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문화유산 사진작가 서헌강
국내외 여러 유무형 문화유산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문화유산 사진작가.
우리 문화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핵심이 된 사진들을 작업해왔으며
20여 년간 해외에 흩어져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조사하는 일에도 참여해 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대통령 표창(2018)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국가유산청장 표창(2023)을 받았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심드렁한 얼굴로 단체사진을 찍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오른다. 조금 더 커서는 가만히 자리에 서 있는 석탑이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오래된 유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간간이 있었는데 그때도 내 표정은 한결같았던 것 같다.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 거지?’
최근까지 그쪽으로 별다른 감흥 없던 나는 이 책을 계기로 어쩌면 그동안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방법을 정확히 몰랐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 공간(고궁)과 사람(장인), 유물의 가치를 얼마든지 시대 흐름에 맞게 맥락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30여 년간 현장을 누벼온 저자의 문화유산을 향한 깊은 신념과 열정적인 행동 때문이다.
평소 문화유산과 호흡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저자는 오래된 것들에게서 각각의 사연과 이야기를 발견해내어 작업하기를 지향하는데 그 때문인지 이 책에 실려 있는 70여 장의 사진은 제 목소리를 내듯 생생하게 존재하는 듯했다.
책 표지 커버만 봐도 그러하다. 저자가 5년을 기다려서 찍은 종묘 정전의 푸른 밤 풍경 사진은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고유한 아름다움을 새롭게 감각하게 만든다. 더 큰 울림을 준 건 커버 뒷면을 장식한 고창의 무장읍성 사진이다. 그렇게 나는 양면으로 살아 숨 쉬는 건축물들에게 조용히 압도 당했다.
사진들은 계속해서 나를 끌어당긴다. 1. 천년 전의 온기가 담긴 건축물들과 2. 사라져가는 전통을 손끝으로 이어가는 국가무형 유산 보유자들과 3. 기나긴 세월을 품고 있는 유물 사진들은 정형화된 느낌 없이 저마다의 서사를 드러내고 있다. 살아 보지 않은 시대지만 사진에서 현장성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현재에도 일정 부분 통용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처럼 오래된 문화유산이 그저 옛것으로만 치부되는 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쉼과 사색 같은 또 다른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오래된 것일수록 새로운 감각으로 낯설게 해야 한다’는 저자의 정체성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저자는 특히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두는데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찰나를 사진으로 포착하기 위해 매 순간을 치밀하게 준비한다. 이를테면 궁궐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선인(先人)들의 하루를 상상해보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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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이면 왕은 다시 침전인 창덕궁의 대조전으로 돌아와 무사히 일과를 마친 소회를 왕비와 함께 나누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대조전은 따뜻하고 온기가 가득한 공간이 된다. 한겨울 지붕 위로 소복이 눈이 쌓인 저녁, 나랏일로 나쁘고 지친 하루를 보냈을 왕을 반기는 침전은 창호 너머로 새어 나오는 촛불의 빛처럼 따스함이 깃들어 있기를 바랐다. 이런 장면을 포착하려면 간밤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겨울날이어야 했고, 짙은 어둠이 깔리기 전이어야만 했다.
저자는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텅 빈 장소를 향해 감정 이입을 하고 이를 통해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이야기를 발견해 내려 한다. 현재와는 무관한 단절된 시공간이 아닌 선인들의 삶과 온기를 품은 공간으로서 다시 재해석하는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와 교감하고 있는 곳 중에 ‘한양도성의 낙산구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곽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곁에 묵묵히 존재하고 있다. 아득히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지켜주었다는 점에서 든든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문화유산으로부터 현재성과 역사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저자는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한다고 한다. 현장 답사, 관련 자료 공부, 일기예보 점검, 구름 패턴 분석, 피사체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빛과 시간까지 철저하게 고려한다. 저자는 자연에서 빛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면 인공조명이나 촛불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고. 모든 과정을 운과 우연에 기대지 않는 그의 성실함에 경의를 표한다. 붉게 물든 수원화성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뜨거워진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사물과 시간, 어떠한 특정 대상 사이에서도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다는 저자의 시각이었다. 주로 인간관계에서 쓰이는 이 단어가 안동 병산서원의 만루대까지 확장되어 쓰인 점이 내게는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기둥 사이 사이로 비춰지는 자연경관이 언제나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처럼 후손들 또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나아가길 바라는 옛사람들의 휴머니즘을 저자는 놓치지 않고 사진 속에 담으려 했을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귀한 사람을 대하듯 문화유산을 대한다. 매력적인 서사를 발굴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과거의 산물과 진심 어린 소통을 나눈다. 잇지 않으면 잊혀지기에 혼신을 다해 문화유산의 맥박을 이어간다. 애호하는 그 마음이 결국 우리 문화유산에 긴 숨결을 불어넣는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사람과 사물을 잇는 것은 결국 우리의 꾸준한 관심에 달려있기도 하다. 감각적인 박물관 굿즈로 한국 그리고 한국의 문화유산에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된 요즘인데 이 현상이 일시적인 열기가 아니길 바란다.
선인(先人)들을 거쳐 우리에게 당도한 문화유산. 이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삶에 접목시킬지는 우리의 몫이다. 사는 동안 우리 것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잇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 모여 우리 문화유산을 수호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