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를 기억하라면 너무 아득해 기억도 나지 않지만, 이 하얀 토끼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옷에서도, 장난감에서도, 동화책과 비디오 속에서도, 심지어는 숟가락과 그릇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언제 어디를 가나 함께이던 이 작은 토끼를 이제는 다 커버린 몸과 마음으로 다시 만나러 갔다. 어느덧 미피가 탄생한 지 70번째 되는 해였다.
마치 앤디가 오랜만에 우디를 발견한 듯한 반가움이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물씬 밀려왔다. 특히 짙은 밤하늘 색으로 물든 입구 세면과 거대한 주황색 아치형 문으로 미피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쫑쫑 수 놓인 별과 달이 동화적이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많은 전시회를 다녀보면서 느낀 점이지만 역시 시작이 화려해야 몰입감이 확 증폭되는 법이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미피의 소개와 함께 수많은 생일 축하 편지에 파묻힌 미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심심하지 않게 주기적으로 빼꼼, 빼꼼, 위아래로 미피가 동그란 두 눈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시선을 이끄는 재밌는 장치와 더불어 여기서부터 미피에 관한 정보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어릴 때부터 미피를 그렇게나 많이 봐왔음에도 미피의 본명을 알긴 또 처음이었다. ‘나인체(Nijntje)’. 네덜란드어로 작은 토끼를 뜻하는 말에서 비롯되어 영문명으로 번역된 결과가 ‘미피(Miffy)’란다. 확실히 낯선 어감이었지만 미피의 본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벌써 정이 든 단어가 되어버렸다. 미피, 나인체, 생일 축하해. 속으로 쌓인 편지 못지않은 축하를 보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는 미피를 둘러싼 가족과 이웃들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고, 그들의 일상으로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전시가 구성되었다. 텃밭에서 당근을 뽑아보고, 잔디에서 뛰어놀아도 보고. 미피의 옷장에 걸린 옷걸이에 내 옷을 걸어도 보고 보리스의 집 앞에서 벨을 눌러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구성은 인터랙티브로 설계되어 관람객의 행위마다 그에 걸맞은 호응이 이어졌다. 특히 옷걸이를 걸 때마다 각각의 옷걸이별로 달라지는 미피의 옷은 어떻게 설계했는지 경험하는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신기함을 자아냈다.
곳곳마다 이번 전시의 핵심 모티브인 '편지'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사이좋은 미피의 가족들과 이웃들이 미피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미피만큼이나 감동을 받은 듯했다. 나 또한 그중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예 공간 전체를 인터랙티브 체험 공간으로 꾸며 어린아이들이 뛰놀 수 있게 만든 것 또한 하나의 체험 포인트였다. 그만큼 그 공간을 양껏 즐기고 있는 아이들에게 양보하느라 직접 해보진 못했지만, 그저 마음껏 소리 내며 웃고 뛰노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푸른 잔디로 아치형 다리를 만들어 공간을 이어놓은 모습도 몰입감을 한층 높이는 좋은 장치였다.
이렇게 미피 마을의 일상을 경험하다 보면 이런 미피와 이웃들이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녹아 들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기도 했다. 포토존처럼 꾸며진 공간마다 촘촘하게 미피의 실제 굿즈나 일러스트가 함께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원작 동화책이 함께 구비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커서는 다 잊어버렸지만, 그 작은 책 하나만으로도 진한 노스탤지어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간마다 미피는 아이에게는 즐거운 동심을, 어른에게는 뭉클한 추억을 선사했다.
덕분에 전시를 관람하는 내내 관람객들의 연령층과 비율도 다양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유아차를 끌고 방문한 온 가족 관람객부터 귀여운 것에 관심이 많은 10대 청소년, 아기자기하게 데이트를 즐기러 온 여러 커플까지 온 연령층이 한 공간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미피와 함께하니 굉장히 조화로운 공간이 된 것 같았다. 미피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미피의 70주년 생일은 이렇게나 북적이고 아기자기했다.
끝으로 이번 전시가 만족스러웠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를 공유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그 이유는 미피에 관한 나의 오랜 궁금증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런 괴담을 들어본 적 있는가? 토토로나 디즈니, 안데르센 동화와 같은 동심 가득한 세계에 엮인 잔혹한 뒷이야기 같은 인터넷 괴담들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넘겨버릴 수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처음 접했던 어린 시절에는 공포스러우면서도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미피도 당연히 이런 괴담이 있었다. 바로 미피의 깜찍한 ‘X’자 입에 관해서 말이다.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이 이유를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전시를 관람하며 이 괴담에 대한 답변을 아주 명확하고 상쾌하게 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진짜 괴담 같은 이유는 아니었고, 생긴 모양대로 깜찍한 이유였다. 혹시 이 답변을 알고 싶은가? 그럼, 이 환상적인 미피 마을에 방문해 보길 권한다. 이 명쾌한 답변과 더불어 미피와 함께하는 환상적인 치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