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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피파 얼릭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 <천산갑: 쿨루의 여정>



 

 

피파 얼릭 감독이 신작 다큐멘터리로 돌아왔다.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전작 <나의 문어 선생님>에 이어 <천산갑: 쿨루의 여정>이란 작품으로 또 한번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천산갑: 쿨루의 여정>은 불법 야생동물 밀매 현장에서 구조된 새끼 천산갑이 여러 보호자의 보살핌을 받고 야생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담은 자연다큐멘터리다.


다큐는 인간과 따로 또 같이 생활하는 환경 속에서 천산갑 ‘쿨루’가 진정한 홀로서기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이야기를 차분하면서도 생생하게 풀어내고 있다. 용맹함보다는 특유의 무던함으로 야생에서 좌충우돌하는 묘한 생명체를 보고 있으면 어느덧 쿨루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미지의 생을 들여다보는 일. 생명체 본연의 자생력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울컥하는 게 있다. 홀로서기 중인 사람들에게 이 뭉클한 다큐멘터리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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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진은

<천산갑: 쿨루의 여정>

공식 트레일러에 등장한 장면입니다




벼랑 끝에서 얻게 된 두 번째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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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동물 천산갑을 야생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유니콘 같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안타깝게도 야생동물 불법 거래의 현장에서다. 수십 가지의 상업용 약재에 천산갑의 비늘이 들어간다고 한다. 천산갑은 현재 중국 약재용으로 끊임없이 포획되고 있는 상태다. 개체 멸종이 20~30년 사이에 이뤄질 거라고 보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천산갑 불법 거래의 현장. 밀매업자의 첩보가 들어왔다. 관련 종사자들은 이미 한 팀이 되어 위장 수사 현장에 미리 잠복해 있다. 구매자로 위장하여 불법 거래의 결정적 순간에 급습하기로 한다. 얼마 안 가 밧줄로 동여맨 통 하나가 발각된다. 통 안의 아기 천산갑은 일주일 동안 업자에게 잡혀 있었다. 한창 어미와 있어야 할 새끼가 강제적으로 밀렵이라는 트라우마를 겪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작고 온순한 천산갑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달릴 수도 깨물 수도 없는 너무도 무해한 존재의 유일한 방어 수단은 몸을 둥글게 마는 것뿐이다. 구조되지 않았다면 외로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천산갑을 구조하고 방생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관련 종사자들은 힘을 한데 모은다. 보호 봉사자, 생태학자, 야생동물 재활 전문가, 환경 관리 조사관, 개미 연구소 박사가 잠시 길 잃은 생명체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아기 천산갑은 기적적으로 두 번째 생을 맞이한다.




이토록 작고 연약한 천산갑 ‘기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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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천산갑은 비를 내리게 하는 영험한 존재이면서 8,500만 년의 세월 동안 공룡과 함께 진화한 고대 생물이다. 딱딱한 비늘로 온몸을 무장한 유일한 포유류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진귀한 생명체이다.


생김새도 정말 신비롭다. 여러 동물이 부분적으로 합쳐진 것 같은 복합적인 외형을 하고 있다. 마치 거대한 솔방울에 발이 달려서 걸어 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포켓몬 느낌도 난다.


천산갑은 티라노 공룡처럼 앞다리 두 개를 덜렁 든 채 뒷다리로 빠르게 종종종 걷는 것이 특징이다. ‘달리다’를 뜻하는 ‘기지마’. 다큐의 주인공인 이 기지마는 아직 어려서 초반에 팔로 몸을 지탱하며 걷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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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갑은 무음의 동물이다. 선천적으로 성대가 없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한다. 5m 거리에 천산갑이 있다고 해도 알아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조용한 생명체다. 심지어 시력도 무척 나쁘고 이빨도 없다. 딱히 입이랄 것도 없어서 입을 벌릴 수도 없다. 아주 작은 구멍 하나를 통해 혀를 낼름 내밀어야 먹이를 섭취할 수 있다. 먹이도 개미가 전부이다. 워낙 순하고 조용해서 어쩔 땐 짠해 보이기도 한다. 공격성이 0인 수준이라 야생동물치고는 억울한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대신 청력이 아주 좋고 후각이 개보다 뛰어나다. 코가 땅에 닿으면 땅속 30cm 아래에 있는 개미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


천산갑은 보통 1년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아서 6~7개월 동안 헌신적으로 돌본다. 그리고 어느 정도 큰 새끼는 어미 등에 업혀 고형식을 먹고 먹이 찾는 법을 배운 뒤 독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우리의 꼬마 기지마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결정된 방사 가능 체중은 6.5kg. 치료를 마치고 바로 야생으로 내보냈을 때 변화가 너무 컸던 탓에 천산갑들이 목숨을 잃게 됐고 그 이유로 야생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로 했다고. 체계적인 방사 절차를 갖추게 되면서 100마리 정도의 천산갑이 다시 야생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천산갑 쉼터로 적절한 장소를 찾으려는 시도 또한 계속 이어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북쪽에 위치한 라팔랄라 야생동물 보호구역. 산과 습지와 초원을 갖춘 최적의 장소에서 과연 어린 기지마는 어떻게 적응해 나갈까?




