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교한 해체
롤랑 바르트의 『영도의 글쓰기』는 문학을 향한 선언이 아니라, 문학을 둘러싼 순진한 믿음에 대한 해체다. 우리는 흔히 글쓰기를 개성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는 진정성을, 어떤 이는 순수성을, 또 다른 이는 윤리적 결단을 말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모든 전제를 의심한다. 그에 따르면 글쓰기는 단순한 표현 행위가 아니라, 작가가 역사 앞에서 선택하는 태도이며 형식이다. 문제는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 말하느냐, 그리고 그 형식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떠안고 있느냐다.
영도의 글쓰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글쓰기가 “나 예술이야”라고 외치는 사회적 기호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글쓰기가 만드는 세계, 특히 문학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 기호가 소통이 아니라 의례가 되는 순간, 언어는 고독해지고 박제된다. 문학은 살아 있는 발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문학이라고 표시하는 표지판이 된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믿는 문체나 형식은 사실 역사가 우리 손에 쥐여준 제도적 틀에 가깝다. 흔히 문학을 순수한 것이라 말하지만, 역사는 문학이 거부한 지점, 이를테면 ‘순수 예술인 척하는 태도’에서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흐른다. 문학이 걸어 잠근 빗장의 모양새가 곧 그 시대의 역사다. 독재 사회의 시인이 나비와 바다만을 노래한다면, 그것을 정말 순수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순수성의 연출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장치일 수 있다. 예술이 의례적인 사회적 기호가 된다는 바르트의 통찰은 바로 이 역설을 겨냥한다.
바르트는 역사를 담은 글쓰기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고 말한다. 예컨대 18세기 프랑스에서 언어는 곧 하나의 진리였다. 언어는 세계를 투명하게 반영한다고 믿어졌고, 따라서 다양한 문체를 개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체가 부상하지 않았다. 형식은 자명했고, 진리는 단일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언어는 더 이상 ‘나’와 일치하지 않았다. 작가가 쓰려는 단어들은 이미 수백 년간 타인의 입과 펜을 거쳐 너덜너덜해진 기호들이었다. 개성이 개입하면서 언어의 투명성은 흐려지고, 글쓰기의 형식은 내용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힘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제 글쓰기는 단일한 진리를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라, 낯섦과 익숙함, 혐오와 관습, 때로는 살의까지 유발하는 감정의 장이 된다.
그래서 모든 글쓰기는 작가가 숙명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대상 형식을 길들이거나 거부하는 윤리적 고행이 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스스로를 떠올린다. “나는 자유로운 사유가다”라고 믿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내 문장이 역사의 그물망 안에 걸려 있음을 깨닫는다. 내가 선택한 단어가 낡은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재생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무심코 누군가를 배제하는 논리를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게 된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내가 택한 형식이 역사의 감옥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그래서 익숙한 문체를 부수고 싶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문체 없이는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힌다. 파괴하고 싶으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 이중 구속 속에서, 나는 나의 언어를 혐오하면서도 다시 그것에 매달린다.
결국 남는 과업은 대상 형식을 거부하는 훈련뿐이다. 괴물처럼 비대해진 형식을 길들이거나, 끝까지 저항하며 싸우는 일. 바르트는 이를 서로 다른 두 극단의 사례로 제시한다. 하나는 형식을 극도로 밀어붙여 완성의 지점까지 밀어간 귀스타브 플로베르이고, 다른 하나는 형식 자체를 공중으로 흩어버리려 한 스테판 말라르메다. 완성과 파괴, 두 방향 모두 형식과의 사투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2. 오르페우스적 비극과 백색의 글쓰기
작가들은 모두 오르페우스적 비극을 겪는다.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가 저승에서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어기고 결국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린 이야기처럼, 작가 역시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의 욕망을 배반한다.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분신의 부재’, 곧 어떤 제도적 때도 묻지 않은 순수한 언어의 상태다. 그러나 자신의 글을 ‘문학’으로 인식하는 순간, 혹은 독자가 그것을 ‘예술’로 읽는 순간, 그 언어는 즉시 문학적 기호로 굳어버린다. 뒤를 돌아보는 찰나, 에우리디케는 사라진다.
행위는 하되, 그 결과가 기호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 불가능한 욕망이 바로 오르페우스적 꿈의 비극이다. 바르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알베르 카뮈의 문장을 호출한다. 카뮈의 문장은 감상적 수사나 노골적인 도덕적 판단을 배제한 채, 신문 기사나 법정 기록처럼 건조한 표면을 유지한다. 이른바 ‘백색’의 글쓰기다. 여기서 백색은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념도 표면에 드러내지 않겠다는 결단을 뜻한다. 문체를 지워 언어를 두께 없는 유리처럼 만들려는 시도, 문학의 사회적 울타리를 해체하려는 실험이다.
