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 옷소매 붉은 끝동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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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 드라마가 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 이산과 그의 후궁 의빈 성씨를 다룬 드라마로,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덕임은 의빈 성씨의 이름으로, 정조가 세손인 시절 궁녀로 입궁해 그가 왕위에 오르자 후궁이 된 인물이다.
처음 이 드라마의 티저를 봤을 때,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일 거라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청을 시작했다. 초반부는 산뜻한 여름 배경과 함께 밝고 코믹스러운 분위기가 많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무게감이 더해졌다.
정조 이산과 덕임 사이의 갈등은 나를 깊이 흔들었다. 산은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압박 속에서도 덕임을 사랑했다. 하지만 덕임은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산을 택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후궁으로서의 삶 속에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잃어갔다.
덕임의 이야기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드라마 종영 후, 한동안 나는 ‘덕임’에 빙의된 듯했다. 툭하면 울었고, 주변 사람들은 “전생에 덕임이었냐”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급기야 경복궁을 찾아 그녀의 삶을 이해하려 했지만, 드라마를 다시 볼 때마다 감정은 더욱 북받쳐 오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대본집을 사서, 오로지 나만의 시선으로 천천히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산은 세손 시절부터 죽음과 고립, 그리고 끝없는 신하들의 견제를 견디며 살아야 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으려 애썼지만, 덕임을 만나면서 그는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반면 덕임은 궁에 들어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산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무너뜨릴 것임을 알았기에 마음을 억누르려 했다. 그런 덕임의 고뇌는 그녀가 동무들에게 남긴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때 보여? 내가, 전하를 연모하는 것 같아? 이것만은 확실해.
내가 전하를 연모한다면, 그 사실을 전하만은 절대 모르시게 할 거야.
그냥. 쓸데없는 허세 같은 거야. 그래도 지금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허세라도 없으면... 좀 괴로울 것 같아.
덕임은 결국 산의 후궁이 되기로 결정했다. 산과 그녀의 마지막 대화는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복잡하고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산 : 너는 나를... 조금도, 연모하지 않았느냐? 아주 작은 마음이라도... 내게는 주지 않았어?
덕임 : 아직도 모르시옵니까? 정녕 내키지 않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멀리 달아났을 것이옵니다. 결국 전하의 곁에, 남기로 한 것이... 제 선택이었음을... 모르시옵니까.
산이 덕임의 임종을 지키면서 그녀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다. 산의 곁에 남기로 한 덕임의 선택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길이었다. 덕임에게 사랑이란 타인을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누구보다 산을 사랑했기에, 어쩌면 덕임 자신보다 더 사랑했기에 그의 후궁이 되는 삶을 택한 건데, 왜 산은 그것을 끝까지 알지 못했을까.
그녀의 사랑이 산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끝났다는 사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덕임이 선택한 길은 그 무엇보다 절실하고 깊었지만, 사랑을 선택한 덕임 자신에게는 그 선택이 희생이었음을 산은 이해하지 못했다.
궁이라는 울타리 안에 덕임을 가두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덕임에게 궁은 마음을 둘 수 있는 아늑한 집이 아니라 화려한 감옥이었다. 정조가 평범한 사내였다면, 둘은 더 행복한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덕임을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로만 기억한다. 덕임이라는 한 여성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는 기록되지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2024년 현재를 살아가는 나 역시 두 뺨에서 눈물이 흐른다.
덕임의 다음 생은 누구보다 자신을 위한 삶이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지윤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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