주특기1: 도망치며 조금씩 일 보 전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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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갑 쉼터 후보지 라팔랄라 터치스톤 캠프. 천산갑 보호소는 외부 비공개 장소로서 한 마리당 한 명의 봉사자가 배정되는 시스템이다. 보호 봉사자 ‘개러스’는 온갖 트라우마를 겪은 어린 기지마의 마음 치료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1일차 기지마의 체중은 겨우 3kg 정도. 라팔랄라가 처음인 기지마는 그저 빠르게 달렸다고 한다. 터를 잡고 먹이를 찾기보단 우선 도망치는 것이 기지마에게 가장 시급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천산갑은 그저 자신의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천산갑과 함께하는 생활은 아주 고요하다. 아침 먹을 시간이 되면 개러스는 밖으로 나가 녀석을 땅에 내려놓고 직접 먹이를 찾게 한다. 종종 걸음으로 도망치며 곁에 있는 봉사자를 불편해하는 기지마와 그런 기지마에게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봉사자. 둘은 이 지난한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도망치기와 익숙해지기 사이를 오가며 활동 장소를 조금씩 확장시켜 나간다.


그렇게 하기를 2개월 4일 차. 열심히 도망치고 열심히 먹는 사이에 체중이 3.8kg로 늘어났다. 기지마를 야생으로 무사히 돌려보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무게이지만 그래도 진전이 있다. 희망이 보인다.




주특기2: 소리가 안 날뿐, 조용하고 치열하게 성장하기


 

1. 울타리 감전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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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러스가 기지마를 데리고 산책을 하던 중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기회를 엿보다 울타리 쪽으로 도망가는 녀석을 밀어내려 한 순간, 전류가 자신의 몸을 통과해 기지마까지 감전 시킨 것. 푸르르르 소리를 내며 몸을 만 채 벌벌 떠는 녀석은 설상가상으로 감전된 게 개러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실망한 개러스는 컴컴한 터널을 걷고 있을 기지마를 보며 방황했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이 감전사고는 기지마가 개러스를 용서하는 데 오랜 시간이 들도록 만들었다. 둘에게 어둠이 잠시 내려앉는다.



2.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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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마(=달리다)에서 쿨루(쿨룰라=편하다)로 이름을 바꿔서인지 ‘쿨루’의 행동이 더 과감하게 보였다. 개러스가 나름 영역 경계를 만들어 주려고 애쓰지만 순순히 따라올 쿨루가 아니다. 자기를 안 볼 때면 미친 듯이 질주해서 힘껏 달아난다.

   

야생 복귀 훈련 중 하나인 땅굴 탐색. 뭐 밖에서 자고 싶은 날도 있을 거다. 저녁에 가끔 쿨루가 몰래 땅굴에 들어간다는 것은 개러스가 굴 입구 옆에서 보초를 서며 밤을 꼬박 새워야 한다는 뜻이다.


4개월 3일차, 체중은 5.2kg에 달했다. 위치 추적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녀석을 한 시간 정도 혼자 있게 한다. 쿨루는 거대한 개미집도 발견하고 촉촉한 흙에 온몸을 뒹굴기도 하며 전보다 편하게 해방감을 즐긴다. 개러스는 점차 쿨루를 믿는 법을 배워간다. 쿨루와 함께하며 새로운 것을 보게 된다.



3. 놀고 탐험하며 야생 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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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갑도 인간처럼 각 개체마다 기질이 다르다. 둥글둥글하여 경계심 없이 다니는 개체가 있는가 하면 쿨루처럼 다소 예민하고 긴장을 잘하는 개체도 있다. 조용하고 겁이 많은 클루는 대신 자유에 대한 의지가 상당하다. 점점 자연 환경에 적응해 가며 차분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장난기 있는 의외의 모습도 보여 준다. 몸을 식히기 위해 물을 부어 줬더니 나무에 몸을 말아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자기 꼬리를 개러스의 팔에 감으며 놀기도 한다. 놀이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익혀가고 있었다. 꼬리를 잡고 들어올리는 행위를 허락해 준 쿨루. 방사 후 첫 사흘 동안 쉬지도 않고 하루에 4km 가량을 이동한 클루는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주변의 다양한 냄새를 익히고 잠재적 위협이 있는 곳을 자연스레 인지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엄청난 변화다.


