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의 움벨트, 지구의 움벨트 - 도서 '호라이즌'

글 입력 2025.01.15 10:5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아이와 나는 철제 난간 위로 몸을 기울인 채 바닷속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다. (…) 내 손자는 아홉 살이다. 지금 나는 생의 예순여덟 번째 해를 보내는 중이다.”

 

- 13쪽

 

 

책 《호라이즌》은 어느 호텔 풀장에서 놀고 있는 가족들을 이따금 바라보며 책을 읽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를 보내고 있는 이 사람은 평생 무려 남극과 일흔여 개의 나라를 여행하고 탐사하며 그 현장을 기록해온 사람이다.

 

이 책의 저자 베리 로페즈는 전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 풍경을 기록했다. 그렇게 쓴 책 《늑대와 인간에 대하여》 《북극을 꿈꾸다》(북하우스, 2024)로 각각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오르고 전미 도서상을 수상했다.

 

예순여섯 살의 나이, 일흔 개의 나라, 스무 권의 책. 처음 접한 베리 로페즈에 관한 수식어와 정보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지만, 여행하는 사람 즉,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의 삶에 관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펼쳐보았다.

 

배리 로페즈가 생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장편 논픽션이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그간 떠나고 머물렀던 여행기를 집대성한 이 책은 한 사람의 생애를 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900쪽이 넘는 분량을 가졌다. 책 두께에 지레 겁 먹기 쉽지만, 프롤로그에서 그가 묘사한 오후의 어느 따뜻한 순간을 따라 읽다 보면 자연스레 느껴지는 그의 다정한 시선에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것이다.



20250114174701_flcfkuum.jpg

 

 

시간과 여유가 허락하면 국내 여기저기로 여행을 떠나는 편이다. 좋았던 여행지는 다시 가기도 한다. 작년 한 해는 운이 좋아서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름과 가을의 경주를 만났고, 순천과 동해라는 낯선 동네에 갔다. 두 곳에서 경이롭다는 진부한 표현이 절로 떠오르는 풍경을 만났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도 좋지만, 언제고 예전에 만났던 여행지에서의 풍경을 보러 다시 달려가고 싶다. 좋았던 풍경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갈 때마다 같은 장소여도 다르게 보이고, 또 다른 감상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 같다. 장소는 계속 변하고, 인간은 그 변화 속에서 매번 새로운 것을 느끼고 또 얻는다.

 

이와 비슷한 마음을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리 여러 차원에서 엄밀히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그곳을 아무리 여러 번 여행한다고 해도, 한 사람이 한 장소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는 장소 자체가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장소는 그 깊은 본성상 투명하지 않고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 49쪽

 

 

이 책의 여정을 따라가며 두 가지의 여행을 했다.

 

첫 번째 여행은 이 책에서 다루는 배리 로페즈의 여행이다. 앞서 말했듯이 배리 로페즈는 자신의 여행기를 900쪽에 걸쳐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자세히 담았다. 우아한 만연체로 길게 늘여 놓은 풍경에 대한 묘사는 독자를 북아메리카 서부부터 칠레 남부까지의 풍경 속으로 끌어들인다.

 

또 배리 로페즈는 어디를 가든지 그 풍경 속에 있는 모든 생명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며 다양한 생명체를 알게 되었다. 새, 고래, 나무. 가령 푸른나무얼가니새, 보리고래, 눈덧신토끼.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땅과 바다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산타크루스섬, 퀸모드 산맥, 파울웨더곶. 낯선 생명체의 이름을 전부 알고 불러주는 그의 글 속에서 생명체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기도 한다.

 

휘페르보레아(‘북풍 너머’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극북에 있는데도 태양신 아폴론의 은총을 받아 항상 햇빛이 비치는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상상한 가상의 대륙을 의미), 운누이주크(이누이트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식량을 찾는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만나면 낯선 발음을 즐기며 입 안에서 굴려보기도 했다.


인간이 자연을 칭하는 수많은 낯선 단어들은 자연을 묘사하는 문장 속에서 한없이 아름다워졌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새로운 풍경을 만났지만, 기억에 남는 풍경을 꼽아보았다.



보리고래_위키백과.jpg

보리고래 (출처: 위키백과)

 

 

“…우리는 보트로 돌고래들 가까이에 접근해 물속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돌고래들이 우리에게 다가와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심은 아주 깊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이 그 코발트 색조 때문에 ’푸른 물’이라고 부르는 그런 곳이었다. 내 아래로 나타난 것은 돌고래들이 아니라 내가 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10미터 아래에서 약 15미터쯤 되어 보이는 짙은 청회색의 암컷 보리고래가 새끼 한 마리를 돌보고 있었다. 이런 순간을 맞닥뜨리면 마음이 평정을 회복한 뒤로도 심장은 오래도록 평소의 리듬을 되찾지 못한다. 빛과 그림자, 물속 형태들을 이루는 선들이 서로 맞아 들어가면서 하나의 일관된 이미지가 완성되는 순간.”