물론 질문은 남는다. 작가는 결코 역사와 형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어떻게 백색의 글쓰기가 가능하단 말인가. 카뮈 역시 특정 시대의 사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았는가. 바르트에게 글쓰기란 언어와 문체 사이에서 작가가 선택한 역사적 태도다. 작가의 언어는 폐기된 형식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형식 사이에 매달린 한계점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언어를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생산을 요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특정 글쓰기를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자유를 부과한다. 작가의 언어는 무고할 수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이 입은 제복의 무게를 자각할 수 있다. 카뮈가 특정 문체를 선택하는 순간, 그는 그 문체가 지닌 역사적 한계까지 함께 떠안는다. 눈 내린 직후의 들판이 백색이라면, 발을 디디는 순간 남는 발자국이 곧 양식이다. 완전한 무흔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백색의 글쓰기는 완벽한 투명함의 달성이 아니라, 매 문장마다 내 안의 ‘문학적 형식’을 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가리킨다. 그 시도가 다시 제도화되고 박제되더라도, 그 짧은 저항의 순간만큼은 인간의 사유를 잠시 투명하게 만든다. 어떤 틀을 선택했다면 그 밖의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의 본질이며 동시에 약속된 자유다.
3. 사유의 세 층위와 권력의 글쓰기
바르트는 글쓰기 행위를 세 층위로 구분한다. 먼저 언어는 역사가 무상으로 제공한 원자재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한 시대의 공통 규범과 습관이 스며든 언어는 작가의 발화를 관통하면서도 특정 형식이나 내용을 직접 규정하지 않는 자연처럼 작용한다. 그는 이를 ‘가능한 것의 초기적 한계’라고 불렀다.
문체는 저자의 생물학적 기질과 과거가 축적한 수직적 욕망이다. 그것은 고유한 향기이자,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필연적 흔적이다. 작가가 아무리 객관성을 가장하더라도, 문체는 그를 배반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글쓰기는 이 둘 사이에서 저자가 선택한 역사적 연대 행위이자 스스로 입기로 한 제복이다. 글쓰기는 창작과 사회의 관계를 매개하며, 사회적 목적에 따라 변형된 언어이자 역사의 위기와 맞닿은 형식이다.
이 지점에서 권력은 가치 판단적인 글쓰기를 제도화한다. 사실과 가치를 구분하는 거리는 점차 사라지고, 묘사인 동시에 판단인 ‘말의 공간’이 형성된다. 예컨대 평론에서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 치밀하다”고 쓴다면, 표면적으로는 구조의 특성을 기술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치밀함이 곧 미덕이며 나는 그것을 판별할 권위를 가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정치적 글쓰기는 정보를 전달하는 동시에 특정 가치를 은밀히 강요한다. 그 순간 글쓰기는 소통을 넘어 제도화된 폭력의 형식을 띤다.
4. 나가며: 침묵을 향한 몸부림
결국 사유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언어와 문체라는 맹목적 힘 사이에서, 나만의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사보타주를 감행하는 일이다. 바르트의 사유가 잔인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유는, 그가 도달할 수 없는 영도의 지평선을 향해 자신의 언어를 집요하게 깎아내렸기 때문이다.
특히 『영도의 글쓰기』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그 사유를 떠받치는 편집의 정교함이었다. 복잡한 논리가 매끄럽게 배열되어 독자를 찌르는 방식은, 내용의 필연성과 형식의 정합성이 만나는 하나의 백색 방정식처럼 보인다. 사유와 형식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고 팽팽하게 긴장하는 지점, 바로 그곳에서 책은 스스로를 증명한다.
우리는 역사의 감옥을 완전히 탈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안의 ‘평론가’와 ‘노동자’가 안주하려 할 때마다, 매 문장에서 대상 형식을 살해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수 있다. 0이라는 불가능한 수치를 향해 미끄러지는 이 실패의 자유야말로, 사유가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바르트의 ‘영도의 글쓰기’는 나에게 시시프스적 형벌을 내리는 대신, 도달할 수 없기에 더욱 매혹적인 정상의 형상을 상상하게 한다. 불가능한 영도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 방향을 향한 긴장만은 우리를 자동적 언어의 기계성에서 구해낸다(다만, 이조차도 바르트가 경계한 ‘과잉’일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