모든 천산갑은 각자의 위험을 맞닥뜨리며 야생에서 살아가야 한다. 쿨루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야생동물들의 공격 속에서 자신을 지켜 내야 한다. 체중은 어느덧 6.2kg. 6.5kg이 되면 몸을 단단하게 말아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강해질 것이다.


포효가 없을 뿐, 이렇게 조용히 알을 깨고 나오는 고요한 성장도 있다.




굴에 갇힐 때도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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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을 방사한 지 8주 차. 개러스는 보호 구역으로부터 쿨루가 굴에서 안 나온다는 연락을 받는다. 굴이 무너진 건 아닌지, 쿨루가 이미 죽은 건 아닌지 최악의 상상을 하던 개러스는 혼자서는 힘에 부쳐 밀렵 단속반과 함께 땅을 파낸다. 네 시간 넘게 파다가 드디어 텅 빈 공간을 찾아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쿨루를 땅속에서 꺼내는데 죽은 줄 알았던 녀석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괜찮아? 어디 안 아파? 여기서 뭐 했어?” 라는 걱정스러운 질문에도 쿨루는 그저 얌전히 품에 안겨 개러스를 쳐다볼 뿐이다. 녀석은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이 상황이 멍하기만 하다. 그가 쿨루를 땅에 내려놓자 쿨루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는지 개미집을 찾자마자 허겁지겁 먹기 바쁘다.


굴을 좋아하지만 굴에 갇히는 황당한 일도 생긴다. 바깥세상은 이렇게나 별일 투성이구나 하며 쿨루는 자신이 무적의 동물이 아니란 사실을 크게 깨달았을 거다. 그걸 알게 된 순간, 녀석은 스스로 뭐든 할 수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 어떤 압박 없이 원하는 때에 자기 방식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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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전체가 어느새 쿨루의 영역이 되었다. 야생에서 열심히 발품을 팔아 좀 더 울창하고 물가가 있는 곳에 괜찮은 보금자리를 마련하는가 하면 여기저기에 자기 냄새를 남겨 짝을 찾고 다니기도 한다. 진흙탕물에서 맘껏 몸을 적시거나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끼워 넣고 편히 쉬기도 한다. 또한 쿨루는 자기를 보러 온 개러스를 피해 숨거나 몸을 바짝 낮춰 주변 환경에 섞여 들려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한다.

    

순탄하지 않았던 이 모든 과정이 결국 쿨루에게는 지름길이자 제일 생산적인 생존 양식으로 작용한 셈이다.

 



스스로를 믿는 데서 시작되는 진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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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간의 모니터링을 끝으로 개러스는 쿨루의 꼬리표를 제거한다. 추적기가 사라졌으니 이제 녀석을 찾을 방법은 없다. 아프리카 천산갑 보호 협회는 쿨루의 방사에 성공한 이후 전담 재활센터인 천산갑 쉼터를 설립했다고 한다. 더 많은 천산갑 개체들이 쉼터의 보호 아래 야생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꼬리표가 사라진 순간 진정한 자유의 길로 들어선 클루. 그 어떤 도움 없이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하며 더 강인한 개체로 거듭날 것이다. 조급함이 일을 그르친다고 했던가. 느리고 도망치고 움츠러드는 가운데 조용히 강해지는 천산갑의 성장을 지켜보며 자기 속도에 충실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최적화된 나만의 삶의 양식을 찾는 것은 모든 만물의 숙제일 것이다. 나의 고유성으로 살아남는 일에 시간이 걸림을 인지하고, 지켜보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라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의 힘’이 내게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녀석의 안녕을 바라는 게 꼭 나의 안녕을 바라는 것 같다. 쿨루가 진심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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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ch.ART
사진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유일한 자기방어 수단이 몸을 둥글게 마는 것 뿐인, 나약하고 무해한 동물이었네요! 글을 읽고 흥미가 생겨서 영상 찾아보니 귀엽기까지 하더라구요. 개미  사냥할 때 혀 낼름거리는 모습이랑 두 발로 총총 도망가는 모습이 특히 귀여웠어요 ㅎㅎ
개미핥기, 아르마딜로랑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져서 찾다보니 코로나바이러스 발생 원인 연구에서 중간숙주로 천산갑이 추정되었다는 내용이 많이 보였는데, 이러한 연구결과도 하나의 이유가 되어 중국 내에서도 천산갑이 전통약재 목록에서 제외되고 보호등급이 올라갔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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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3 08:43:17 0