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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네게 가는 바람이 있고, 내게 오는 바람이 있다 - 2026 서울시향 얍 판 츠베덴의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①

모든 바람이 타고 지나간 곳

by 장유진 에디터
2026.08.2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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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일렁, 현악기가 일렁일렁.

피아노가 아른아른. 

클라리넷은 고요하게, 또 너그럽게.

 

시간이 흐를수록 바라볼 것이 많아지고, 붙잡아 봐야 하는 것들도 늘어난다. 아, 새소리를 타고 오는 이 소리는 내게 오나 보다. 모든 바람이 타고 지나간 곳,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깊숙한 발자국이 궁궁 바닥을 장식해나가는 순간까지 모두 구경하다 보면 8월 20일이 다 끝나 있었다.

 

 

 

모차르트, 교향곡 제40번 G단조 K.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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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크림 맛 밀크셰이크를 입 안에 머금은 것마냥 부드럽게, 다만 이건 뭐 특별한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그런데 또 세련된 감칠맛은 기본적으로 탑재한 채 반투명한 작은 원을 그리고 나서 곧장 모차르트를 데려다 놓기 시작한 서울시향.


그래, 이거지. 그들의 커다란 소리 둘레에 보기 좋은 잔향 도우미들이 둘러싸여 있다. 불과 저번 주 일요일에 만났는데 왜 이리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지, 했는데. 아, 네가 없었구나. 더군다나 그때는 베토벤 ‘합창’을 연주해야 했기에 초장부터 합창단 인원까지 모두 합해 무대가 정말 빈틈없이 꽉 차 있었는데, 오늘은 그에 비해 구석구석 빈자리가 눈에 담긴다.


커다란 공간에서 거대한 노래를 불러도 무심한 벽 안에 있으면 애초에 소리의 규모가 작아 보였는데, 이렇게 ‘형상’을 메인 주인공으로 우대해주는 공간을 만나면 사방 곳곳을 다 채워놓지 않아도 이만큼 모두가 여유로워질 수 있구나. 듣는 이도, 노래하는 이도.


웅웅. 저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웅웅’이들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널 모르는 시간 동안 어디서 자라나 이곳까지 왔나? 키는 또 어찌나 큰지,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있는 힘껏 치켜올려봐도 네 머리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너를 바라보는 일에 포기를 모르는 건, 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아도 네 시선이 내 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위함이 아니라 듣는 이를 위하고 있다는 게 다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날의 첫 곡만 봐도 그렇다. 뭐 예습을 했든 말든,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모차르트의 세상이 거기 있었다. 뭔가 대단한 중대사를 논하기보다, 나에겐 크고 누군가에겐 작은 세상 안에서의 질풍노도를 묘하게, 그러면서도 고상한 위트가 넘치는 너울로 노래하는데 문득 이 곡의 이름을 다시 되새기게 됐다.


생각해보니 이거 ‘교향곡’이었지? 내가 평소 생각하던 그 무게감 가득하고, 늘 장편소설만 같고, 협연이 끝나고 인터미션을 한 뒤에 만나는 그 교향곡. 이렇게 부담감 하나 없이 서정적인 명쾌함을 향유할 수 있다고?


큰일 났다. 알아버렸다.

 

 

 

정재일, 인페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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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내가 부담감 하나 없이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취소다.


시작부터 정신이 번쩍번쩍했다. 타악기가 잠을 깨워주는 게 아니라 그냥 지옥으로 향하는 거대한 대문을 열어젖혔다. 첫 곡을 들으며 내가 마음을 놓은 사이, 나보다 훨씬 먼 곳까지 다다라 본 이들이 익숙하게 바닥에 소리를 띄워놓더라.


처음에는 ‘긋는다’고 말해야 하나 했었다. 그런데 내 주먹만큼 아래에 빈 공간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가라앉기보다 아직까지 떠 있는 자들의 목소리구나 싶었다. 현악기가 위와 아래에 애잔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마음을 다 삼켜낼 수 있게 넓은 이불을 깔아놓는 동안, 시작했다는 느낌 한 번 없이 제 위치에서 나타난 관악기가 기억난다.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이 지나가고 있는데 그 흐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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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게 있다. 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는데 저만큼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지? 저 정도로 ‘합심’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누적되어야 하는가.


더군다나 별 같은 소리가 나는 두 대의 타악기가 동시에 행진할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현악기와 관악기군에서 한두 번씩 솔로 파트가 나오는 건 익숙한 일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두 명이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악기를 두드린다. 그 자체로 ‘튕글’거리는 예쁜 소리가 무대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크게 튀어 오르니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마음 편히 당장을 탐미하던 때는 다 어디로 가고, 나는 어느새 나락 근방에 놓여 있다. 방향키를 잡을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지만, 이미 일은 다 벌어졌기 때문에 크게 절망할 필요도 없는 자리에 우리를 데려다 놓더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 바닥에 몸을 뉘인 채 끌려가다 보니 저 멀리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아주 희미하게, 또 맑게.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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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소나무?


