩 빛을 발했다. K-POP과 접목하기도 쉬운데 한국적인 음울함을 보여주니 독보적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또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킹덤’ 이후로 화제가 된 한국 전통 모자 ‘갓’이 등장한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다.
실제 전문가들의 참여가 만든 완성도
이 모든 곡과 컨셉이 완벽하게 K-POP을 담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실제 K-POP 프로듀서와 안무가들이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번 작업에는 테디를 포함한 더블랙레이블 프로듀서들과 제니 안무가로 유명한 리정이 참여했다. 그러니 당연히 곡과 안무의 퀄리티는 보장된 셈이었다.
더불어 그룹 컨셉과 캐릭터에 맞는 적절한 레퍼런스 선택도 크게 기여했다. 주인공 루미는 블랙핑크의 제니를 반영했으며, ‘사자보이즈’의 센터 진우는 레퍼런스로 차은우와 남주혁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아마 이들 덕분에 동양인의 스테레오타입 비주얼을 깰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외에도 트와이스, 투모로우 바이 투게더, 몬스타엑스까지 많은 K-POP 아이돌 그룹이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레퍼런스가 되었는데, 이들 모두 특유의 모션과 제스처를 잘 활용하는 그룹들이라 작업에 큰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무당과 아이돌의 자연스러운 결합
‘무당’, ‘퇴마’라는 무속적인 소재도 이들의 활동과 잘 들어맞는다. 은연중에 연예인과 무당의 사주는 비슷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굿판을 벌이고 춤과 소리로 액운을 쫓는다고 생각하면 다를 게 없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당 아이돌’이라니, 정말 괜찮을까? 상당히 토속적인 소재에 우려가 앞섰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괜찮은데?’ 였다.
작품의 메인 플롯은 이 ‘무당 아이돌’인 헌트릭스가 악령들을 퇴치하고 세계를 더욱 단단하게 지키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의 전통 히어로인 셈이다. 메인 빌런인 ‘귀마’와 온갖 요괴를 상대하는 수단은 바로 이들의 춤과 목소리, 그리고 그로 인해 발동되는 팬들의 순수한 영혼이다. 물론 이들만의 무기를 가지고 직접 전투를 벌이며 요괴들을 처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팬들을 감동시켜 이승에서 저승의 존재들을 봉인하는 ‘혼문’을 완벽하게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무대는 ‘굿판’이 되었고 헌트릭스의 목소리와 춤은 평안과 평화를 기원하는 ‘굿’이 되었다. 신과 직접적으로 맞닿는 묘사가 나오지는 않지만, 이들은 일반인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쓸 수 없는 능력을 사용해 악재를 몰아낸다. 혼문을 만드는 과정 또한 굿과 비슷하다.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 모여 염원이 되고, 이는 악재를 막는 기틀이 된다.
이 전개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인상적인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오로지 외국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외국에서 제작되었기에 오히려 선택과 집중이 더욱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찌 되었든 한국의 두 특징적인 문화 요소를 조화롭게 결합해 하나의 스토리로 녹여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의 입장에서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다.
완벽하게 구현된 서울의 풍경
그 과정에서 한국의 풍경을 왜곡하지도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서울을 구현해 냈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주차금지’ 위에 주차된 차량, 골목골목 가파른 서울의 경사와 홍대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버스킹 공원, 감사패와 인증 액자가 즐비한 한의원까지. 우려와 걱정을 쏙 들어가게 하는 비주얼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외려 어떻게 이렇게까지 섬세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한국계 아트 디렉터인 Celine DaHyeu Kim이 이후 풀어준 후일담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많은 신경을 기울여 이 디테일들을 살려내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성우들이 ‘라면’을 ‘라멘’이 아니라 ‘라면’이라고 발음하는 것도 이 노고의 결과다.
특히 무속 신앙이라는 전통적 요소가 가미된 만큼 작품의 마스코트인 동물 캐릭터들도 전통의 멋을 살려 디자인되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는 두 마리의 마스코트가 등장하는데, 이미 충격적인 귀여움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아기 호랑이 ‘더피’와 해외 팬들에게 ‘갤럭시 버드’라 불리는 까치 ‘서씨’가 그 주인공이다. 까치와 호랑이, 어딘가 익숙하다면 그게 맞다. 이 둘은 작호도로서 오랜 기간 한국의 미술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원화 본연이 가진 맹수의 카리스마는 많이 무뎌졌지만, 그래도 도깨비를 연상케 하는 푸른 광채와 날카로운 눈빛은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다들 흠칫했지만, 곧바로 반전미를 선사하는 엉뚱한 액션에 그대로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 둘의 팬아트도 무수히 쏟아지는 중이다.
그래서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 컴백하나요?
개봉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시점임에도 벌써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시즌 2와 스핀오프를 바라고 있는 팬들이 상당해졌다. 아직 풀리지 못한 미라와 조이의 이야기와 더피와 서씨의 귀여운 에피소드들, 결말 이후 이어질 루미의 일상까지 궁금한 게 많다는 입장이다. 루미와 진우의 러브라인도 살짝은 애매모호하게 끝난 감이 있어 더욱 아쉽다. 무엇보다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컴백을 바라는 목소리들이 크다. 캐릭터와 노래, 안무 모두 매력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들은 버추얼도 아니고, 완전히 가상 캐릭터일 뿐이지만 실제로 이들에게 ‘입덕’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그 열기는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이미 아이튠즈에서는 OST 앨범이 앨범 차트 1위에 진입했고, ‘사자보이즈’는 미국 스포티파이 차트 Top 10에 진입하며 K-POP 보이그룹 중 유일하게 BTS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BTS 다음으로 기록을 세운 K-POP 보이 그룹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사자보이즈’일 것이라고 말이다.
심상치 않은 열기에 제작사도 이리저리 열심히 프로모션을 해보는 추세다. 그러나 역시 이 열기를 확실히 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해 보인다. 생각보다 떡밥은 오래가지 않고, 팬들의 인내심 또한 길지 않기 때문이다. 일 단위로 새로운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K-POP 시장이다. 과연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될까. 두 번째 걸음을 딛긴 할까. 모든 게 불투명하지만, 나 또한 이미 웰메이드 K-POP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게 된 ‘케데헌’의 팬으로서 기약 없는 다음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