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국립극단 온라인극장에 올라와 있는 <영지>를 다시 보았다. 청소년극 <영지>는 굉장히 독특하고 시끄러운 작품이다. 12살 정도 나이대의 관객의 시선에 맞추어 공연을 지루하지 않게 구성했고, 무대도 제의적이고 놀이적인 구성이 강하다. 그래서 11살 영지가 나오는 이 연극이 처음에는 필자에게 다소 낯설게, 당황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공연은 ‘문’을 통해 이중구조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비가 있는 병목안이라는 상상의 문, 영지가 집을 나가는 세트장의 문, 그리고 마지막에 영지가 나가는 극장의 문으로 총 삼중의 문이 있다. 중계로 볼 경우 카메라가 세트장 문과 극장 문이라는 이중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상징적인 연출을 카메라가 잘 표현한 것이다. 메를린과 친구들이 있는 영지의 '이야기의 세계'에서 영지와 친구들이 있는 '극 안의 현실 세계', 그리고 배우와 관객들이 있는 '극 밖의 현실 세계로'의 ‘해방’을 소주병(병목안) 그림을 찢으며 연쇄적으로 보여준다. 즉, <영지>는 자신을 옥죄고 있는 것들을 찢고 나오는 과도기 청소년의 '해방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Ⅰ. 영지와 아이들
공연의 시끄러움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개인적으로 인상적이던 장면을 먼저 말하자면,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기다리는 친구들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악마 선생들이 영지에게 이야기를 받으러 올 때였다. 영지는 “불러온다. 불러온다.”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어린 시절의 것들을 묻어버리다가 불현듯 엉엉 울어버린다. 가수 이랑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라는 노래가 나오고, 악마 선생은 그녀에게 충분히 울 시간을 준다. 그 울음에선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는 시절과 작별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이 터져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영지를 기다려주는 악마 선생의 모습은 마치 과도기에 있는 존재, 특히 ‘아이’를 충분히 존중하고, 그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처럼 느껴졌다.
마음껏 운 영지는 다시 새로운 연극을 시작한다. 메를린이 된 영지는 병목안 아이들에게 하기 싫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묻는다. 이후 아이들은 ‘레인보우파바박초딩빠스뿜증후군’에 걸린다. 이 병의 증상은 사춘기의 전형적인 증상들인데, 반상회 어른들은 그것이 아주 심각한 일인 것처럼 떠든다. 이야기들 사이에서 여전히 영지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음을 열게 한다. 아이들은 영지를 만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고 어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싶어 하게 된다. 반상회 어른들은 그런 영지를, 메를린을 ‘마녀’라고 부르며 쫓아내려고 한다. 영지는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고 외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아무튼 저는 마녀입니다.”라며 그들이 원하는 말을 들려준다. 그 순간 트로트풍의 음악과 함께 ‘거짓말이야’라는 자막이 깔린다.
영지처럼 변한 아이들을 되돌리거나 내쫓아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 때문에 결국 영지는 환생식을 연다. 그러나 영지는 기어코 영지 자신을 잃지 않고, 새로운 출구를 찾아서 떠난다는 선택을 한다. “내일 또 다르고 모레 또 달라요.”, “메를린이 새로운 통로를 찾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길도 아닌, 나비가 막고 있는 문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통로.”라고 하면서.
한편, 효정은 어른들의 말을 아주 잘 듣는, 병목안에 ‘어울리는’ 하얗고 착한 아이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불이 켜지지 않는 라이터를 찾고 있던 영지가 효정을 마주쳤을 때, 효정은 어른들의 기대와 달리 바닥에 철퍼덕 누워있다. 그러니까 때때로 효정이는 하얗지 않다. 매 순간 웃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효정은 어른들의 기대에 응하는 것이 버거운 것이다. 또 다른 아이 소희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미술 시간에도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다. 수업이 남았지만 집으로 가는 영지와 달리 남은 수업을 모두 마치고 영지의 집으로 놀러 가는, 전형적인 모범생 유형이다. 효정과 소희는 영지의 집으로 모여 이야기를 들으며 놀지만,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떠난다.