 

- 406쪽

 

 

“잠시 후 나는 황제펭귄 네 마리가 유빙 가장자리에서 프로펠러가 만드는 물결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갑자기 그중 한 마리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즉각 나머지 셋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펭귄들이 배를 수상쩍게 여겨 멀리 헤엄쳐 가버린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정상파 속에서 머리 하나가 수면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른 세 마리의 머리도 나타났다. 황제펭귄들을 자기들로서는 생전 처음 보았을 배의 프로펠러 후류를 타며 서핑을 즐겼다.”

 

- 824쪽

 

 

두 장면만 봐도 배리 로페즈가 얼마나 세심히 자연을 관찰했는지, 자연 속 생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느껴진다. 특히, 두 번째로 인용한 부분인 펭귄들이 인간들이 만든 물체의 흐름에 맡기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자. 글로만 읽어도 펭귄들의 귀여운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두 번째 여행은 배리 로페즈가 자신의 여행기 사이사이 넣어둔 지구와 인간에 관한 성찰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그가 떠난 곳곳에는 자연과의 공존을 넘어 자연을 파괴한 인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갈라파고스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지느러미가 잘린 상어 시체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나무가 빼곡했던 숲에는 굴착기가 들어섰고, 드넓게 펼쳐져 있던 유빙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부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생긴 비극이었다.


작년 말, ‘기후재앙 마지노선’인 1.5도가 일시적으로 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사람들은 그간 기후재앙이 자신이 있는 곳과는 먼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아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비웃듯 전세계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혹독한 재난을 겪으며 기후 위기가 불러온 쓰나미를 정통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 쓰나미를 함께 마주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 책에 나온 지구 곳곳의 흔적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에 기대어 잠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보기도 했다.


 

“어떤 관점으로 보든, 우리가 더욱더 개발해 이익을 뽑아내겠다고 껍질을 벗기고, 채굴하고, 산업적으로 경작하고, 굴착하고, 오염시키고, 빨아내고, 끊임없이 조작하는 지구, 목 졸린 지구가 지금 우리의 집이다. 우리는 그 상처를 알고 있다. 심지어 그 상처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중 다수는 묻는다.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하고.”

 

- 120쪽

 

 

그렇다면 배리 로페즈는 자신이 마주한 자연 속 인간의 흔적에 미래를 회의적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희망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처럼 인간이 만든 풍경을 직시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한다. 한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탐험을 거의 끝냈고(끝냈다고 착각하고), 도덕적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지만 아직 인간의 상상력이 있기에 나아갈 방법은 언제든 있다고 이야기한다.

 

문제를 바라보고 응시하기를 멈추지 않고 모른 척하지 않는 것. 배리 로페즈의 글에 담긴 시선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 작은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나의 움벨트, 지구의 움벨트

 

 

“…호기심 많고 주의 깊은 떠돌이 여행자에게 여행은 세상 어디에도 완전히 똑같은 장소는 없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여행은 과거부터 이어진 상식을 수정하고 선입견을 떨쳐버리도록 자극한다. 또한 우리의 정신이 맥락을 고려하도록 유도하고, 인류에 관한 절대적 진실의 독재에서 정신을 해방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길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하게 해준다. 사람은 똑같은 길보다는 자신만의 길을 가고 싶어한다.”

 

- 485쪽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살갗을 바꾸는 일이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남방 우편기》 중에서

  

 

《호라이즌》 속 표현을 빌리자면, 여행은 나의 ‘움벨트’가 넓어지는 일이다(움벨트(umwelten)는 환경, 주변 세계라는 뜻의 독일어다. 생물학에서는 각 생물이 자기가 처한 환경을 그 종 특유의 방식과 관점으로 인식하는 것을 일컫는다).

 

움벨트가 넓어지면 자연스레 앞으로 내가 서 있는 환경 너머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이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지게 될 것이다. 지구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에 대해 생각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낯선 것은 시야를 넓힌다. 그리고 여행은 낯선 것을 보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 중 하나다. 여행은 여행을 떠난 당사자가 그 순간 당장 체감하지는 못하더라도, 몸과 마음 어딘가에 깊숙이 무언가를 남긴다. 그렇기에 나도, 배리 로페즈도 어딘가로 계속 여행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닐까.

 

위에서 인용한 생텍쥐페리의 문장처럼 여행이 자신의 살갗을 바꾸는 일이라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여행을 떠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이에게, 혹은 멀리 떠날 수 없는 이들에게 《호라이즌》은 조금이나마 여행이 주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기에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전지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5.02.0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5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