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문화재(현 문화유산)는 꽤 오래전부터 내 곁에 있었다. 나름의 입시 전략에 맞춰 들어간 전공 덕분에 대학 시절 발굴 현장도 가보고, 박물관마다 각종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라는 공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졸업 후에는 문화재를 직접 마주할 일이 더 많았다. 어쩌다 보니 전공을 살려 입사하게 된 첫 직장에서 문화재 관련 연구 용역을 맡는 팀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신입이던 내가 하는 일이라곤 현장에서 팀장님을 도와서 보조하는 역할이 다였지만, 실제 현장에서 여러 문화재를 만날 때면 늘 신기했다. 짧게는 몇십 년, 길게는 몇백 년의 역사를 품은 존재가 현재의 나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 몇 해 전 현장 조사차 방문했던 한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어 우리 팀에서 현장 조사를 수행하게 됐다. 그 전까지는 주로 도심 속 문화재를 맡아왔던 터라, 지방으로 직접 내려가 현장을 조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 설렜다.
도착한 마을은 정말이지... 사극 촬영장(!)에 온 것 같았다. 오래된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은 평소 도시에서 보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들뜬 마음도 잠시, 한여름 뙤약볕 아래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보니 몸은 금세 녹초가 되었다.
그러다 마을 주민들과 약식으로 인터뷰를 하게 됐다. 물 한 잔 주시겠다며 들어가게 된 어떤 집에서는 마침 틀어두신 트로트 프로그램을 함께 보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촬영 양해를 구하다 본인이 살고 계시는 가옥의 구석구석을 소개해 주시겠다며 내게 1일 안내원을 자처하신 할아버지도 계셨다.
다음 날 사무실로 돌아와 보고서에 수록할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사진을 들여다봤다. 주민들의 이야기가 더해지니 하나의 서사가 완성되었고, 이내 사진 속 가옥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빨리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기계적으로 셔터를 눌러댔던 당시 프레임 속에서는 알 수 없던 이야기였다.
물론 사진은 실제로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이상하게도 어떤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게는 그날의 사진이, 그리고 책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의 저자인 서헌강의 사진이 그렇다.
그는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그의 사진 속 대상은 단순한 유물, 건축물에 그치지 않고 마치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의 흔적과 시간까지 담겨있는 듯하니까. 그 답은 1장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우연과 운에 기대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철저한 계산과 계획으로 자신의 프레임 안에 담을 대상을 준비한다.
그중에서도 그의 사진에서 인상적인 건 단연 조명이다. 그에게 조명은 단순히 대상을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시간과 이야기를 드러내려는 방법처럼 보인다. 덕분에 그의 사진 속 대상은 분명 내가 아는 공간임에도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진다.
책의 표지를 장식한 종묘 정전의 모습은 그의 조명 연출에 감탄을 내뱉게 만든다. 무려 5년을 기다리며 이 순간을 준비한 저자는 종묘 정전에 왕실의 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며, 그 공간이 가진 엄숙함과 시간을 어떻게 한 장의 사진 안에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덕에 평소에도 익숙하게 보아왔던 종묘 정전이지만, 그의 사진 속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운과 우연에 기댄 예술은 없다. 공력을 들이고 연출을 구상하는 등 철저한 사전 준비가 없다면 결코 현장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 내게는 사전에 현장을 답사하거나 문화유산 관련 자료를 공부하는 것 외에도 일기예보를 점검하고, 구름의 패턴을 분석하는 것도 기다림의 한 과정이다. 끊임없이 집중하며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하다 보면 늘 새로운 방법이 튀어나왔다.
(…)
‘진짜 이 방법밖에는 없나?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얼마든지 더 새로울 수 있잖아?’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숱한 우연을 만나고, 또 만들 수 있었다. 이를 다르게 말한다면 내게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느닷없이 ‘운명처럼’ 만나는 장면이 허락되지 않았던 셈이다.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 p.92
그 밖에도 책 속 문장들을 읽으면서 몇 해 전 마을에서의 내가 떠올랐던 건, 아마도 그때의 내가 놓친 것이 많았다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때 나는 보고서에 필요한 사진을 기록하는 데에 집중했다. 앞에서 한 장, 뒤에서 한 장, 좌우 측면… 조사에 필요한 사진을 남기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진을 찍기 전에 그 공간이 어떤 곳이고, 그곳에서 누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헌강은 사진을 찍기 전, 대상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 안에 담을, 더 나은 방법이 없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가 사진에 담는 건 단순히 그 순간의 풍경이 아니라 그 사진 한 장을 만들어내기까지의 준비와 기다림의 시간까지인 셈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문화유산을 ‘기록’하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그것을 오래 ‘바라보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진은 멈춘 시간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삶과 감정을 비춘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도구이지만, 한편으로는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기억을 끄집어내서 지금의 나를 반추하게 한다. 그래서 사진은 대상 그 자체보다 그것에 깃든 시간의 흔적을 포착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 p.163
작가는 자신의 프레임 안에 담을 문화유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 것인지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그렇게 그가 문화유산과 나눈 대화의 흔적은 고스란히 그의 사진 위에 드러난다. 문화유산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도 어쩌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것을 단순히 ‘오래된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이야기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어쩌면 책 <나는 오늘도 유물과 대화하러 간다>는 사진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려주는 책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은 뒤 사진 속 문화유산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흔적과 이야기에 조금 더 오래 눈길을 주게 될 테니까.
무심코 지나쳤던 문화유산을 다시 바라보고,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시간과 이야기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 문화유산이나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물론이고, 나처럼 문화유산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면서도 어느 순간 당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