영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아이도 사이렌이 울리면 돌아가야 한다. ‘학원과 엄마’는 왜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사이렌’ 소리일까? 사이렌은 위험하고 위급할 때만 울리는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영지>가 아이들의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는 연극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어른들이 좋은 의도로 이른 기상과 공부를 요구하고, 반상회에서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띄우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이들에겐 충분히 강요나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른들의 말이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지는 다시 홀로 남겨져 효정과 소희가 떠난 자리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그 등이 외로워 보여 안쓰럽다. 청소년기를 준비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피터팬처럼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영지. 자라면서 과도기의 ‘나’가 흐릿해지지만, 분명 모두에게 자리했을 감정이고 시절이다. 영지는 그 자리에서 다시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멀어져 버린 어린 시절을 의미하는 것도 같다. 또한 불이 켜지지 않는 라이터를 찾는 것,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강 그림은 영지가 어른의 것과 나(아이)의 것 사이에서 찾은 나름의 타협점 같았다. 라이터가 어른의 것이라면 불이 켜지지 않는 안전함은 아이의 것이라고, 순리대로 흐르는 법칙이 어른의 것이라면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아이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Ⅱ. 이야기
소주병 안에 갇혀 나오라고 아무리 흔들어도 꽃들 사이에 파묻혀 나오지 않는 ‘나비’와 하얗고 깨끗한 병목안 안에 살며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환경에 집착하는 ‘반상회 사람들’은 꽤 비슷하다. 나비는 소주병이라는 세계가 “너무 편하거든”이라고 말한다. 병목안 사람들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새로운 이야기를 전파하는 영지가 낯설고, 더 나아가선 무서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영지>는 질서정연하고 합리성만을 추구하려는 세상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극 중 진행되는 ‘시체, 뼈, 심장 놀이’에서 심장을 빼앗으라 하며 "생각하지 않는 어린아이로 거듭나야 한다"라는 말과 "시체가 되라"는 말은, 수많은 상상과 공상을 하며 알록달록했던 지난날을 버리고 철이 들고 의젓해지라는 요구처럼 들린다. 영지는 “여러분은 4학년으로서 고학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시체가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 해당 이야기에서 영지는 관에 들어가 시체가 되는 과정을, 인형 머리가 달린 연필을 연필깎이에 넣는 것으로 연출한다. 초반에 병목안에선 특정 시기가 되면 인형의 팔다리를 새로 갈아 끼워야 하는데, 이를 거부하는 아이가 엉엉 울며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모든 어른들의 말에 수긍하며 자란다면, 그렇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어른이 된다면 소위 ‘낡고 지친’ 사회인이 될 것이다. 사회에 섞이는 과정에서 조금은 평범해진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평범성 안에 자신만의 특색마저 지우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영지는 영지라서, 소희는 소희라서, 효정은 효정이라서 귀한 존재다. 그 색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그것이 어른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여러분은 절대로 스스로 생각하는 어린이가 되지 마십시오.”라는 영지의 대사는 정말로 그런 어린이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닌 그 반대의 의미로 들렸다. 오히려 스스로 생각하라고, 어른들의 말에 쉽게 수긍하고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기만의 색을 지키며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래서 “괜찮아. 어른들이 붙잡으러 오면 나는 또 새로운 세계로 가면 되지.”라는 대사도 마음에 든다. “아직 모를 수도 있지만, 사실 네가 지금 속한 세계만이 정답은 아니야. 원한다면 언제든지 새로운 세계로 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Ⅲ. 어른이 되어 다시 보는 청소년극
“수업 시간은 선생님 말 듣는 시간이잖아요.”
필자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굉장히 말을 잘 듣는 아이였고,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소희처럼 수업 시간엔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 수업의 취지에 맞는 그림을 그리던 아이. 풍경화를 그릴 때 영지처럼 양배추를 그릴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문득 <영지>를 보면서 어릴 적 ‘나’라는 존재가 다시 궁금해졌다. 왜 양배추를 그릴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을까? 왜 당연히 풍경에는 길과 강과 산만 있다고 생각했을까?
프로그램북에 쓰인 ‘초등학교 때 알던 친구 중에 언젠가부터 사라진 친구도 멀어진 친구도 있었다’라는 문장을 곱씹어본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을까. 바쁘고 소란스럽게 환생식이 열리는 동안 출구를 찾아 떠난 영지처럼, 모르는 사이에 모두 각자의 세계로 떠나버린 느낌이 든다. 어른이 되어서 청소년극을 처음 봤을 때 마음이 갔던 이유도 같은 맥락에 있다. 청소년극을 보면 그 당시에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나갔던 시절을 다시 돌아보면서 ‘그때의 나’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물론 공연이 의도한 관람자에 해당하는 나이대에 보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받는 늦은 위로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재조립의 과정도 꽤 값지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필자가 뒤늦게 받은 이 위로가 아이들에겐 너무 늦지 않게 닿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세상엔 너무나도 다양한 어린아이들이 있다. 규정짓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모든 아이가 <영지>의 관객이기에, 해당 공연은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접근성’에 대한 고민이 돋보인다. 대사들은 자막으로 나오고, 무대 위의 소품들과 인물들의 행동은 모두 대사로 발화된다. 해당 공연 속 ‘제7의 멤버’가 음성 해설을 맡았다. 이는 연극을 더 연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연극의 이해를 돕는 일석이조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영리한 연출이다. “이건 연극이니까.”라는 대사는 연극이 익숙하지 않은 (특히 어린) 관객들에게 억지로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연극은 연극이라고 친절하게 말해주고 있다.
<영지>가 ‘모든 아이를 위한 연극’이라는 인상은 연출뿐만 아니라 연극을 제공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순회공연을 진행한 것이다. 10대 초반의 청소년엔 비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서울 거주 주민뿐만 아니라 지방 주민들도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유형의 아이들을 생각하고 신경 쓰는 것이 보여 그 섬세함에 놀랐고 감동했다. 그래서 청소년극은 모두를 위한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내면에 '지키고 싶은 어린시절'이 있다면 누구나 보기 쉽고 즐거운, 참 다정한 연극이라고.
Fin. 원하는 세계로의 해방!
안전한 곳에 자신을 가두고 그곳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해야만 할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어쩌면 <영지>는 그럴 때 필요한 연극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국립극단에서 한 아동청소년극 시리즈는 아동과 청소년 사이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나이대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영지>도 그중 하나다. 이 공연은 기본적으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다. 그러나 어린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이 어른들도 이 연극을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든다.
탈출 혹은 해방의 과정에서 <영지>는 자유분방하게 만든 ‘이야기’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필자는 '이야기를 만드는 연극인들'의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멈칫거림을 떠올렸다. 영지가 이야기를 만들어 병목안 사람들을 구해낸 것처럼, 연극이 대한민국 사회라는 병목안에 살고 있는 관객에게 긍정적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연극인들은 그들이 대표적인 ‘틀 밖의 존재’다. <영지>는 그런 존재들 모두에게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용기를 주는 것 같다. 그렇게 <영지>는 예술가가 잃어서는 안 되는 동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영지를 지켜주자고 말하고 있다. 오늘도 아이들과 비주류의 해방을 응원한다. 떠나자, 원하는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