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아이들이 아플 때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애들은 한 번 크게 앓고 나면 쑥쑥 큰다.” 어릴 때의 나는 그 말을 그저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고, 그과정을 통해 몸이 튼튼해진다는 단순한 의미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말이 단순히 몸의 성장이나 고통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를 넘어, 아픔을 겪은 뒤 내면과 자아가 함께 성장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나에게 감기와 독감은 중요한 시기마다 찾아왔다.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처럼 말이다. 이는 마치 내가 바쁘게달리고 있을 때 잠시 속도를 늦추고 쉬어가라고 말하는 불청객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피로를 알려주는 특별한 손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낮까지는 멀쩡했던 몸이 저녁이 되자 갑자기 이상해졌다. 목이 칼칼해지더니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은 심한 감기 몸살이니 약을 먹고 충분히 쉬어야 한다고 하셨다. 하필이면 그 주부터 해야 할 일과 일정이 많아질 예정이었다.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 일정을 미루고, 이틀 동안 약을 먹고 자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할 일을 처리하고 싶었지만, 몸이 아프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누워서 잠을 청했지만 몸살 때문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뒤척이다 보니 문득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아팠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내가 처음 크게 앓았던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시험 기간에 독감이 유행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에게도 감기 증상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단순한 감기 몸살이라는 진단을 받아 약을 먹으며 지냈다. 그러나 증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주말이 되자 열이38~39도까지 올랐다. 끼니조차 거른 채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몸이 아팠고, 결국 다시 병원을 찾아 독감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는 방학을 일주일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시험은 다행히 모두 마쳤지만, 독감은 다른 학생에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간 인정결석을 해야했다. 결국 방학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에서의 첫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상을 직접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쩌면 나는 한 학년 동안 낯선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결국 몸이 먼저 나에게 휴식을 요구했고, 그 신호가 감기와 독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직후에도 감기는 원치 않는 손님처럼 찾아왔다. 다양한 국가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한곳에 모이고, 여러 행사와 수업이 이어지는 바쁜 일정 속에서 학생들은 이른바 ‘신입생 독감(Fresher’s flu)’에 많이 걸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몸살 기운이 찾아오더니 코가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목이 심하게 부어 말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결국 신학기에 몇몇 수업을 빠질 수밖에 없었다.
졸업 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대학교 입학 당시처럼 다시 감기 몸살을 크게 앓았다. 시험을 앞두고 공부해야 할 것은 많았지만, 몸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약을 먹으며 충분히 휴식을 취했지만 빠르게 호전되지는 않았다. 결국 시험 당일까지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상태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시험에는 통과했고 성적도 예상보다 좋게 나왔지만, ‘조금만 더 평소에 준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아팠던 순간에는 항상 비슷한 모습이 있었다. 중요한 일이나 시기가 다가오면 나는 그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더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압박감은 높아지고, 쉬는 것과 건강을 챙기는 일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 그제야 모든 것을 멈추고 나의 내면과 외면의 건강 상태를 돌아볼 수 있었다.
과거에는 “왜 하필 지금 이 시기에 이렇게까지 아픈 거야?”라며 감기와 독감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픔이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신호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동안에는 모든 것을 멈추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완전히 회복한 뒤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좋은 상태로 주어진 일들을 마무리할 수 있기도 했다.
어쩌면 아픔은 우리에게 잠시 멈추라고 말하는 몸의 언어인지도 모른다. 너무 열심히 달리고 있을 때, 우리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피로와 마음의 상태를 대신 알려주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아픔과 후회, 원망과 고통을 안겨준 감기도 결국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조금 더 나를 이해하고, 조금 더 단단해진 내가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