별다른 예습도 못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까지는 아니었지만, 도대체 어떤 곡이려나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제목에 ‘소나무’가 있지 않은가. 솔향기가 가득한 내 나라의 것만 연상되면 어떡하지 했는데, 이게 웬걸. 구슬 뽑기할 때의 ‘다르르륵!’거리는 소리가 날 때부터 나는 마음가짐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눈만 반짝반짝. 가방도 옆으로 내려놓고 마음을 동글동글. 오늘도 시간이 금세 지나가버릴 테니 꼭꼭 담아가자.


그런 마음으로 잠시 기다리다가 롯데콘서트홀 오르간 옆, 합창석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보면대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곡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럼펫 주자가 나타났다. 와, 이런 솔로 포인트가 있구나.


나는 신이 난 상태로, 해가 다 저문 시간의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는 와중에 그가 어떻게 첫 등장을 할까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 작은 광장 같은 곳에서 중장년의 색소폰 동아리 멤버들이 야외 무대를 하는 광경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인지 관악기라고 하면 약간 ‘꾸룽’하면서도 강렬하고 기가 센, 뭉툭한 한 방의 소리를 나도 모르게 연상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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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트럼펫 수석 진예찬

 

 

그러니 1악장을 미처 잊지 못했던 나는 가만히 자리에 선 진예찬 트럼펫 수석이 악기를 들어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이렇게 부드럽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상상한 첫 소리의 위치는 내 눈높이보다 살짝 위쪽이었는데, 나보다 아주 조금 아래에서 이어지더라. 가만히 소리가 보내는 것들을 응시하자니 마음이 이상했다.


그들의 소리가 이 공간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체감했다. 맞다. 곧 그들은 유럽 순회공연을 떠나지. 그때에도 이 곡이 있었지. 곡 한가운데에 있으니 다 보인다. 아, 이 소리는 네게 가고 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연곡은 그렇게도 친밀한데, 단원들 사이에 함께 놓인 피아노 선율은 또 그렇게나 낯설 수가 없다. 저기서는 나지 않던 소리인데. 그 와중에 사무치게 부드러워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클라리넷이 건반과 아주 작은 악수를 나누고, 바통을 이어받는 바로 그 아래에는 현악기가 기다랗게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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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클라리넷 수석 임상우

 

 

외형은 안개인데 둘레는 단단하고, 들리는 건 또 편안해서 비현실적이다. 클라리넷 임상우 수석의 소릿길은 더 신기하다. 첫 숨과 다음 숨이 이어지기 전까지의 길이 어떻게 저렇게 울렁일 수가 있는 거지? 가는 길의 굵기에 은근하게 변화를 주니 들려오는 게 한층 풍요롭게 다가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라볼 것이 많아지고, 붙잡아 봐야 하는 것들도 늘어난다. 현악기는 일렁이고, 피아노 소리는 아른거린다. 클라리넷은 고요하게, 또 너그럽게 그 사이를 지나간다. 아, 새소리를 타고 오는 이 소리는 내게 오나 보다.


모든 바람이 타고 지나간 곳,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운 깊숙한 발자국이 궁궁 바닥을 장식해나가는 순간까지 모두 구경하다 보면 8월 20일이 다 끝나 있었다.

 

 

 

앙코르 -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 중 제9변주 ‘님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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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레스피기를 듣고 난 뒤의 열감 때문에 지휘자의 메시지를 정확히 듣지 못한 채 앙코르를 귀에 담았다. 공연이 끝난 뒤 함께 공연을 본 친구에게서 최근 세상을 떠난 단원을 추모하기 위한 연주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다 싶어 동행과 곡 제목을 검색했다. 핸드폰 하나를 서로의 머리 사이에 두고 다시 엘가를 귀에 담았다. 지하철을 내려 마음이 이상했다. 이별이 마음에 담겼다.


나는 님로드가 머문 자리에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끄적끄적 남겨보자.


이별이 서글픈 이유는

만남의 기쁨이 여전하기 때문이지.


기쁨이 만개한 이유는

이별의 아쉬움을 알기 때문이지.


멀고도 먼 행성 중에,

가깝기도 가까웠던 우리가

잠시 다시 만날 수 없겠지만,


나는 이 일이

작별이 아님을 알고 있지.


이별이 만개한 우리는

기쁨을 기약하리.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잊는 날까지 기억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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